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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조선을 꽃피운 전문가그룹 ‘중인’

입력 : 2008-08-29 17:22:28수정 : 2008-08-29 17:22:30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허경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 백 짐이던가. 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 묻지를 마소. 육십 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무려 83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조수삼이 읊은 시는 조선시대 중인의 절절한 한이 담담하게 풍겨 나온다.

도화서 화원 유숙이 그린 ‘수계도’의 일부분. 1853년 3월3일 중국의 난정모임이 있은 지 1500년 되던 해를 기념해 30명의 중인이 시회를 개최하는 장면이다.


그런가 하면 바둑 국수 유찬홍은 죽어서야 신분차별이 끝장나는 중인의 울분을 시로 토해낸다. “한강 물로 술 못을 삼아/ 마음껏 고래같이 마셔 봐야지./ 그런 뒤에야 내 일이 끝나리니/ 죽어 버리면 곧바로 달게 잠들 테지./ 그대들도 보았겠지. 이 뜬 세상을/ 만사가 한바탕 꿈이란 것을.”

중인은 사대부·양반은 물론 평민과 천민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 경계인으로 살았기에 애환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위항인(委巷人)으로도 불리는 중인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가꾸고 나름의 문화를 일궜다. 중인을 위항인이라 부른 것은 그들이 살았던 곳에서 비롯됐다. 위항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이 많은 동네를 이른다. 인왕산과 청계천 일대가 조선시대 중인들의 터전이었다. 특히 인왕산 기슭에 문화 공동체를 형성했던 중인들은 시사(詩社)라는 시문학동인을 만들어 교우하며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중인들은 조선의 문예부흥을 꾀한 정조 이래 새로운 문화 터전을 풍성하게 살찌운 주역이다. 이들은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의학, 천문, 외교, 율법, 금융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중심이었다. 중인은 평생토록 한 분야, 한 직장에서만 일하고 대를 물리는 일이 흔했기에 승진할 때마다 다른 관청으로 옮겨 다닌 사대부들보다 전문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국문학자 허경진은 이들 중인을 ‘조선의 르네상스인’으로 일컫는다. 연세대 교수로 한시를 비롯한 고전문학에 오랫동안 천착해온 그는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에서 조수삼의 예를 들어 중인을 ‘양반에 60년 뒤진 전문지식인’으로 특징짓는다.

이들 가운데 신필(神筆)을 휘둘러 일본에서 유일하게 환영받은 화원 김명국이 있는가 하면, 왕실의 광대가 되길 거부하며 자신의 눈을 찌른 화가 최북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고집불통으로 건재했다.

8대로 이어진 역관 집안에서 개화의 선구자가 된 조선 최고의 골동 서화 수집가 오경석과 그의 아들로 역관이자 최초의 신문기자가 된 오세창, 조선 후기 최고의 출판편집인 장혼, 인왕산 호걸지사의 맹주인 가객 박효관, 신의(神醫)로 불린 백광현, 새로운 해시계를 만든 천문인 김영,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김범우도 중인으로서 세상을 가꾸고 바꾼 거인들로 등장한다.

나라의 운명을 바꿔 39가지 야담과 소설로 전해오는 홍순언, 조선 최고의 갑부 변승업 가문, 조선 통신사 최고의 무예사절 마상재들 이야기도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사실상 ‘중인실록’이라고 해도 괜찮겠다. 사실에 픽션을 가미하지 않은 채 철저한 문헌 고증과 해석에 따른 글쓰기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른바 ‘사’자 돌림의 인기 직업에다 선망의 문화예술인이 대접받는 오늘날이야말로 중인이 꿈꾸던 시대가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조선시대 중인들의 직업이 요즘 한결같이 ‘뜨는’ 의사, 외교관, 통역사, 변호사, 법관, 공인회계사, 화가, 서예가, 음악인들이어서다. 1만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