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9-04 17:49:51수정 : 2009-09-04 23:19:29

ㆍ‘고대망상광’ 한 일본인 대영박물관서 26점 골라
ㆍ13개국 여행하며 풍광·뒷얘기 유쾌하게 풀어내

▲문명의 산책자…이케자와 나쓰키 | 산책자

일본의 한 남자가 ‘세계 최고의 역사 보고’라는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찾는다. 그는 스스로 ‘고대망상광’(古代妄想狂)이라 할 만큼 고대 문명에 빠져 있다. 다이쇼 시대의 한 시인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고 고대에 탐닉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파레오 마니아’라 자칭한다. ‘파레오’는 그리스어로 ‘오래된’ ‘고대의’라는 뜻이다.

그는 대영박물관에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대 유물 26점을 고른 뒤 그 시원(始原)을 찾아 나선다. 유물은 그리스의 처녀상과 이집트의 장례식 배에서부터 신라의 황금 귀고리까지 실로 다양하다. 자연스레 고대 문명 발상지인 그리스, 이집트, 인도, 이라크를 비롯해 이란, 캄보디아, 터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한국 등 13개 나라가 목적지로 선정됐다. 그는 찬란무비한 고대 문명을 꽃피웠던 지역에서 그곳의 민초·전문가들과 유쾌하게 유물에 담긴 사연과 뒷얘기를 나누며 비망록을 채워간다.

그 기록의 산물이 <문명의 산책자>이다. 공교롭게도 산책자란 출판사가 ‘산책자’라는 책을 펴내게 된 것이다.

‘한 남자’는 60대 중반의 작가·문명비평가에다 다양한 직함이 따라다니는 이케자와 나쓰키다. ‘여러가지 문제연구소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박학다식한 지성인이다. 일본 주류사회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비판적인 시선을 지닌, 일본 내에서는 많지 않은 ‘소수자 관심작가’로 주목받는다.

책은 학자들의 그저 그런 유적답사기가 아니다. 생생한 대화, 여행길에 마주친 풍광과 그 옛날을 머릿속으로 함께 떠올리는 가운데, 해박하게 농축된 지은이의 사색이 대중성 있고 흥미롭게 우러나온다. 고대문명에 관한 한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낮추지만 실제론 전문가 못지않은 안목과 만만찮은 식견이 곧잘 드러난다.

고대 그리스 젊은이의 묘비에서 지은이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보여주지 않는 그리스인들의 우아한 전통을 색다르게 들려준다. 이집트의 상형문자 히에로글리프에서는 탁월한 디자인 정신을 발견해낸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되고 다채로운 상형문자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벽화 속의 인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분석적으로 보여준다.

인도의 불상과 아마라바티 부조에서는 추상적 사고와 더불어 구체적이고 관능적인 현세의 쾌락을 동시에 읽어낸다. 이를테면 금욕과 방탕이 공존하는 인도의 문화다. 일생 동안 나무와 관련이 있는 석가모니의 삶에서 ‘나무를 심은 곳부터 문명이 시작된다’는 혜안도 전해준다.

대제국 페르시아의 신화는 모두 모방품, 모조품, 잡다한 이야기를 긁어모은 것이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다며 못내 아쉬워한다. 대신 가십이 많고 매우 실무적이며 산문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고 평가한다. 이라크에서 수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설형문자를 보며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일상생활의 일부를 떠올린다. 이와 함께 바빌론이 퇴폐적인 성도덕 도시로 매도당하는 것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데다 ‘바빌론 유수’사건으로 인한 유대인의 편견이 작용하는 듯하다고 지은이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나무가 유적을 휘감아 인위와 자연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타프롬 사원 등 동남아시아 유적은 이집트나 이란과 달리 신선하고 아름다운 신록이 함께한다는 점이 매력임을 상기시킨다. 경주의 ‘애기불상’과 ‘황금 귀고리’에 얽힌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임진왜란의 오판과 방화로 사라진 사찰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한다.

여러 문명의 발상지가 남긴 유물들. 맨위에서부터 기원전 350년쯤 델로스섬에 세워졌던 젊은이의 묘비. 델로스섬 ‘클레오파트라의 집’에 있는 부부상.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굴된 그리폰(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몸과 다리는 사자인 상상의 동물). 아시리아 제국의 궁전이나 신전 입구에 세워졌던 목우상(牧牛像) 라마슈. 수메르 문명의 왕묘에서 발굴된 ‘덤불 속의 숫양상’. 배에 관을 싣고 가는 고대 이집트의 장례식을 표현한 목각 작품. 사진제공 | 산책자


문명은 사라지면 유적만 남을 뿐이지만 문화는 그 지역의 환경에 맞춰 부드럽게 변하고 그 땅의 사람들과 공존하는 게 다르다고 그는 평가한다. 문자 없이 살았던 켈트인들이 남긴 스톤헨지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버리진이 남긴 바위그림의 행복감에서 문명 이전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아쉬운 대목은 약탈문화재에 관한 지은이의 시선이다. 대영박물관이 제국주의의 소산인 것에 대해 정색을 하고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노재명 옮김. 2만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8-21 17:58:01수정 : 2009-08-21 17:59:02

ㆍ‘돈이란 이렇게 벌고 이렇게 쓰는 것’
ㆍ갑부지만 거액 기부하며 소박한 삶
ㆍ버핏의 실수·결혼생활까지 엿보게

▲스노볼: 워런 버핏과 인생 경영(전 2권)

앨리스 슈뢰더 | 랜덤하우스코리아

여덟살 난 소년은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시내에 있는 술집이란 술집은 죄다 돌아다니며 병뚜껑을 모았다. 그의 집 지하실에는 온갖 술병과 음료수병의 뚜껑이 쌓여갔다. 저녁에는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온종일 모은 병뚜껑을 펼쳐놓고 종류별로 나누고 숫자를 셌다. 그는 그렇게 해서 어떤 상품이 인기가 좋은지 알아내려 했다. 언제부턴가 그 대상이 돈으로 바뀌었다.

아홉살 되던 해 겨울, 눈이 내리자 소년은 누이동생과 함께 마당에서 놀며 눈을 한 움큼 뭉쳤다. 소년은 이걸 땅에 내려놓고 굴리기 시작했다. 어느 덧 큰 공 모양의 눈덩이가 됐다. 눈덩이는 점점 커지고 신이 난 소년은 이웃집 마당까지 눈덩이를 밀고 갔다.

2008년부터 2년 연속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 최고 부자 CEO 워런 버핏은 “인생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복리(複利)는 언덕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것과 같다. 작은 덩어리로 시작해서 눈덩이를 굴리다 보면 끝에 가서는 정말 큰 눈덩이가 된다. 나는 열네살 때 신문 배달을 하면서 작은 눈덩이를 처음 만들었고 그후 56년간 긴 언덕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굴려 왔을 뿐이다. 삶도 눈덩이와 같다. 중요한 것은 습기 머금은 눈과 긴 언덕을 찾아내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거부, 월스트리트의 제왕, 투자의 달인, 오마하의 현인, 가치 투자의 완성품. 온갖 수식어가 붙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그룹 회장의 전기 <스노볼>(랜덤하우스코리아)은 매우 두툼하지만 그의 비결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월가 애널리스트 앨리스 슈뢰더가 쓴 전기는 버핏이 세계 제일의 갑부이면서도 ‘현인’이란 호칭을 얻은 까닭을 여과없이 전해준다. 버핏이 오랜 세월 그토록 악착같이 거액을 모은 것은 돈이 생길 때마다 사회에 직접 주는 것보다 더 크게 불려서 나중에 되돌려 주는 게 최상이라고 여겨 왔기 때문이다.

버핏이 위대한 것은 엄청난 부에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삶과 거액의 기부금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앞에 내세우는 조건은 물론 돈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일체의 간섭을 포기해 세계 기부문화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어서다. 그는 버핏이란 이름이 들어간 재단이나 장학금, 병원, 대학 건물을 지을 마음이 추호도 없다. 2006년 보유 주식의 85%를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한 것은 이 때문이다.

버핏의 위대함은 ‘난소 로또’로 불리는 그의 철학에서도 엿볼 수 있다. 버핏은 자수성가했음에도 언제나 자기가 거둔 성공을 운으로 돌렸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1930년에 태어났으니까요. 태어난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복권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른바 ‘신발 단추 콤플렉스’(한 분야에 해박하다고 해서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것을 뜻함)도 늘 경계했다. 전 세계의 어떤 기업가보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기업가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버핏의 전기는 ‘주례사 상찬’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버핏의 구술에 따라 쓴 자서전이지만 간섭이 일절 없었음은 물론 5년여 동안 250명에 이르는 관련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최대한 객관화한 평전이나 다름없다. 버핏은 저자 슈뢰더에게 주문했다. “내가 말하는 내용과 다른 사람의 말이 다를 때는 무조건 나를 나쁘게 말하는 쪽을 선택해 주시오. 아첨이 덜한 쪽으로 말입니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공식’ 부인 수지 버핏, 워런을 떠난 수지의 부탁으로 워런을 돌봐주다 워런과 함께 살기 시작한 애스트리드 맹크스,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 85%를 기부받은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빌 게이츠 부처와 함께한 버핏의 모습. 사진제공 | 랜덤하우스코리아


그래선지 책은 버핏의 실수, 독특한 결혼생활 같은 아슬아슬한 치부까지 드러내 보인다. 그가 한때 워싱턴 포스트 회장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에게 빠져 지내는 동안 아내 수지가 집을 떠나고, 수지가 보내준 친구 애스트리드와 동거하지만, 수지와는 공식적인 아내로 지내는 특이한 생활을 영위한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지만 너무 적나라한 탓인지 지난해 책이 출판된 뒤 버핏과 저자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기사가 지구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2권을 합하면 1840쪽에 달해 웬만한 책 5~6권 분량을 읽어내려면 꽤 많은 시간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세계 최고 투자 달인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시간 투자쯤이야 아껴서 되겠는가. 이경식 옮김 1권 3만8000원 2권 3만5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8-07 17:34:47수정 : 2009-08-07 17:35:33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 동아시아

지은이들이 행여 교토의정서를 탐탁잖게 여기는 석유메이저와 자동차 회사 같은 세계적 대기업들이나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자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교토의정서에 딴죽을 거는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들은 이 책을 보며 쾌재를 부를 법하다. 지구온난화가 인류의 대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는 걱정은 지나친 호들갑이며 환경근본주의자들의 밥벌이쯤으로 여기니 말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영어권 독자들이 저자들의 궤변에 속아 뉴욕 타임스와 아마존 닷컴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려놓았단 말인가. 일단 그렇지는 않다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겠다.

기후물리학자 프레드 싱거와 환경경제학자 데니스 에이브리가 함께 쓴 <지구온난화에 속지마라>(원제 Unstoppable Global Warming)는 과학적 뒷받침이 탄탄해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이와 흡사한 주장들이 처음 나온 것은 물론 아니다. 2007년 영국 BBC 방송 다큐멘터리 <지구온난화-그 거대한 사기극>이나 코펜하겐대학 교수인 비외른 롬보르의 <쿨 잇: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지구 온난화 충격보고> 같은 책을 연상할 수 있다.

가장 눈길을 끌고 차별적인 부분은 지금의 지구온난화가 온실가스를 내뿜는 인간 때문이 아니라 100만년 전부터 약 1500년 주기로 나타나는 자연적인 기후 변동 현상에 불과하다는 견해다. 지은이들은 524명에 이르는 저명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포함해 역사적 자료와 전 지구적으로 발견되는 과학적 증거들을 동원해 기후의 역사를 재구성해 이를 증명한다. 북극의 그린란드와 남극 보스토크의 빙하 코어, 해저 침전물, 동굴 석순, 꽃가루 화석, 산호초, 나무 나이테, 수목 한계선, 미술작품, 시추공 등 온갖 자료들을 들이민다.

땅이 쩍쩍 갈라지는 대가뭄도 인위적인 온실가스 증가로 인한 지구온난화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많지만, 실제로는 태양활동 변동에 따른 이상기후현상에 불과하다고 <지구온난화에 속지마라>의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산화탄소를 대규모로 배출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태양 활동의 주기에 따라 지금보다 기온이 더 높고 낮았던 때가 있었음을 그래프를 곁들여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서도 농경이 이뤄졌고, 영국에서 포도가 재배됐으며, 이집트의 나일강에도 얼음이 언 시대가 있었다는 것들이다. 최근의 지구온난화도 1850년부터 이미 시작됐다고 한다. 그 사이 1940년부터 1978년까지 기온이 잠시 더 낮아지자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에 새로운 빙하기가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폐해로 거론되는 해수면 상승도 1세기에 15㎝씩 느리게 진행될 뿐이며 이런 현상이 500년간 지속돼도 습지대와 생물계는 천천히 높은 지대로 올라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폭우, 폭풍, 혹한 같은 이상기후·악천후 역시 역사상 자주 있었던 현상이어서 지구온난화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편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말라리아가 극성을 부린다는 설에도 반박한다. 역사상 말라리아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냈던 곳은 역설적이게도 1600만명 감염돼 60만명이 사망한 1920년대 러시아에서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기온 자료그림은 ‘로마 온난기’에 속하는 기원전 200년 전후 중국 대륙의 기온도 매우 높아 온난화가 전 지구적으로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이산화탄소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하다는 게 저자들의 지론이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0.054%에 불과하며 수증기, 메탄 등이 온실효과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양이 화산, 해양, 동물, 박테리아 등에서 배출된다.

교토의정서가 1차로 내놓은 5.2% 온실가스 감축안은 온난화 방지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당장 60~80%의 배출 감축이 있어야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어 사실상 현실성이 없는 데다 교토의정서를 이행하는 데 드는 연간 1500억달러의 절반만이라도 제3세계 국가들의 보건, 교육, 수자원, 위생시설 정비에 쓴다면 지구 환경을 보호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된다고 지은이들은 결론짓는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떻든 다른 견해를 들어보는 게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돈과 시간 투자 이상의 값어치는 충분해 보인다. 김민정 옮김 1만5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7-24 17:52:10수정 : 2009-07-24 23:11:35

중국을 낳은 뽕나무-사치와 애욕의 동아시아적 기원…강판권 | 글항아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양에서 중국을 일컫는 ‘차이나’(China)의 어원을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나라에서 찾는다. 학계에서도 그리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중국사 개설서가 한결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명말 청초 예수교 선교사가 처음 주장한 것이지만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이런 견해는 중국이 진나라 이전에 다른 지역과 교역이 없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특산물 비단을 뜻하는 ‘진’(Cin)이나 ‘지나’(Cina)에서 유래됐다고 한 전문가는 강하게 반론을 전개한다. 진나라가 등장하기 전 이미 페르시아와 인도 등지에서는 중국을 비단 생산국이라며 이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세기부터 인도나 페르시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을 비단의 나라로만 알고 있었다. 비단으로 치장하지 않은 황제와 귀족을 상상하기 어려운 고대 로마에서 중국을 ‘세레스’(Seres)나 ‘세라’(Sera)라고 부른 것도 값비싼 피륙(비단)을 의미하는 한자 ‘사’(絲)를 음역한 것이다.

비단은 ‘실크로드’가 시사하듯이 중국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차이나’가 비단에서 비롯됐고, 비단은 누에를 기르는 뽕나무에서 나왔으니 뽕나무가 중국을 낳았다면 과언일까. 중국 농업경제사 전문가인 강판권 계명대 교수는 중국을 ‘뽕나무가 만든 나라’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지론을 편다. 뽕나무를 모르는 사람이 중국사를 말한다면 시경(詩經)을 모르면서 중국 고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다고 단언한다. 그의 역작 <중국을 낳은 뽕나무>(글항아리)의 탄생 배경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경제사와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비단은 뺄 수 없는 요소다. 한때 화폐로 사용됐고 지배층에겐 사치의 대상, 피지배층에겐 생존을 위한 노동의 대상이었던 비단을 있게 한 것은 뽕나무와 누에다. 중국은 역사가 시작된 5000년 전부터 뽕나무를 재배해 왔다.


중국 문화의 묘미와 이해의 출발점은 법가와 유가의 엄격함, 도가와 불가의 소탈함, 사치와 향락의 도시문화 사이에 쳐져 있는 비단이라는 얇은 차양막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비단은 의복의 소재인 동시에 문화를 퍼뜨리는 매체이자 화폐였다. 의복 질서를 통해 나라를 다스린 중국에서 예치(禮治)의 근본은 신분과 남녀구별에 따른 옷감과 디자인의 차별화였다. 일반 백성들이 입는 값싼 비단과 다섯 겹을 껴입어도 젖꼭지가 두드러졌다는 고급 비단의 존재는 통치이념의 제도화와 국가 이데올로기의 주춧돌이 됐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당나라 시절 이래 사치와 애욕의 극치를 낳은 중국 문화사도 수려한 장식품으로서의 비단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남녀간의 사랑, 목욕이나 내밀한 유희문화의 정점에 선 것이 비단의 에로틱함이다. 비단은 배의 돛폭에서부터 술집 난간을 휘감아 꾸미는 데까지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을 정도다. 고대에는 뽕나무 밭이 남녀간의 야합이 허용되는 신성한 장소였다는 점을 신화와 사료를 곁들여 흥미롭게 풀어낸다.

뽕과 누에가 만든 비단으로 세계 최고의 문명국으로 도약하고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중국이다. 그런 중국이 골치 아픈 ‘오랑캐들’을 평화롭고 효율적으로 다스려 나갈 비폭력적 방법으로 중화질서의 조공무역과 책봉체제를 고안할 수 있었던 바탕도 비단이 없었으면 힘들었으리라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중국 경제의 중심을 강북에서 강남으로 바꾼 결정적 요인도 뽕나무와 비단이라는 점을 추적한다. 중국 비단시장의 전문화, 상업화는 여성의 지위하락 과정이기도 하다. 남자는 농사짓고 여자는 비단을 짜는 ‘남경여직’(男耕女織)의 분업사회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중국 청나라 시대에 강희제의 명을 받아 초병정이 만든 <어제경직도>에 나오는 것으로, 농가에서 여인들이 비단을 만드는 장면이다.


지은이는 서구 물결의 범람 이후 비단의 퇴조와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걸었던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뽕나무가 최근 의약 원료와 생태농업으로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 점에 주목한다. <나무열전> <공자가 사랑한 나무, 장자가 사랑한 나무>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 등의 저작에서 보이듯 나무로 역사를 해석하는, 독특한 경지를 구축한 저자의 내공이 이 책에서도 만만찮게 드러난다. 1만98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7-10 17:46:02수정 : 2009-07-10 22:59:28

ㆍ국가가 개입…진정한 경제는 인간의 ‘자유’에 토대 둬야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 길

진정으로 바른 생각은 위기를 맞아서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요즘 들어 새삼 주목받는 비주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그렇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기존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가 피어오르자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서가에서 먼지만 잔뜩 머금고 있던 폴라니의 노작을 다시 꺼내들기 시작했다.

폴라니의 대표작이 1991년 <거대한 변환>(원제 The Great Transformation)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뒤 곧 절판됐으나 개정판이나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던 것도 수요가 많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영문판 해제를 쓴 프레드 블록의 말대로 냉전기간 자본주의 옹호자와 소련식 사회주의 옹호자들 사이에 지극히 양극화된 논쟁에서 폴라니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논리가 설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거대한 전환>은 어느덧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법·입법·자유>와 <노예의 길>에 버금가는 역작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칼 폴라니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묘사하기 위해 차용한 '사탄의 맷돌(satanic mill)'이란 용어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시 '저 옛날 그분들의 발자취가'에서 쓴 표현이다. 사탄의 맷돌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장착해 1769년에 세운 '알비온 밀가루 공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공장은 블레이크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이 공장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제분업자들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1791년 전소됐다. 당시 화재를 묘사한 그림 중에는 불길을 공장 위에 올라앉은 악마로 그린 것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돈과 기계에 얽매인 현대사회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 감독·주연의 1936년 영화 <모던 타임스>의 장면들.


폴라니는 이 책에서 ‘자기조정 시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유토피아’라고 일축한다. 그런 제도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라도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돼 있다는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은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다. 그는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가설에도 반기를 든다. 폴라니는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1776년을 자본주의의 원년으로 보지 않는다. 1834년의 스피넘랜드법(빈민구제법)의 폐지에 따라 인민들이 먹고 살 길은 임금노동으로만 가능하게 되고 노동시장의 형성과 함께 ‘자기조정 시장’이 완성돼 현재의 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여긴다.

그는 목가적인 공동체를 해체하고 만 시장경제를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빌려 ‘사탄의 맷돌’이라고 흥미롭게 표현한다. ‘사탄의 맷돌’은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서 바닥 모를 퇴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공포의 상징이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시장 스스로 자유시장 영역을 만들지 않았으며 국가가 시장을 구축해왔다고 주장한다. 물론 국가의 개입이 해결책은 아니다. 국가, 정부, 시장이 아닌 ‘사회’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게 폴라니의 핵심사상 가운데 하나다. ‘사회’에는 생활협동조합, 노동조합,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집단이 포함된다.

그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은 노동·토지·화폐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 토지, 화폐는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 재화뿐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도 교환하는 시장이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이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된다는 게 폴라니의 견해다.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임에도 현실에서 이들이 거래되는 시장은 허구의 도움을 얻어 조직된다. 그는 진정한 경제가 인간의 ‘자유’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65년 전인 1944년 초판이 나온 <거대한 전환>이 지금 조명을 받는 이유는 좌우의 이념에서 벗어나 치밀한 비판적 접근을 거쳐 독특한 해법을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하이에크나 마르크스를 모두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경제 현상분석을 통해 세기가 바뀐 오늘날에도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위력을 발휘한다. 케인스주의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들리는 가운데서 폴라니가 시장경제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완벽한 대안을 제시했다기보다 새로운 길을 찾는 논의의 실마리를 던진 것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하다.

옮긴이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꼼꼼한 번역과 세밀한 주석, 친절한 해제가 책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추가된 해설만 100쪽이 넘는다. 홍 위원은 국내 최고의 폴라니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3만8000원


▲ 칼 폴라니는 누군가

평생을 인간의 고통 근원에 대해 고민
시장 만능주의에 맞선 비주류 경제학자


헝가리 출신 유대계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1886~1964)는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그리 널리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경제이론은 애덤 스미스에서 출발해 알프레드 마셜에 이르러 체계적인 틀을 갖춘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체계화된 사회주의 경제학과도 차별성을 지니고 있어서다. 그렇지만 경제 자체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간과하기 힘들다. 시장, 상품을 비롯해 경제학적 개념의 기원과 인간의 ‘살림살이’로서 경제활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타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선택을 중시했다. 그가 평생 고민했던 것은 인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였다. 그 고통은 경제적 궁핍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론은 경제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이 됐다.

빈의 저명한 경제주간지 <오스트리아 대중경제>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부터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의 수제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도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시장 만능주의에 맞섰다. 그후 나치의 위험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와 런던대에서 강의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교수 자리를 얻었으나 아내 일로나 두크즈네카의 공산주의 전력 때문에 입국 비자를 얻지 못해 캐나다에 살면서 ‘방문교수’로 활동했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그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공정, 호혜에 대한 폴라니의 생각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이론’과 스티글리츠의 ‘공정무역’ 개념에 접목됐다. 국내에 번역된 주요 저작으로는 <거대한 전환> 외에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민음사), <사람의 살림살이>(풀빛) 등이 있다.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6-26 17:43:38수정 : 2009-06-26 17:43:38

ㆍ조선후기 차와 더불어 삶을 음미하던 선비들의 향기

한국의 차 문화 천년 1, 2…정약용·김정희·초의선사 외 | 돌베개

제주도에 있는 도순다원 전경. 야트막하게 줄지어 앉아있는 차나무들 너머로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사진 위)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다조(차부뚜막·아래). 정약용은 다산초당 뒤꼍에 흐르는 약천에서 맑은 물을 떠다가 앞마당에 있는 이 널찍한 바위 위에서 지펴 끓인 물로 차를 마셨다. 사진제공 돌베개


차향(茶香)이 물씬 풍겨나는 사람이라면 필시 멋과 여유가 배어있으리라. 그윽하고 청아한 격조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유유자적 차중선(茶中仙)의 경지는 우리네 옛 선비 문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길이다. 낙락장송의 그림자가 드리운 초암(草庵)이나 선비의 문방에서 차를 달이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이야말로 지고의 경지다. 차는 넓은 것에는 마땅치 않아 혼자 마시면 탈속하고, 두 사람이면 한적하여 좋으며, 서너 명이면 즐기고, 대여섯 명이면 들뜨며, 일고여덟 명이면 베풀고, 그것을 넘으면 또한 잡스럽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시와 차가 어우러진 풍광, 시와 더불어 나누는 청징한 차 한 잔의 참맛이 담긴 <한국의 차 문화 천년>(돌베개)에는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에다 차향까지 서려 있으니 금상첨화다. 여섯 권짜리로 기획된 연작 가운데 이번에 먼저 나온 두 권은 조선 후기의 차 문화에 관한 시와 산문을 번역해 엮어 때로는 삽상하고, 때론 선미(禪味)와 현기(玄機)가 느껴진다. 차는 특히 술, 시와 더불어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문화 코드나 다름없다. 차에 관한 시를 읽는 맛은 마치 좋은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에 버금간다. “깊은 샘에서 진리를 긷노라니 글맛(書味)이 통하여/ 정수리에 제호를 부은 듯 불심을 깨닫네/ (중략) 천하의 차 끓이는 물을 논해보건대/ 강왕곡(康王谷) 물이 제일이라면 이 샘은 두세 번째는 되리.” 시·서·화 삼절로 이름 높은 신위의 ‘귀양살이의 한 기쁨’이라는 시다. 벼슬자리에서 쫓겨나 자연에 묻혀 사는 호해지사(湖海之士)의 심심파적이 가득하다.

조선 후기 서화가 이광사의 ‘내도재기(內道齋記)’에는 단아한 서재에 귀한 고서 서화, 문방구, 차를 옆에 두고 이따금 금석 자료나 희귀한 비탑을 품평하며 시간을 보내는 독서군자의 풍류가 고스란히 읽힌다. “졸렬한 시도 장기 두는 것보단 낫고 옅은 술은 차만 못하네”라고 읊조린 홍현주의 차시들도 각별한 운치를 더해준다. 마음에 맞는 벗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속세의 물욕과 세속의 번뇌를 씻으며 안빈낙도의 일상을 즐기는 시도 적지 않다.

스님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고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차의 인연만은 끊어버릴 수 없으니 어서 빨리 차를 보내 달라고 초의 선사에게 조르는 추사 김정희의 편지글에서는 돈독하고 특별한 교유의 멋과 함께 미소가 번진다.

이덕리의 산문 ‘기다(記茶)’의 한 구절은 무척이나 실용적인 모습을 띤다. “차는 사람의 잠을 적게 만든다. 혹 밤새 눈을 붙이지 못하고 밤낮으로 관아에 있거나 아침저녁으로 심부름을 다니는 자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새벽닭이 울 무렵 베틀에 올라가는 여인이나 서재에서 학업에 열심인 선비에게 모두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다.”

초의 선사가 중국차의 아류로 여기던 한국 차의 우수성을 설파하고 추사 김정희가 지리산 차의 탁월함을 역설하는 대목도 눈길을 잡는다. 예조판서를 지낸 신헌구는 ‘해다설(海茶說)’에서 초의 선사가 제조한 차가 스님들 사이에서만 이름이 났을 뿐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에 대해 못내 안타까워한다.

다산 정약용과 아들 학연, 초의 선사, 김정희와 아우 명희, 낙하생 이학규처럼 시와 산문이 모두 실린 이가 있는가 하면 차인(茶人)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도 많다. 앞으로 나올 나머지 네 권에는 삼국·고려 시대, 조선 전기와 중기, 조선 후기와 근대, 승려의 차 문화를 집대성해 소중한 자료가 될 게 틀림없다. 번역에는 한문 고전에 통달한 성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명망있는 인사 6명이 참여했다. 차를 얘기하려면 육우의 <다경>(茶經) 정도는 완독해야 마땅하나 이제 이 책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1권 2만원, 2권 2만2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6-12 17:32:00수정 : 2009-06-12 17:32:01

ㆍ“세상은 자본주의를 미워해도 똑 떨어지는 대안은 없다, 머리를 맞대라”


■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조지프 히스 | 마티

‘서기 2081년, 만인은 마침내 평등해졌다. 하나님이나 법 앞에서만 평등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벽한 평등을 누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도 없어졌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생긴 사람도 물론 없었다. 아무도 다른 이들보다 더 힘이 세거나 더 민첩하지 않았다. 이처럼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평등 세상은 오로지 미합중국 평등유지 관리국 요원들의 끊임없는 감시 활동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특수 수신기를 끼워 정교하고 복잡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그들을 방해한다. 미남미녀들은 가면을 써야 한다. 튼튼하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추를 달아 행동을 굼뜨게 만든다.’

평등의 이상이 완벽하게 실현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커트 보네거트의 단편소설 <해리슨 버저론>의 한 장면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소설은 하향평준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진하게 담겨 좌파 공격 소재로 곧잘 등장한다.

<혁명을 팝니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조지프 히스 토론토대 철학과 교수(사진)는 최신작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원제 Filthy Lucre: Economics for People Who Hate Capitalism)에서 <해리슨 버저론>을 흥미롭게 예로 들며 좌파 진영의 아킬레스건을 파고든다. 제목만으로도 좌파 비평서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여름휴가 목적지인 하와이까지 가지 않고 하와이 근처까지만 데려다주는 항공권이 있다면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질 게 뻔한 이 항공권을 아무리 헐값이라도 누가 사겠는가. 이런 재미있는 비유로 경쟁만이 만병통치약이며 시장만이 해법이라는 우파의 단견들도 헤집는다. 시장을 가능한 한 경쟁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이상에 근접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자본주의 옹호자들의 논리는 하와이가 아니라 하와이 근처까지 가는 황당한 항공권과 같다는 설명이다.

지은이는 먼저 우파들이 흔히 저지르는 경제적 오류들을 도마에 올려 칼질한다. 개인의 게으르고 무지한 결과인 가난을 정부와 사회가 책임질 이유가 없다며 복지혜택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우파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파가 도덕적 해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도덕적 해이가 하나의 변수인 것은 분명하나 공공부조 제도를 통째로 포기할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감세는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견해도 정부가 소비자라는 그릇된 신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오류라고 저자는 통박한다. 이는 우파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내세우는 근거로 편리하게 이용하는 마술모자 역할을 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시장만 있으면 모든 게 잘 돌아가니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는 논리는 ‘부유층에게 득이 되는 정부프로그램은 놔두고 다른 것은 모두 없애라’는 요구나 다름없다고 지은이는 반박한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자본주의는 소비에트 공산주의보다 더 높은 수준의 소득평등을 이루었다는 점을 역설하며.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의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나치게 앞세우는 국가경쟁력은 정부와 기업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논박한다. 무역은 기본적으로 경쟁우위가 아니라 비교우위라는 점을 우파가 잊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좌파가 흔히 빠지는 함정 가운데 첫 번째로 공정가격과 공정무역을 든다. ‘노동에 대한 적절한 가치를 지급하는 무역의 도덕성’이라는 모토가 유행처럼 호응을 얻고 있으나 여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근본 치료는 젖혀 두고 증상만 슬쩍 완화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빈곤은 가격조정이 아니라 소득분배로 해결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기업의 이윤추구에 알레르기 반응이나 반기업정서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눈을 흘긴다. 좌파가 주식회사 기업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여기는 협동조합도 소유자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상기시킨다.

저자는 우파가 자기들 견해의 근거로 내세우는 쓰레기 같은 논거를 대부분의 좌파들이 제대로 지적해내지 못한다는 점을 좌파의 경제학적 무지가 부르는 첫 번째 문제로 꼽는다. 의도는 좋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없거나 돕고자 하는 수혜자에게 막상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을 만들고 선전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사실이 또 다른 문제점이다.

그러고 보면 우파와 좌파가 저지른 경제 오류를 싸잡아 비판하고 있어 양비론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수 있겠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이에 대한 대답도 준비하고 있다. 경제학이 빈곤, 불평등, 사회적 배제 등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해결책으로 풀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리려 한다. 지은이는 특히 비용편익분석을 하면서 좌·우파 공히 십중팔구 저지르는 오류를 족집게처럼 집어낸다. 자신이 싫어하는 정책의 온갖 비용은 모두 합치고 편익은 싹 무시해버린 다음 ‘사회악’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두고 저자는 ‘비용은 넣고 편익은 빼자 오류’라고 부른다.

세상은 자본주의를 그렇게도 미워하고 의심하지만 이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란 지독히도 어려우니 이를 개선하는 궁리에 머리를 맞대보자는 게 결론이다.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닌 철학자인 점에 신뢰를 삭감할지도 모르겠으나 매우 기본적이고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있는 오류들을 실례로 들어 설명하는 미덕이 돋보인다. 문체도 때로는 가시가 돋았고 때로는 넘치는 재기로 번뜩인다.

저자는 좌파에게 정신이 번쩍 드는 똥침을 놓지만 겨냥하는 주독자층은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 매에 애정을 담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을 전공한 좌파이자 환경론자이기도 하다. 상업주의가 돼버린 반문화를 비판한 히스의 전작 <혁명을 팝니다>를 감흥 깊게 읽은 독자라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노시내 옮김. 1만6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5-31 17:24:28수정 : 2009-05-31 17:24:28

ㆍ예술속에서 몸이 어떻게 표현돼 왔나…작품 실례들며 다양한 문화 담론 제시

몸과 문화

홍덕선·박규현 | 성균관대 출판부

지난해 5월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생존 작가 가운데 최고 낙찰가 신기록이 나와 세계 미술계가 잠시 술렁거렸다.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사실주의 화가’로 불리는 루치안 프로이트(87)의 누드화 <잠이 든 사회복지 감독관>이 무려 3364만1000달러(약 352억원)에 팔렸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친손자여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화가다.

이 누드화의 인물은 아름다운 몸매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여성 누드화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에 가까운 모습으로 늘어져 태평스럽게 소파에서 낮잠을 즐기는 여인의 찌들고 왜곡된 육체에서는 기괴한 공격성마저 느껴진다. 몸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요즘 세태를 마치 비웃는 듯한 모습이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시대의 몸에 대한 인식은 신비감을 거침없이 해체한다.

공교롭게도 꼭 1년 만인 지난 13일 발굴 사실이 발표된 세계 최고(最古)의 여성 조각상은 프로이트의 작품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예술로 승화되는 ‘몸’이 수만년 후 다시 원시적 모습과 닮아가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독일 남부 슈바벤 지방 펠스 동굴에서 지난해 9월 발굴된 이 조각상은 두툼한 허리, 넓적한 허벅지, 크고 튀어나온 가슴 등으로 미뤄보아 다산과 풍년을 기원하는 원시인들의 상징물로 추정되고 있다. 3만50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조각상은 2만4000년 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사람 조형물로 여겨온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상보다 1만년이나 앞선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몸에 대한 인식은 시대와 지역마다 편차가 컸다. 문화가 몸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바꿔왔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나 몸에 대한 지배적 이미지는 지배 집단이 정한 가치나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성균관대의 홍덕선 영문과 교수와 박규현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이 함께 쓴 <몸과 문화>는 문화현상으로서의 몸을 인식하는 방식이 특정 문화의 사고체계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집중 궁구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줄기차게 연구되고 있는 인간의 몸을 조망하는 연구서이자 개설서이지만 예술 속에서 어떻게 표현돼 왔는지를 주로 탐사한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관습적인 허용의 한계를 넘어 몸에 대한 금기에 과감히 도전하고 일탈하는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지은이들은 보여준다. 몸을 묘사하던 방식은 오랫동안 이상적인 신체의 아름다움을 영원불멸의 육체, 현실을 떠난 고정된 미의 규칙을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저자들은 몸의 역사가 바로 인간의 역사이며 몸의 연구가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구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몸은 인간 경험의 거대한 영역이다. 때로는 신비의 대상이며,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고, 때로는 개인의 심리적 분석과 내향적 관찰의 터전이 되며 때로는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문제들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이데올로기와 미학의 경기장이 된다.”

크게 2부로 나뉘는 이 책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몸에 접근한다. 전반부에서는 생물학,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역사학적 물음들을 때로는 교차적으로, 때론 통합적으로 살핀다. 후반부에서는 인간의 몸이 문화 속에서 구현되는 다양한 양상을 분석한다.

저자들이 ‘몸’에 제 기능을 부여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꼽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화가 폴 고갱,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이들의 탐험은 한결 생생하게 그려진다. 고갱은 피카소가 아프리카 예술 여행을 떠났듯이 온전하고 순수한 원시상태의 감성과 감각을 오롯이 지닌 몸을 찾아 타히티로 떠난다.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한 신고전주의 그림 가운데 터키의 한 후궁을 그린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를 서구인의 대표적 오리엔탈리즘으로 선정하고 표지 모델로도 썼다.

‘제왕은 두 개의 몸을 지닌다’는 개념을 찾아낸 절대왕정 시대의 ‘몸의 미학’도 도마에 오른다. 군주 개인의 인간적인 육체와 불멸의 존재로서의 신화적 육체는 히야신스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를 통해 보여준다.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몸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모습을 그린 피에르 드 쉐르의 ‘폭군의 처형, 1793년 1월21일’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몸에 대한 낭만적 시선을 철저하게 거부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해체되는 몸’도 인상적이다.

저자들이 ‘몸의 사라짐’으로 표현한 죽음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집단의 죽음에 관한 예술로 천착한다. 특히 전쟁을 그린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세계를 통해 인간에 내재된 폭력성과 잔인성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반복가능한가를 확인해 준다. 의학과 예술이 결합한 ‘해부된 몸’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궁 속’ 등을 대표 사례로 들어 풀어낸다.

‘몸의 문화적 표상’은 얼마 전까지 최초의 인간조각상으로 꼽혀온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시작해 루치안 프로이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가 프랜시스 베이컨(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먼 후손)의 포스트모던 작품 ‘헨리에테 모라에스의 초상을 위한 습작’으로 마무리된다.

작가와 작품을 실례로 들어 인간의 몸을 해석하는 다양한 문화 담론을 깔끔하게 정리한 노력이 돋보인다. 다만 한국이나 동양의 사례는 한 차례 스쳐지나간 반면 대부분 서양에 치중된 게 아쉬움을 남긴다.(2만3000원)

<몸과 문화>와 함께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김연순 연구원의 <기계에서 사이버휴먼으로>(1만8000원)는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무늬’ 시리즈의 하나다. 인간의 진화와 변화과정을 통시적으로 재구성한 수작이다.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5-15 17:45:20수정 : 2009-05-15 17:45:21

ㆍ불황전도사 폴 크루그먼 따끔한 처방

▲불황의 경제학…폴 크루그먼 | 세종서적

걱정은 태산처럼 높지만 신통방통한 묘책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신종인플루엔자 A가 그렇듯이 북미 대륙에서 발생한 경제독감이 지구촌을 뒤덮고 끝을 알 수 없어 그저 답답할 뿐이다. 너도나도 명의라고 나서고는 있지만 들리느니 그 소리가 그 소리다.

한 독특한 경제의사는 다른 의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단과 처방을 내놓는다. “이 질병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오! 익히 보아 오던 고질일 뿐이오”라며. 세계경제는 결코 공황에 빠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불황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의사의 극언을 들으면 끔찍하다. 이제 불황은 우리 곁에서 더불어 살려나보다.

이 의사는 1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예의 쓴소리를 했다. “현대 의학에 의해 박멸된 줄 알았던 치명적인 병원균이 기존의 모든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형태로 재출현한 것과 같다.” 그때 그는 이런 경고를 곁들였다. “지금까지는 제한된 수의 사람만이 이 새로운 불치병의 희생자가 되었다. 만약 운이 좋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새로운 치료법과 예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음번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이 의사는 1990년대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현재진행형인 글로벌 금융위기의 리허설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제의사는 미국의 유수 언론이 ‘경제학의 신’ ‘우리 세대 최고의 외환전문가’라 일컫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다. ‘불황전도사’ ‘노벨상급 두통거리’라는 애칭까지 따라 붙는다. 이쯤하면 웬만큼 눈치가 빠르지 않은 사람이라도 요즘 상종가를 누리는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을 떠올릴 게다.

크루그먼은 <불황의 경제학>(원제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에서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공급중시 경제학’에 치명타를 가한다. 세계경제를 이 꼴로 망쳐놓은 것이 공급중시 경제학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급중시 경제학이 어리석은 아이디어들을 조합해놓은 것일 뿐 확고하거나 온전한 학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매도한다. 재화의 공급만 충분하면 수요는 자연히 뒤따라온다는 게 공급중시경제학의 핵심이다.

반대로 불황의 경제학이라는 크루그먼의 경제 패러다임은 수요중심이다. 수요 측면의 실패가 세계경제의 환부라고 그는 진단한다. 위기의 핵심에는 모두 불충분한 수요창출의 문제가 놓여 있다는 얘기다.

그는 지금 당장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발등의 불을 끄는 구조작전이라고 다급한 목소리를 낸다. 그가 제시하는 구조작전은 신용경색 완화와 소비지원, 두 가지다. 전 세계 정책입안자들이 모두 나서야 할 지난한 과제이지만 반드시, 그것도 조만간 해야 할 일이다. 그가 내놓은 명확한 해결책은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하는 일이다. 경기부양을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며 일시적으로는 사실상 금융시스템의 상당 부분이 완전한 국유화에 가까운 상태가 될 정도로 정부의 입김도 더 세져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사회주의 냄새가 짙다는 비판에 날카로운 반격으로 맞선다. “금융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 다소 ‘사회주의적’이라는 우려 때문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한동안 우호적인 눈으로 응원하던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연일 쓴소리를 해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장 우려하는 점은 근본적인 금융 개혁 퇴색이다.

그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학의 신화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달려든다. 이 신화는 신자유주의의 기수인 시카고학파의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한 이래 지금까지 경제학에서 핵심적 진리로 통했다. 자원은 한정돼 있으므로 한 가지를 많이 가지려면 다른 한 가지를 적게 가져야 하며, 노력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찾아보면 있다는 게 크루그먼의 자신감이다. 이 세상에는 사용할 수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자원이 있기 때문에 공짜 점심이 가능하다고 한다. 어떻게 가져오는지만 알면 된다. 그의 해답은 역시 ‘수요’에 있다.

그는 튼튼한 경제에도 경기후퇴가 올 수 있다는 이론도 편다. 많은 서구인들은 아시아의 위기를 정실자본주의에 대한 필연적 죗값으로 여겼다. 하지만 크루그먼이 보기엔 적어도 죄에 대한 벌은 아니었고, 엉터리 정부정책 때문도 아니었다. 주된 원인은 자기입증형 패닉(공황상태)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패닉에 취약해진 부분적인 이유는 금융시장을 개방해서다.

세계 경제가 여전히 중병 상태라고 그가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병마의 가장 큰 원인인 ‘그림자 금융’에 대한 칼질을 아직 시작도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크루그먼이 이름 지은 ‘그림자 금융’이란 투자은행이나 신탁회사처럼 ‘은행인 체하는’ 기업들을 말한다. 이들은 투자에 따른 이득은 챙기면서 리스크에 대한 최종 책임은 사회에 떠넘기려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지녀왔다.

이 책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써 따분하지 않다. 지은이 스스로도 자신 있게 말한다. 경제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유혹 가운데 하나가 지나치게 위엄을 부리고자 하는 경향이라고. 문장력 또한 이름값을 하고도 남는다. 영국의 권위지 인디펜던트가 ‘케인스처럼 고민하고 갤브레이스처럼 유려하다’는 표현을 쓴 게 과찬이 아닌 것 같다. 1999년 출간된 ‘불황경제학’의 수정증보판이지만 최근 세계 경제 상황을 반영한 신작이나 다름없다. 안진환 옮김. 1만4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5-01 17:40:10수정 : 2009-05-01 17:40:11

ㆍ日 사회운동가가 목격한 ‘불안정계층의 실상과 절규’ 생생히 담아

성난 서울-미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스무 살의 사회학

아마미야 카린, 우석훈 | 꾸리에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 이 구호를 들으면 누구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먼저 연상할 것이다.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을 도발적인 선언의 ‘사촌’을 떠올리면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매도하기 십상일지도 모른다.

이 구호에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이는 30대 중반의 일본 여성 아마미야 카린은 여간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스무살 때 펑크록 밴드를 결성해 보컬로 활동한 극우파 가수였다. 거리에서는 총을 겨눠들고 ‘천황폐하’를 위해 충성을 바치자고 외쳐댔다. “평화는 웃기는 것이고 일본인들은 다시 유신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절규하곤 했다. 극우단체의 지원으로 평양에 가서는 “나도 북한에서 태어나 지도자 동지를 위해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라고 셀프카메라 앞에서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는, 모순된 일면을 보일 때도 있었다.

아마미야 카린은 “한국의 20~30대는 정규직으로 일하며 사는 것, 결혼해 아이를 키우는 것, 살아가는 것의 가능성과 의미를 잃어버린 상황”이라며 “한국과 일본의 프레카리아트여 연대하라”고 외친다.(확성기를 든 여성)

그런데 그의 삶은 어느날 한 좌파 감독의 영화 <새로운 신>을 만나면서 180도 바뀐다. 사회의 허상을 꿰뚫고 난 뒤부터 그는 절망적인 수렁으로 내몰린 동병상련의 젊은 비정규직 세대와 연대 운동에 뛰어들었다. 집단따돌림을 경험하고 자살까지 기도하는 불우한 시절을 보낸 뒤에도 속칭 ‘프리터’로 일했던 그가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현실세계에선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하는 경우는 흔해도 우파에서 좌파로 생각을 바꾸는 사례는 드물다. 극단을 오가는 삶을 사는 그는 요즘 “빈곤 타파와 생존을 요구하는 운동에는 좌우가 없다”며 일본의 ‘프레카리아트’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어느덧 이 운동의 상징 인물로 자리잡은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불확실한’이란 뜻을 지닌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 조어다.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의미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해 유럽의 신좌파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 새로이 부상 중인 개념이다. 편의점이나 레스토랑의 시간제 노동자나 고등교육을 받았으면서도 변변한 직업을 찾지 못한 채 비정규 지식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인 예다. 2001년 5월1일 노동절을 맞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카탈루냐 등지에서 모인 5000여명의 노동자, 환경운동가, 빈집점거 운동가, 미디어 운동가, 이민자가 밀라노 시내를 행진했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불안정 계층’의 연대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들의 행진은 연례행사가 됐고, 2003년 마침내 스스로를 ‘프레카리아트’로 규정했다. 지난날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정규직 노동자가 대다수여서 임금은 적었지만 생활의 안정성 자체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인 ‘프레카리아트’는 임금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미야가 극우파 펑크록 밴드 ‘유신적성숙’의 보컬로서 노래를 부르던 시절의 모습.

아마미야가 꿈꾸는 최소한의 공동체는 ‘위협받지 않고 일하며 살 수 있는 사회’이다. 그래서 그는 빈곤과 차별이 있는 사회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성난 서울>은 그가 2008년 여름에 체험하고 목격한 서울의 ‘프레카리아트’와 신사회운동 현장의 기록이다. 일종의 비교사회학적 르포다. <88만원 세대>의 저자이자 인문주의 경제학자 우석훈의 표현대로 ‘밥은 먹고 다니냐?’란 말이 인사가 돼버린 1회용 건전지들의 사회. 아마미야는 일본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 놀랄 만큼 양극화한 한국 사회의 노동 현장과 부당한 현실을 뜯어고치기 위해 싸우거나 남다른 미래를 모색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비정규직 비율 단연 1위인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종로의 시위 현장, 단식 투쟁을 벌이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천막 숙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작업장, 전국백수연대 회원들의 터전, 버거운 현실 속에서도 청년실업, 비정규직, 워킹 푸어 등 20대들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하는 희망청이 그곳이다.

일본에서는 워킹 푸어나 프리터 등에 대해 한결같이 ‘자기책임’이라는 말을 쓴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가난은 국가나 사회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탓이라는 의미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한 우리네 속담과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과거엔 이 같은 생각이 어느 정도 옳았을지 모르나 구조적인 빈곤의 굴레 속에 허덕이는 오늘날에는 반드시 맞는 말은 아니다. 아마미야는 무직과 가난을 오롯이 ‘자기책임’으로 방치하려는 우익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다닌다.

지은이는 지난 여름 서울 방문에서 ‘한·일 프레카리아트 연대’의 희망을 발견했다고 자신 있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한국의 프레카리아트’에 호소한다. 함께 ‘생존’ 운동을 펼쳐나가자고. 그는 올해 노동절을 전후해서도 서울에 와 연대를 실천하고 있다.

이 책은 우석훈과의 ‘연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연대와 우정을 다져온 아마미야와 우석훈이 ‘특별한 동지’로서 희망과 연대의 사회학을 모색하는 과정은 대담과 별도의 항목으로 담았다.

서울에서 만난 두 개의 실험적인 공동체 이야기는 일본 운동가의 시각으로 한층 생생하게 소묘했다. 문래동에서 철공소를 근거 삼아 빈집 점거 예술운동을 벌이는 ‘스쾃’ 단체 <예술과 도시 사회연구소>, 연구자들의 코뮌인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이방인의 눈에 희망의 씨앗으로 성큼 다가왔다. 일본 헌법 9조의 그림자와 연결짓는 병역거부자들의 얘기도 색다르고 뜻 깊게 조명된다. 진중한 문장은 아니지만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유쾌한 필치의 조미료로 버무린 맛이 독특하다. 송태욱 옮김. 1만3000원


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