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11-28 17:32:04ㅣ수정 : 2008-11-28 17:32:07
클루지…개리 마커스 | 갤리온
살빼기 전쟁을 벌이면서도 밤참으로 라면을 먹고 있는 걸 보면 참지 못해 한 젓가락만 달라고 졸라댄다. 담배가 몸에 해로운 줄 알지만 끊지 못한다. 시간 낭비일 뿐 도움이 되지 않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소파에 누워 심심풀이로 본다. 마감시간이 며칠 남아 있으면 미루고 미루다가 임박해서야 부산을 떤다.
이런 게 사람이다. 멍청한 짓을 하면서 그것이 멍청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런 것은 또 어떤가. 봉건제도, 십자군전쟁, 노예제도, 공산주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탈레반 정권 등을 뼈저리게 겪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불완전했지만 도덕적으로 정당했고 대안체제보다 낫다고 믿는다. 한국에서 군사정권 시절이 좋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정신적 오염 상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인간이 이처럼 불합리한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일상적으로 하는 까닭은 진화과정이 빚어낸 기묘한 인간의 마음 탓이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소문난 개리 마커스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같은 인간의 마음을 ‘클루지’(kluge)라는 별난 개념으로 풀이한다. ‘클루지’란 공학자들이 완벽하지 않은, 엉성한 해결책을 가리킬 때 쓰는 특수용어다. 마커스는 인간의 마음이 세련되게 설계된 기관이 아니라 서툴게 짜맞춰진 기구 같다며 ‘클루지’라고 부른다.
인간의 마음이 이처럼 ‘클루지스러운’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진화의 관성’ 때문이라고 마커스는 분석한다. ‘생존’ 때문에 최선의 선택을 방해받는 진화의 법칙, 즉 진화의 관성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과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주먹구구식으로 진화해 와 언제나 정상 작동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나는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를 계산하지는 못한다”고 했던 아이작 뉴턴의 말에 이해가 간다.
마커스는 <클루지>라는 같은 이름의 책에서 인간의 마음은 선조들이 아주 오랫동안 동일 환경 속에서 진화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여러 ‘반사체계’와 비교적 최근에 진화해서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숙고체계’로 이뤄지게 됐다고 전제한다. 틀에 박힌 일을 처리할 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반사체계이며, 틀을 벗어나 생각할 때 유익한 게 숙고체계다. 인간의 마음이 클루지스러운 것은 두 체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마커스는 말한다.
그는 인간 진화의 장구한 세월을 꿰뚫는 역사적인 통찰을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엮어낸다. 기억, 신념, 선택, 의사결정, 언어, 행복, 쾌락, 심리적 붕괴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주요 정신영역을 구석구석 살펴 생각의 함정을 캐낸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의 심리구조도 ‘클루지’ 징후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견해에 반대되는 연구에서는 쉽게 결함을 찾아내는 반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결론을 내린 연구에서는 똑같이 심각한 결함이 있어도 잘 찾아내지 못하는 현상이 대표적인 예다. 목격자의 증언에 허점이 많아 재판과정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일이 줄어든 것도 비슷한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맥락과 단서를 중심으로 조작된 기억이 많은 탓이다. 저자는 인간의 기억이 정확성보다 속도를 중시한다는 데서 원인을 찾는다.
잘 생긴 사람이 면접에서 유리한 것처럼 심미적인 요인이 신념의 형성과정에 잡음으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클루지’의 파생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들이 그리 쓸모없을 것 같은 정책을 고집하는 이유 역시 ‘클루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이미 실행되고 있는 정책을 그렇지 않은 정책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기존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객관적 자료가 없을 때도 그렇다. 이는 현직에 있는 사람이 왜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는지를 입증해 준다고 한다.
한 기결수가 90일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뒤 89일째 되는 날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한 실화는 의지의 허약함을 보여주는 ‘클루지’ 증후군이다.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와 3년 동안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20만원짜리 수표 가운데 앞의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현상도 비슷하다.
저자는 확증 편향, 정신적 오염, 부적절한 자기통제, 초점 맞추기 착각, 애매한 언어체계, 정신장애에 대한 취약성 같은 것이 사람의 인지적 구성에 존재하는 여러 결함의 모델이라고 제시한다. 우리의 뇌가 돈보다 먹는 것에 탐닉하며, 돈을 상대적으로 계산하고, 미래를 그리 염두에 두지 않는 편이며, 가치와 가격을 혼동하거나 틀짜기(Framing)에 약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클루지’를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는 마음의 장점과 약점에 대한 섬세하고도 균형 잡힌 이해를 통해 우리 자신과 사회에 함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클루지’에 대처하는 13가지 처방을 내놓은 것도 이를 나름대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지은이가 관찰한 반사체계와 숙고체계의 갈등은 쾌락원리를 좇는 무의식적인 원초아(id)와 현실원리를 좇는 의식적 자아(ego)의 갈등으로 인간심리를 묘사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론의 현대적 해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창조론의 한 갈래인 지적설계론과 전통적인 진화론을 싸잡아 비판하는 도전적인 수작이라고 할 만하다. 최호영 옮김. 1만3800원
살빼기 전쟁을 벌이면서도 밤참으로 라면을 먹고 있는 걸 보면 참지 못해 한 젓가락만 달라고 졸라댄다. 담배가 몸에 해로운 줄 알지만 끊지 못한다. 시간 낭비일 뿐 도움이 되지 않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소파에 누워 심심풀이로 본다. 마감시간이 며칠 남아 있으면 미루고 미루다가 임박해서야 부산을 떤다.
이런 게 사람이다. 멍청한 짓을 하면서 그것이 멍청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런 것은 또 어떤가. 봉건제도, 십자군전쟁, 노예제도, 공산주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탈레반 정권 등을 뼈저리게 겪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불완전했지만 도덕적으로 정당했고 대안체제보다 낫다고 믿는다. 한국에서 군사정권 시절이 좋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정신적 오염 상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인간이 이처럼 불합리한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일상적으로 하는 까닭은 진화과정이 빚어낸 기묘한 인간의 마음 탓이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소문난 개리 마커스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같은 인간의 마음을 ‘클루지’(kluge)라는 별난 개념으로 풀이한다. ‘클루지’란 공학자들이 완벽하지 않은, 엉성한 해결책을 가리킬 때 쓰는 특수용어다. 마커스는 인간의 마음이 세련되게 설계된 기관이 아니라 서툴게 짜맞춰진 기구 같다며 ‘클루지’라고 부른다.
인간의 마음이 이처럼 ‘클루지스러운’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진화의 관성’ 때문이라고 마커스는 분석한다. ‘생존’ 때문에 최선의 선택을 방해받는 진화의 법칙, 즉 진화의 관성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과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주먹구구식으로 진화해 와 언제나 정상 작동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나는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를 계산하지는 못한다”고 했던 아이작 뉴턴의 말에 이해가 간다.
마커스는 <클루지>라는 같은 이름의 책에서 인간의 마음은 선조들이 아주 오랫동안 동일 환경 속에서 진화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여러 ‘반사체계’와 비교적 최근에 진화해서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숙고체계’로 이뤄지게 됐다고 전제한다. 틀에 박힌 일을 처리할 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반사체계이며, 틀을 벗어나 생각할 때 유익한 게 숙고체계다. 인간의 마음이 클루지스러운 것은 두 체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마커스는 말한다.
그는 인간 진화의 장구한 세월을 꿰뚫는 역사적인 통찰을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엮어낸다. 기억, 신념, 선택, 의사결정, 언어, 행복, 쾌락, 심리적 붕괴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주요 정신영역을 구석구석 살펴 생각의 함정을 캐낸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의 심리구조도 ‘클루지’ 징후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견해에 반대되는 연구에서는 쉽게 결함을 찾아내는 반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결론을 내린 연구에서는 똑같이 심각한 결함이 있어도 잘 찾아내지 못하는 현상이 대표적인 예다. 목격자의 증언에 허점이 많아 재판과정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일이 줄어든 것도 비슷한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맥락과 단서를 중심으로 조작된 기억이 많은 탓이다. 저자는 인간의 기억이 정확성보다 속도를 중시한다는 데서 원인을 찾는다.
잘 생긴 사람이 면접에서 유리한 것처럼 심미적인 요인이 신념의 형성과정에 잡음으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클루지’의 파생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들이 그리 쓸모없을 것 같은 정책을 고집하는 이유 역시 ‘클루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이미 실행되고 있는 정책을 그렇지 않은 정책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기존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객관적 자료가 없을 때도 그렇다. 이는 현직에 있는 사람이 왜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는지를 입증해 준다고 한다.
한 기결수가 90일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뒤 89일째 되는 날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한 실화는 의지의 허약함을 보여주는 ‘클루지’ 증후군이다.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와 3년 동안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20만원짜리 수표 가운데 앞의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현상도 비슷하다.
저자는 확증 편향, 정신적 오염, 부적절한 자기통제, 초점 맞추기 착각, 애매한 언어체계, 정신장애에 대한 취약성 같은 것이 사람의 인지적 구성에 존재하는 여러 결함의 모델이라고 제시한다. 우리의 뇌가 돈보다 먹는 것에 탐닉하며, 돈을 상대적으로 계산하고, 미래를 그리 염두에 두지 않는 편이며, 가치와 가격을 혼동하거나 틀짜기(Framing)에 약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클루지’를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는 마음의 장점과 약점에 대한 섬세하고도 균형 잡힌 이해를 통해 우리 자신과 사회에 함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클루지’에 대처하는 13가지 처방을 내놓은 것도 이를 나름대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지은이가 관찰한 반사체계와 숙고체계의 갈등은 쾌락원리를 좇는 무의식적인 원초아(id)와 현실원리를 좇는 의식적 자아(ego)의 갈등으로 인간심리를 묘사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론의 현대적 해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창조론의 한 갈래인 지적설계론과 전통적인 진화론을 싸잡아 비판하는 도전적인 수작이라고 할 만하다. 최호영 옮김. 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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