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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프랑스의 백기투항

입력 : 2009-04-03 17:53:54수정 : 2009-04-03 17:53:56

중국인이 좋아하는 색깔의 서열은 황색, 자주색, 빨간색, 녹색, 파란색, 검은색, 흰색 순이다. 수·당나라 때에는 신분에 따라 이 순서대로 옷 색깔을 달리했다. 중국인들은 검은색과 함께 흰색을 가장 기피하는 편이다. 결혼 축의금이나 촌지를 흰 봉투에 넣어주면 한 번에 모든 관계가 끝장날 정도다. 대만 국민당 정권을 ‘백색정권’이라 부르고, 사상이 나쁜 사람을 ‘백전’(白顚·이마에 흰 점이 있는 말이라는 뜻)이라고 타매한다. 흰색을 싫어하는 것은 고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고 나서 흰색을 덮는 관행에다 투항의 의미로 백기를 든 관례 때문이다. 한나라 때부터 항복의 뜻으로 백기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양에서는 중국과 비슷한 시기인 서기 100년쯤에 백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 역사가 코넬리우스 타키투스는 109년 출간된 <연대기>에서 69년에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언 황제가 벌였던 크레모나 전투까지만 해도 방패를 머리 위로 올리는 것이 항복의 표시였다고 기록했다.

현대 전쟁에서 항복의 표시인 백기가 공인된 규칙으로 정해진 것은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들끼리 항복 여부를 알 수 있는 표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백기가 쓰인 것은 염료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하얀 천을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전투 현장에 널린 형형색색의 깃발과 구분이 잘 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나온다. 부상자가 생겼을 때 하얀 붕대를 흔들어 항복의 의사를 표시한 게 계기가 됐다는 견해도 있다. 1991년 걸프전에서는 항복을 방지하기 위해 지휘관이 병사들의 흰옷과 양말은 물론 속옷까지 압수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자존심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센 프랑스가 중국의 경제압력에 또 한 번 ‘백기투항’을 선언했다. G20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것이다. 프랑스는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도 티베트 독립 시위대를 두둔하다 까르푸 불매운동에 놀라 백기를 든 적이 있다. 국제관계에서 힘의 위력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다. 금융위기로 힘이 빠진 미국을 위협하며 굴기하는 중국이 등골을 오싹하게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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