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간질 발작·뇌 수술·도벽 등 소설과 경계를 섞은 저자의 모호한 회고록
나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
로렌 슬레이터 | 에코의서재
특이한 책이다. 회고록이긴 한데 마치 소설 같다.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이 든다. 지은이도 소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실도 아니라고 알 듯 모를 듯한 한마디를 덧붙인다.
소설가가 인물을 창조하는 것과는 다른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은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은유는 꾸미기 전략이 아닌 전달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삶의 이야기’인 회고록에서 은유는 결국 솔직함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설명을 듣고 보면 조금 더 이해가 간다. 그래선지 지은이는 원래 <거짓말>이라는 제목에다 <은유적 회고록>이라는 부제를 굳이 붙였다. 지은이가 언뜻 속내를 비쳤지만 일종의
마케팅 전략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서사적 진실이다. 역사적 진실은 신경세포의 쇠퇴와 함께 빛을 잃지만 서사적 진실은 놀랍게 유연하고 정치적으로 강력하다. 이 책은 서사적 진실에 관한 책이다.” 저자의 후기가 한결 그럴 듯하다.
한동안 서점가를 풍미한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의 저자인 로렌 슬레이터의 최근작 <나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원제 Lying: A Metaphorical Memoir)는 이렇 듯 흥미로우면서도 신비감까지 자아낸다. 심리학자이자 작가에다 칼럼니스트로 이름 높은 슬레이터의 문학적인 글 솜씨 때문이렷다. 현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이야기체가 때로는 다큐멘터리나 미스터리 극을 보는 듯하다.
간질병을 중심 소재로 쓴 이 젊은 날의 회고록은 충격적인 고백록이라고 해야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강한 스토리텔링은 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솔직하다. 간질 발작과 뮌하우젠 증후군, 그로 인한 뇌 절제수술, 도벽과 표절, 끊임없는 거짓말 등 저자의 치부나 다름없는 과거를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심지어 10대 시절 경험한 중년 남성과의 사실적인 성애담에 이르기까지 지나친 솔직함으로 말미암아 읽어나가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할 만큼 편치 않을 때도 있다. 현재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지도 몰랐다고 고백할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슬레이터가 누군가. 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은 솜씨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 풍덩 빠졌던 독자라면 실망하지 않을 법하다. 글은 간질 발작의 4단계처럼 이어진다. 개시, 경직,
경련, 회복의 단계가 그것이다. 소설의 전개처럼 클라이맥스와 대단원의 효과도 노린다.
시작부터 파격이다. 도입부인 1장은 ‘나는 과장한다’는 제목을 겸한 한 문장으로 끝이다. 이 문장의 상징성이 크다. 간질병의 실재 여부부터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간질 이야기의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디가 상징인지,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환상인지 끝내 밝히지 않는다. 독자들이 무지의 진실, 혼란의 진실, 하이데거의 진실과 만나도록 하는 작가의 독특한 방식은 궁극적으로 직접적 제시에 비해 훨씬 더 큰 지혜를 전달한다는 동료 헤이워드 크리거 교수의 해석이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지은이는 세상에는 A와 B라는 두 가지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진실 A가 진실 B의 꼭대기에 앉든가 진실 B가 진실 A의 꼭대기에 앉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실이나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진실인지, 절대적으로 타당한 진실이 존재하는지를 되묻는다.
간질은 실제로 꾸며낼 수 있는 병이다. 간질이 일종의 꾀병인 뮌하우젠 증후군 환자들이 자주 선택하는 병이며, 이런 환자들은 병을 꾸며내는 한편으로 발각되기를 원한다.
저자의 간질 이야기는 한없이 부풀려질 때도 있었다. 간질 유전이 있는 가계 출신이고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발작 때문에 성녀로 추앙받았던 선조가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리고 손에 작은 십자가를 든 그 선조의 초상화가 가보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과장도 뒤따랐다.
저자는 어린 시절 간질이라는 낯선 병을 진단받은 후 숱한 거짓말을 꾸며댔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가 생각하는 거짓말은 터무니없는 허풍이 아니다.
악의적인 것은 더욱 아니다. 여기서 거짓말의 진의는 사물의 본질을 담은 과장과 은유다. 그래서 은유를 통해 전달되는 진실은 사실 그 자체보다 강한 힘을 지닌다고 저자는 확신한다. 표면적 진실보다는 비유적 진실이 훨씬 더 의미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어쩌다 전혀 관련이 없는 ‘알코올중독방지회’에 가입한다. 그러고 나서 알코올 중독과 간질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는 걸 직감한다. 둘 다 언제든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고,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알코올 중독자가 그저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거짓행동을 해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것도 간질과 통한다.
‘알코올중독방지회’에 가입해서도 한동안 진실을 털어놓지 않던 저자는 마침내 자신이 간질환자였지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다고 고백하지만 동료들은 결국 믿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도 지은이는 ‘사실이 모든 도덕의 바탕이라고 하지만 감정적 진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은이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정신적 고뇌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위안을 주려는 게 목적인 것 같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의지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얻을 때까지 밀고 당기고 흔들고 문지르라. 간질은 에너지다”라며. 이 책은 슬겁고 유연한 시각, 옥 생각이 아닌 열린 마음, 되알진 용기를 독자들에게 갈구한다. 이상원 옮김. 1만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