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9-04 17:49:51수정 : 2009-09-04 23:19:29

ㆍ‘고대망상광’ 한 일본인 대영박물관서 26점 골라
ㆍ13개국 여행하며 풍광·뒷얘기 유쾌하게 풀어내

▲문명의 산책자…이케자와 나쓰키 | 산책자

일본의 한 남자가 ‘세계 최고의 역사 보고’라는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찾는다. 그는 스스로 ‘고대망상광’(古代妄想狂)이라 할 만큼 고대 문명에 빠져 있다. 다이쇼 시대의 한 시인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고 고대에 탐닉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파레오 마니아’라 자칭한다. ‘파레오’는 그리스어로 ‘오래된’ ‘고대의’라는 뜻이다.

그는 대영박물관에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대 유물 26점을 고른 뒤 그 시원(始原)을 찾아 나선다. 유물은 그리스의 처녀상과 이집트의 장례식 배에서부터 신라의 황금 귀고리까지 실로 다양하다. 자연스레 고대 문명 발상지인 그리스, 이집트, 인도, 이라크를 비롯해 이란, 캄보디아, 터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한국 등 13개 나라가 목적지로 선정됐다. 그는 찬란무비한 고대 문명을 꽃피웠던 지역에서 그곳의 민초·전문가들과 유쾌하게 유물에 담긴 사연과 뒷얘기를 나누며 비망록을 채워간다.

그 기록의 산물이 <문명의 산책자>이다. 공교롭게도 산책자란 출판사가 ‘산책자’라는 책을 펴내게 된 것이다.

‘한 남자’는 60대 중반의 작가·문명비평가에다 다양한 직함이 따라다니는 이케자와 나쓰키다. ‘여러가지 문제연구소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박학다식한 지성인이다. 일본 주류사회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비판적인 시선을 지닌, 일본 내에서는 많지 않은 ‘소수자 관심작가’로 주목받는다.

책은 학자들의 그저 그런 유적답사기가 아니다. 생생한 대화, 여행길에 마주친 풍광과 그 옛날을 머릿속으로 함께 떠올리는 가운데, 해박하게 농축된 지은이의 사색이 대중성 있고 흥미롭게 우러나온다. 고대문명에 관한 한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낮추지만 실제론 전문가 못지않은 안목과 만만찮은 식견이 곧잘 드러난다.

고대 그리스 젊은이의 묘비에서 지은이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보여주지 않는 그리스인들의 우아한 전통을 색다르게 들려준다. 이집트의 상형문자 히에로글리프에서는 탁월한 디자인 정신을 발견해낸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되고 다채로운 상형문자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벽화 속의 인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분석적으로 보여준다.

인도의 불상과 아마라바티 부조에서는 추상적 사고와 더불어 구체적이고 관능적인 현세의 쾌락을 동시에 읽어낸다. 이를테면 금욕과 방탕이 공존하는 인도의 문화다. 일생 동안 나무와 관련이 있는 석가모니의 삶에서 ‘나무를 심은 곳부터 문명이 시작된다’는 혜안도 전해준다.

대제국 페르시아의 신화는 모두 모방품, 모조품, 잡다한 이야기를 긁어모은 것이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다며 못내 아쉬워한다. 대신 가십이 많고 매우 실무적이며 산문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고 평가한다. 이라크에서 수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설형문자를 보며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일상생활의 일부를 떠올린다. 이와 함께 바빌론이 퇴폐적인 성도덕 도시로 매도당하는 것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데다 ‘바빌론 유수’사건으로 인한 유대인의 편견이 작용하는 듯하다고 지은이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나무가 유적을 휘감아 인위와 자연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타프롬 사원 등 동남아시아 유적은 이집트나 이란과 달리 신선하고 아름다운 신록이 함께한다는 점이 매력임을 상기시킨다. 경주의 ‘애기불상’과 ‘황금 귀고리’에 얽힌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임진왜란의 오판과 방화로 사라진 사찰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한다.

여러 문명의 발상지가 남긴 유물들. 맨위에서부터 기원전 350년쯤 델로스섬에 세워졌던 젊은이의 묘비. 델로스섬 ‘클레오파트라의 집’에 있는 부부상.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굴된 그리폰(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몸과 다리는 사자인 상상의 동물). 아시리아 제국의 궁전이나 신전 입구에 세워졌던 목우상(牧牛像) 라마슈. 수메르 문명의 왕묘에서 발굴된 ‘덤불 속의 숫양상’. 배에 관을 싣고 가는 고대 이집트의 장례식을 표현한 목각 작품. 사진제공 | 산책자


문명은 사라지면 유적만 남을 뿐이지만 문화는 그 지역의 환경에 맞춰 부드럽게 변하고 그 땅의 사람들과 공존하는 게 다르다고 그는 평가한다. 문자 없이 살았던 켈트인들이 남긴 스톤헨지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버리진이 남긴 바위그림의 행복감에서 문명 이전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아쉬운 대목은 약탈문화재에 관한 지은이의 시선이다. 대영박물관이 제국주의의 소산인 것에 대해 정색을 하고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노재명 옮김.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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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