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4-17 17:45:52수정 : 2009-04-17 17:45:54

▲혁명을 표절하라…트래피즈 컬렉티브 | 이후

당신이 지독한 보수 우파라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럴 수는 있겠다. ‘좌빨’들은 또 어떻게 ‘세상을 망쳐 놓으려 하는지’ 참을성 있게 독파해 보자. 어쨌거나 ‘불편한 진실’ 때문에 마음이 편치는 않을 듯하다. ‘촛불들’이 즐기는 행동양식도 적잖게 담겨 있어서다.

어떤 이는 ‘순진한 주장을 펴고 있네’라며 뜨악해 할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할 게다. 너무 급진적인 게 아닐까. 유토피아, 아니면 최소한 최선진국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성 있는 얘기야?라는 상념이 떠오를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쓰고 엮은이들이 걱정하듯 어떤 대목은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내 아이를 키우는 것, 내 일, 내 빚처럼 피부에 와 닿는 문제와는 무슨 상관이람? 정부와 경찰이 없다면 누가 나라를 지켜주나 하는 위험하고 우려스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겠고.

하지만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즐겁게 바꿀 수 있다’는 상큼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전해 준다. <혁명을 표절하라>는 도발적이고 기발한 제목을 단 이 책은 처음부터 아나키즘과 자율주의를 표방한다. 혁명도 놀이처럼 하고 변화도 즐겁게 하자는 게 요체다. ‘세상을 바꾸는 18가지 즐거운 상상’이라는 부제 그대로다. 여기서 혁명이란 정부를 전복하거나 권력을 교체하는 것처럼 거창한 게 아니라 ‘일상의 혁명’을 말한다.

반은 비평서이고 안내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수평적 삶을 꿈꾸는 이유를 먼저 제시하고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 방안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한다.

‘사람들이 참여하게 만드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다. 이 중에서 작은 일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것이 가장 좋다. 일단 집이나 술집에서 몇몇 사람들과 회의를 하면서 몇 가지 아이디어를 굴려 본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들이 해당 사안에 대해 탐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준다. 다만 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는 것이다. 회의 시간은 2시간으로 제한하고 식사와 음료를 곁들이도록 한다. 사람들이 인식하고 참여하게 만드는 방법은 이런 것들이다. 영화 상영회, 콘서트, 공지 게시판에 포스터 붙이기, 전단지, 스티커, 리플릿 배포, 현수막 걸기, 공동체 행사, 자선 연주회, 공공회의, 교육용 워크숍과 토론회, 웹사이트, 공고용 묘기, 길거리 좌판 등등.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한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의 얼굴에 크고 신선한 파이를 던지는 것은 직접행동을 취하는 쉽고도 효과적이며 종종 유쾌한 일이기도 하다. 캠페인이 용두사미로 끝나거나 한 번의 실천 이후 계기를 놓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주제는 아홉 가지다. 지속 가능한 삶, 의사 결정, 건강, 교육, 먹을거리, 문화행동주의, 자율 공간, 언론, 직접행동. 대부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것들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전기 자급자족 방법 등 퍼머컬처(지속가능한 농업), 합의를 통해 의사 결정을 민주화하는 훈련법, 우리 스스로 건강 돌보기, 학습을 통해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교육법, 공동체 정원 만들기, 집회와 시위 문화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 텔레비전을 넘어 소통하고 미디어를 독립시킬 수 있는 방법, 활기찬 캠페인을 조직하고 누구나 직접행동에 나설 수 있는 방안까지 다양하다.

쓰고 엮은이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세상을 바꿔 보려는 사람들이다. ‘트래피즈 컬렉티브’란 이름 아래 모인 앨리스 커틀러, 킴 브라이언, 폴 채터톤은 뜻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운동의 운동’을 하는 실천가들이다. ‘트래피즈 컬렉티브’는 더욱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연대하고 저항하면서 생태적으로 건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력하는 조직이다.

그림으로 삶을 바꾸는 사례. 여럿이 모여 현재의 문제점이 담긴 그림(왼쪽), 그리고 이 문제점이 해결된 이후의 모습(오른쪽)을 그린다. 이렇게 바뀌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토론하고 행동한다.


예시되는 모든 얘기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트래피즈 컬렉티브’가 직접 체험했거나 네트워크 단체에서 실제로 구현해 보였던 것들이다. 생태 위기를 퍼머컬처나 텃밭 공동체로 극복한 체험 이야기, 빈집 같은 곳을 공동체 공간으로 되살려 쓰는 예술가들의 생생한 경험, 자비로 패러디 신문을 발행하며 대안언론을 키우는 지역 일꾼들의 얘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정말 우리만의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충분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물을 정화하며, 집을 만들고, 우리만의 언론을 개발하며,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까 하는 핵심적인 의문에 편저자들은 이렇게 답한다.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만 이 가운데 많은 일들은 이미 지구촌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 주위엔 이와 관련된 많은 기술들도 존재한다.

순진하거나 과격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도 편견을 거두라고 고언한다. 지구적 네트워크의 희망과 낙관주의를 구가하는 운동조직이 많다는 사실을 근거로 든다. 투쟁과 저항이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든 노예제, 봉건제, 가부장제, 전 지구적 기관들과 엘리트에 반대하는 것이든 늘 인간 역사의 일부였음을 명심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현실은 훨씬 더 느리고 예측불가능하다는 점만 잊지 말자고 당부한다.

번역서의 제목에 상상력을 제공한 엮은이 친구의 제언이 사실상의 결론이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공유될 수 있도록 공공장소에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높이 쌓아 올립시다. 혁명이 표절되어 번져 나갈 것입니다! 생각이 집합을 이루지 않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즐거운 혁명이야말로 표절할수록 우리 사회는 살 만한 곳으로 바뀌어갈 게 틀림없다. 그리 순탄한 길은 아닐지라도. 황성원 옮김. 2만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4-03 17:37:14수정 : 2009-04-03 17:37:16

ㆍ감정조절 불능·충동적인 행동 성향
ㆍ경쟁은 자극제…추진력이 되기도
ㆍ슈퍼스타 30인 심리 흥미롭게 접근

▲스타는 미쳤다 …보르빈 반델로 | 지안

대중의 갈채와 환호작약을 먹고 사는 스타들에게는 화려한 조명이나 명성과는 달리 기구한 삶과 자살이 유독 어른거린다. 이들의 이면을 훔쳐보면 정상적인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외려 어렵다. 대부분 약물·알코올 중독, 우울증, 불안증세에 시달리거나 섹스 스캔들, 폭력, 낭비벽 같은 기행으로 언론을 장식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세태다.

실제로 미국 심리학자 아널드 루드빅의 연구에서 이 같은 현상이 입증된다. 루드빅은 각 예술 분야를 대표하는 유명인 1000여명의 전기를 정신병적 관점에서 들여다봤다. 그는 성격장애 문제에 관한 한 가수, 배우 같은 공연예술 종사자의 숫자가 단연 앞선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특히 음악가들에게서는 술, 마약 문제가 가장 많이 나타났지만 우울증, 자살충동, 성적 장애, 연기 중독도 대부분 관찰됐다. 시인과 소설가들의 3분의 1에서 성격 장애가 나타났다는 영국 심리학자 펠릭스 포스트의 분석보고서도 부쩍 눈길이 간다.

음악가나 배우처럼 자신의 성공을 무대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는 계통의 예술가들이 작곡가나 작가처럼 창작의 열매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예술가들에 비해 ‘경계성 성격장애’ 증상이 훨씬 더 많다는 점도 이채롭다.

독일 정신병리학자인 보르빈 반델로 괴팅겐 의대 교수는 심리적 질환과 성격장애가 스타나 탁월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역설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약간 과장하면 스타를 만든 것은 성격장애였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천재에게서 광기가 발견되는 것과 흡사하다. 스타와 성격장애가 인과관계는 아닐지라도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마이클 잭슨,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로비 윌리엄스, 휘트니 휴스턴, 에디트 피아프, 지미 헨드릭스에서부터 심지어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반델로가 제시한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불안증세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쌓아온 반델로는 <스타는 미쳤다>(원제 Celebrities)에서 30여 슈퍼스타들의 빼어난 예술성 뒤에 가려져 있는 비극적 인생을 정신의학적으로 해부했다.

세계적인 가수 잭슨은 ‘경계성 성격장애’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스타다. 잭슨은 극단적인 자아도취, 파트너 관계의 문제, 자기 비판력 부족, 신체 감각 장애, 중독증, 강박증 등 온갖 증후군을 고루 지녔다. J M 베리의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 피터 팬처럼 어른이 되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소아애호증이라는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먼로도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언제나 불행이란 단어와 씨름해야 했다. 먼로의 어린 시절은 트라우마의 연속이었다. 다른 스타들도 대개 문제 많은 유년기를 보낸 것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여러 심리치료사에게 많으면 일주일에 다섯 번까지 치료를 받았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일흔이 다 된 제작자와 잠자리를 갖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많은 창조적인 예술가들이 너무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경계성 성격장애’가 20세에서 30세 사이에 가장 활발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추정한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의 분류법에 따르면 성격장애는 세 개의 상위그룹과 아홉 개의 세부군으로 나뉜다. 상위그룹은 ‘불안장애’ ‘괴상하고 엉뚱한 장애’ ‘극적·감정적·변덕스러운 장애’가 그것이다. ‘불안 장애’에는 ‘불안-기피성’ ‘강박성’ 성격장애가 있다. ‘괴벽, 엉뚱한 성격장애’는 ‘편집성’ ‘분열성’ ‘분열증 유형’으로 세분한다. ‘극적, 감정적, 변덕스러운 장애’에는 나르시시즘으로 불리는 자아도취성, 연극성, 일명 사이코패스인 반사회성, 경계성 성격장애 등 네 가지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성격장애는 대부분 ‘경계성 성격장애’다. 이는 가장 심각하고 치료하기 힘든 증상인 데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안정한 대인관계, 감정조절 불능, 충동적인 행동 성향을 보이는 게 특징이다. 경계성 성격장애자 열 명 가운데 한 사람 꼴로 자살을 선택한다. 저자는 음악 비즈니스가 주먹다짐까지 벌여야 하는 무자비한 사업이어서 경쟁자의 목에 잔인한 무기를 들이대야 할 때도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범죄적 에너지’는 강인한 자아도취적 동기부여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타들이 별난 행동을 벌이면서 열정을 발산하는 것은 금지된 환상의 대리만족을 요구하는 대중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스타들은 ‘성취감이란 이름의 마약’을 마시며 자란다. ‘경계성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늘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불안증은 삶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극단적인 경쟁에서 스스로를 다그쳐 추진력을 제공해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은이는 예술과 심리적 질병을 연관지어 살펴보는 게 스타나 예술인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심리적 문제 때문에 탁월한 예술가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쉽지 않은 주제인 정신분석을 다루지만 글의 전개는 더없이 흥미만점이다. 낯익은 스타들의 정신적 이면을 조곤조곤 풀어나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중친화적이고 감칠맛 나는 글쓰기로 인해 책을 들추면 중도에 놓기 쉽지 않다. 엄양선 옮김. 1만5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3-20 17:45:18수정 : 2009-03-20 17:45:20

ㆍ재일동포 1세의 초상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이붕언 | 동아시아

재일동포 3세 사진작가 이붕언의 뇌리에는 불혹의 나이를 지날 무렵부터 마치 선문답이나 철학적 근본 물음과 같은 의문부호들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 걸까.’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렇잖아도 야마무라 도미히코(山村朋彦)라는 일본 이름을 써오던 그는 24살 때 본명인 이붕언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터였다. 어떤 불이익이든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앞섰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즈음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했던 말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두세 배 열심히 일해야 돼. 일본인들이 자고 있을 때도 노력해야 해. 그래야만 비로소 같은 씨름판에 올라갈 수 있어. 같은 씨름판에 올라가더라도 힘이 일본인과 비슷한 정도면 지게 되니까 모두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

그는 그런 기억을 아스라이 간직한 채 하늘나라에 계신 조부모, 선친을 만나는 기분으로 일본 전역에 살아 있는 재일동포 1세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났다. 일본열도 최북단 홋카이도의 외딴 산골에서부터 남쪽 끝자락 오키나와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5년여 동안 발품을 팔았다. 만난 이들은 대부분 80, 90줄에 접어들었고, 드물게 70대인 분들도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기억해 주지 않을지도 모를 100여명의 이름 없는 1세들이었다. 막노동자, 고물상, 택시운전사, 야키니쿠(불고기) 식당이나 전당포·작은 파친코 주인, 어부, 해녀 같은 직업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이붕언은 낯선 땅에서 잡초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억척같이 살아온 1세들이 사라지기 전에 뭔가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에서 카메라와 취재 노트를 들고 나섰다. 재일동포 1세들의 부고 소식이 점점 자주 들려왔고 남은 이들의 삶에도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다. 그들의 마지막 초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붕언의 마음이 바빠졌다.

많은 분들이 반려자를 잃고 홀로 살고 있었다.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대담을 거절하거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극구 사양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두 번의 여름방학 동안엔 3명의 어린 자녀를 동행시켰다. 이 여행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이들은 이해 못하지만 어른이 되면 깨달을 것이라는 희망과 더불어.

오래 전에 머리에 내린 서리, 세월의 무게를 절감하는 주름살이 역력한 사진과 함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재일동포 1세 아흔한 분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은 결정체가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이다. ‘디아스포라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면 어떨까.

기억의 저편을 떠올리는 재일동포 1세들이 공통적으로 맞닥뜨린 것은 가난과 차별, 편견이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막노동으로 살아야 했던 처지에서 가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냉대는 풀기 어려운 한으로 응어리졌다. 모든 ‘조선인’은 일본인들의 발에 밟히는 낙엽 같은 존재였다.

우리 나이로 아흔이 됐을 박수엽 할아버지는 차별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옛날에 ‘보리밥이 밥이냐, 정어리가 생선이냐’ ‘조선인이 인간이냐, 보리밥이 밥이냐’는 말이 있었다오. 조선인은 개나 매한가지로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선입견이 일본인들에게 있었지.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조선인을 싫어했는지 모르겠어.” 서무생 할머니는 망각으로 대응하려 했다. “차별받는 생각이 들 때는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어.”

1세들의 신산한 삶은 하나같이 닮은꼴이다. “도둑질과 살인 빼고는 다 해봤지. 조국이 통일이 될 때까지는 절대 눈 못 감아”(김태선 할머니), “제일 힘들 때 세상에 나왔어. 전쟁 전, 전쟁 중, 전쟁 후… 죄다 가시밭길이었어. 재일 3세 정도만 되었더라도 좋았을 텐데…”(김기선 할아버지).

고향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추스르기 힘든 애착이다. “나는 일본 흙은 절대 안 될 거요”(정현호 할아버지), “내 스스로 일본에 오긴 했지만, 자식들에게 내가 죽으면 고향에 묻어달라고 당부해 놓았소”(구한회 할아버지). 뼈를 일본인 아내가 묻힌 곳과 고향, 두 군데에다 묻어주길 바라는 김진하 할아버지처럼 삶의 현장에 집착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고국에 남겨진 부인과 일본인 아내를 동시에 가진 이중결혼의 애환도 대다수의 응어리였다. 뒤늦게 일본으로 건너온 부인이 겪어야 했던 속앓이는 당사자가 아니면 실감하기 어려운 고뇌였다.

때로는 비슷한 구술 내용이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각기 헤쳐나온 고생담에서는 진한 애환이 풍겨 나온다. 노인네들의 추억 나누기 정도로 여길지도 모르나 재일동포 1세들의 미시사라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재일동포 1세들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 기술 어느 곳에서도 소외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책에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 찾기를 주문하는 메시지도 오롯이 담겨 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 가운데 4분의 1 정도가 책이 나오는 동안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이 책의 소중함을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에는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작은 기여가 있었다. 번역자인 윤상인 한양대 교수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읽어보라며 건네준 두 권의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일본어판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소수자와 약자의 입장에서 작가로서 윤리의식을 다듬어온 만년의 오에 겐자부로가 재일동포 1세들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공명했던 시간들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1만8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3-06 17:51:54수정 : 2009-03-06 17:51:57

미러링 피플-세상 모든 관계를 지배하는 뇌의 비밀
마르코 야코보니 | 갤리온

부부가 함께 오래 살수록 외모도 닮는다는 속설을 과학자들이 실증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국의 한 연구팀은 이런 현상이 부부의 성격이 갈수록 비슷해지는 데다 두 사람의 감정 표현도 유사해지는 것과 관련성이 크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희로애락에 따라 같이 웃고 찡그리면 특정 안면근육과 주름살이 수축되거나 이완되면서 부부의 인상이 비슷해진다는 학설이다. 결혼생활의 질이 높을수록 얼굴은 더 많이 닮는다고 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엄마의 표정을 모방한다. 엄마들 역시 자기 아이의 얼굴 표정을 따라 한다. 부모와 아기들이 서로 따라 하는 일은 표정 외에도 너무나 많다. 따라 하려는 충동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모방은 인간의 사회적 관습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수단이 돼왔다.

사람들은 서로 좋아할수록 더 많이 모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한 실험에서는 모방과 호감이 함께 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영국 심리학자 수전 블랙모어는 인간을 모든 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모방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이 같은 모방과 동조는 개인들을 ‘우리’라는 울타리로 묶어주는 접착제다.

이런 감정은 뇌의 특정부위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게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마르코 야코보니의 견해다. 야코보니는 ‘거울 뉴런’이라는 작은 신경세포 회로에서 찾아낸 비밀을 최신작 <미러링 피플>(원제 Mirroring People: The New Science of How We Connect With Others)에서 풀어놓는다.

야코보니는 거울 뉴런을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되게 하는 필수요건으로 꼽는다. 거울 뉴런이야말로 자기와 타자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상호의존성을 가리키는 뇌세포라는 것이다. 저자는 전화로 얘기할 때 상대방이 보지 않음에도 몸짓을 하거나 심지어 맹인에게 이야기할 때조차 제스처를 취하는 경향도 거울 뉴런으로 설명한다. 다른 사람의 몸짓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까지도 말을 할 때 몸짓을 하는 것은 감정이입과 공감의 메커니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거울 뉴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코보니는 공감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거울 뉴런이 전하는 좋은 뉴스이지만 모방 폭력 같은 수많은 부정적인 본능은 나쁜 소식으로 분류한다.

지은이는 매체 폭력이 모방 폭력을 부른다고 확신한다. 폭력적인 영화를 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영화를 본 아이들보다 사람이나 장난감에 대해 훨씬 더 공격적인 행동을 보여준 것을 비롯한 다면적인 실험결과를 예로 든다. 실험실 연구, 상관 연구, 종단 연구에서 나오는 모든 결과가 매체 폭력은 모방 폭력을 유도한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우리 뇌 안의 거울 뉴런은 자연스럽게 모방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다.

각종 중독 현상 역시 거울 뉴런의 산물이다. 흡연, 알코올, 마약 치료의 가장 큰 관건 가운데 하나가 확률 30~70%인 재발이다. 갓 담배를 끊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영향을 받지 않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 모종의 내적 모방을 촉진하는 것이 거울 뉴런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 1000명 중 한 명꼴로 걸리는 자폐증의 주요한 신경적 결함도 거울 뉴런의 기능장애다. 깨진 거울에 얼굴을 비추는 것과 흡사한 자폐증의 치료는 어떻게 깨진 거울을 고칠 것인가로 귀결된다. 여기서 모방이 등장한다. 자폐아 치료법으로 모방을 활용해 효험을 본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거울 뉴런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우리가 느끼도록 촉진하는 광고효과로도 기능한다. 특히 선거와 정치 캠페인에서 비방광고의 효능은 거울뉴런으로 인해 놀랄 만큼 탁월하다. 정치 중독자와 정치 혐오자의 뇌활동은 판이하게 나타난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정치에 관한 뇌영상 실험에서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친절과 나눔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 분배를, 정치중독자들은 위계적 불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권위서열관계를 대부분 연상한다.

지은이가 거울 뉴런의 기능이나 현상의 분석과 진단에 그치지 않고, 주제의 특성상 쉽지 않은 대안까지 제시한 데서 이 책의 미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들’ 사이에 거울 뉴런이 존재하는 만큼 서로 의미를 공유하는 ‘상호주관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모방 폭력의 경우 흔히 내세우는, 상관관계가 아무리 강력해도 반드시 인과관계로 볼 수 없다는 논리를 매섭게 비판한다. 매체산업의 재정적 이해관계라는 보호막과 이기주의를 걷어내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선거의 비방광고는 정치 환멸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퇴출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유권자와 정치적 대표자들 사이에서 공감과 동일시의 메커니즘이 절실하다는 호소다.

지은이는 거울 뉴런으로부터 배울 교훈의 한 가지로 ‘엄격한 이분법을 의심하라’고 권한다. 우리 모두는 혼자가 아니라 서로 깊숙이 연결되도록 생물학적으로 배선되고 진화적으로 설계되어 있음을 명심하라는 경구다. 야코보니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우리가 서로에게 더욱 가까워질 수 있고,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감흥이 높은 것은 물론이다. 김미선 옮김. 1만3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2-20 18:02:50수정 : 2009-02-20 18:02:52

ㆍ“이론 여전히 효과적” 美·英 등서 불황구원자로 재규명
ㆍ경제 ‘국가개입 여부’가 아닌 ‘어떠한 개입이냐’ 문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로버트 스키델스키 | 후마니타스

‘프리드먼이 죽고 케인스가 살아났다.’ ‘케인스 60년 만에 부활하다.’ ‘케인스가 환생했다.’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케인스 경제학이 다시 햇볕을 쬐고 있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이후 너나없이 케인스의 이름을 불러댄다. 케인스주의와 결별을 선언하고 신자유주의 전도사로 나섰던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주류 경제지들조차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는 듯이. 2001년 9·11 테러 직후 프랑스의 르몽드지가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쓴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를 연상케 한다. 한국의 현대경제연구원도 ‘2009년 해외 10대 트렌드’라는 보고서에서 ‘케인스 경제학’을 포함시켰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회가 친케인스주의자들로 채워진 것을 비롯해 각국 정부는 속속 케인스 카드를 뽑아들고 있다. 케인스의 모국인 영국의 앨리스테어 달링 재무장관은 “케인스의 많은 이론들이 여전히 효과적이며 그의 처방대로 2010년과 2011년 예산을 미리 끌어다가 공공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경기부양 계획을 실행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비범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처방전은 이처럼 자본주의가 병상에 드러누울 때마다 감초처럼 등장한다.

1915년 무렵 영국 가싱턴에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왼쪽), 작가 리튼 스트레이치(오른쪽)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케인스(가운데).


때맞춰 번역 출간된 그의 대하전기(大河傳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만년 부도옹(不倒翁) 같은 그의 사상적 배경과 삶의 궤적을 스토리텔링의 극대화로 연출한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30년에 걸쳐 완성한 케인스 전기는 더없이 방대하고도 세밀하다. 모두 1645쪽에 달하는 분량이 먼저 그대로 보여준다. 원래 3부작으로 된 전기를 단행본용으로 40%가량 축약한 게 이 정도다. 꼼꼼한 자료 조사와 수많은 주변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거쳐 집대성한 대학자의 삶이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정교하게 시야에 잡힌다.

지은이는 케인스의 주요 저작과 논문, 강연 내용, 이론의 쟁점과 역사적 함의, 시대적 배경, 이론을 둘러싼 갖가지 반응, 세계를 움직인 인물들과의 폭넓은 교유, 20세기의 역사적 사건과의 연관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천착하고 재생해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전기를 넘어 케인스 해설서로도 읽힌다.

세계 자본주의의 발흥지인 영국에서 경제학이 분과 학문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한눈에 그려볼 수 있는 덕목도 지녔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마르크스 등 고전학파 경제학 거장들이 모두 영국에서 산 덕분이기도 하다. 1, 2차 세계 대전과 브레턴우즈 체제의 성립 과정, 세계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는 과정 등 역사적인 순간들의 뒷담화도 자세하게 밝혀진다. 미시적으로는 공식적인 기록과 더불어 관련 인물들의 편지, 일기, 비망록 등 사적인 기록물을 통해 케인스의 내밀한 심리적 부분까지 바닥을 드러낸다.

애초 역사를 전공했던 스키델스키가 이 전기를 쓰기 위해 경제학 강의를 들어가며 매진했을 정도였다. 역사학과 경제학의 찰떡 같은 결합의 산물인 셈이다. 지은이가 경제학자라기보다는 ‘경제학적 교양을 지닌 역사가’라고 자부하는 데 손색이 없어 보인다.

1945년 12월 영국으로 돌아와 상원을 향해 서둘러 가는 케인스와 부인 리디아.

저자는 케인스가 정부의 재정정책을 전지전능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느냐는 오해를 불식시켜준다. 케인스 경제학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 개입이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어떠한 개입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케인스가 정부의 책무를 강조했다고 해서 정부가 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많은 오해가 케인스 제자들의 과도한 신념으로 말미암은 부분이 적지 않다.

케인스에 대한 스키델스키의 궁극적인 관점은 또 하나의 영웅사관이다. 개인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고, 케인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케인스의 성품이 고전시대의 영웅 오디세우스와 가장 닮은 것이었다고 여긴다. 대표적인 사례가 여기서 나타난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대량실업을 동반하는 경제 불황을 정부가 나서서 예방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1000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이러한 사상이 케인스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정부가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케인스의 생각을 그런대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10만명 중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위대한 경제학자들 가운데 케인스는 생전에 ‘명사’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

전기에서는 위대한 천재 경제학자의 초상만이 아니라 철학자, 정치가로서의 풍모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한 인간으로서 케인스는 미학자와 경영자의 매혹적인 조합이어서 그가 쓴 경제저술에서는 시적 자질이 번득였다고 스키델스키는 회상한다. 생전에 경제학 학위를 받은 적이 없으며 학위라고는 수학 학사가 전부인 케인스가 위대한 경제학자로 평가받는 비밀을 담아냈다.

방대한 책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첫 문장은 평생 최고 엘리트로 살았음을 상징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그 삶의 거의 대부분을 자신을 제외한 영국인들, 그리고 세상 모든 이들을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보냈다.” 영국 최고의 사립고교인 이튼스쿨과 최고의 대학인 케임브리지를 졸업했고, 최고의 부처인 재무부에 근무하며 주류 경제학계의 핵심 인물로 지냈으니 이런 얘기를 들을 만도 하다. 마지막 구절은 지은이의 속내를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다. “케인스 사상은 세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한 살아 있을 것이다.” 고세훈 옮김. 전 2권. 1권 3만5000원, 2권 3만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2-06 17:39:05수정 : 2009-02-06 17:39:07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제니스 펙 | 황소자리

‘지상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에 대한 상찬은 한 두 마디로 불가능한가 보다. “오프라 윈프리는 아마도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 교황을 제외하고는 어느 대학 총장이나 정치가, 종교적 지도자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미국 연예정보 월간지 배니티 페어의 평가다. 이도 성에 차지 않는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미미 에빈스 기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윈프리는 최고의 인물들을 합쳐 놓은 듯한 존재다. 동서양 철학자와 뉴에이지 계몽운동 지도자들을 하나로 합친 것 같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한 칼럼니스트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영국인들이 군주를 투표로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옥좌에 올라서 왕관을 쓰시오, 오프라.” 작가 프랜 리버위츠는 윈프리가 하나의 종교에 가깝다고 했다. 로스 페로가 이끄는 개혁당은 윈프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 했을 정도다. 대통령 후보가 되진 않았지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사실상 탄생시켜 킹메이커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이름은 이제 하나의 동사, 특정현상을 지칭하는 명사로까지 자리잡았으니 덧붙이면 군더더기나 다름없다. ‘누군가를 오프라하다’라는 말은 “고백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로 친근하면서도 집요하게 캐묻는다”라는 의미다. 내셔널 리뷰는 ‘오프라화’를 “한 나라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통째로 개조하는 일”이라고 일컫는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흑인 사생아가 모든 악조건을 뛰어넘어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자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브랜드 파워가 된 것을 기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만하면 뉴스위크가 21세기를 ‘오프라의 시대’로 명명한 것을 과장이라고 나무랄 수도 없겠다. 윈프리에 관한 책이 대부분 용비어천가처럼 된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 미디어 아이콘이자 문화권력인 윈프리에게 칼을 들이대는 여전사가 용감하게 나타났다. 아니 칼보다 강하다는 펜을 들었으니 더 무섭다.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원제 The Age of Oprah: Cultural Icon for the Neoliberal Era)를 쓴 콜로라도 대학의 제니스 펙 언론홍보대학원 교수가 주인공이다.

펙은 신화가 된 윈프리의 인간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편향성과 휴머니즘의 허실을 조목조목 해부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윈프리가 성공가도에서 신자유주의에 영합하며 미디어 권력으로 도약하는 과정을 샅샅이 캔다.

그가 동원하는 칼은 더글러스 켈너의 ‘진단 비평’이라는 방식이다. 저자는 먼저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견해를 수용한다. 그런 전제 아래 윈프리의 거시적인 사회역사적, 정치경제적 과정 간의 관계를 파고들어간다. 윈프리의 대중적 신격화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거시적 과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지은이는 윈프리가 부와 명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이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혁명과 때를 같이 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여긴다.

지은이가 윈프리에게 칼을 들이대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전 운 따위는 믿지 않아요. 저는 절대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만하고 위선에 가득 찬 말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지은이를 더욱 열 받게 만든 것은 소득이 윈프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이 그의 말이라면 쌍수를 들어 호응할 뿐만 아니라 ‘윈프리의 십계명’을 외우며 흉내 내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우선 윈프리 쇼가 텔레비전을 ‘최고의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거나 또 다른 ‘해방의 정치학’이라는 일반 견해와는 달리 레이거니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논리를 확대재생산했다고 단언한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결함과 책임으로 몰아가는 접근법이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특히 빈곤에 관한 프로그램에서는 뿌리 깊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과 가정의 병적인 문제로 치부했다고 여긴다.

실업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정치·경제적 문제로 다룰 수 있는 능력 부족이 토크쇼 전반에 걸쳐 뚜렷이 드러났다고 매섭게 꼬집는다. 빈곤과 실업에 관한 방송은 모두 로널드 레이건의 이데올로기 프로젝트를 그대로 베꼈다는 주장을 편다.

엄청난 독서 열풍을 일으킨 ‘오프라 북클럽’ 프로그램도 긍정적인 효과가 적지 않지만 이데올로기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윈프리가 불우학생들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세운 학교 역시 소수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돈을 쏟아부어 전시효과를 노린다는 비난의 목소리를 빼놓지 않았다.

윈프리는 전반적으로 엘리노어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와 마틴 루터 킹의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여성인권운동과 민권운동의 급진주의는 교묘하게 피해갔다고 은근한 비난을 퍼붓는다. 윈프리의 말에는 ‘인종차별정책이나 부모의 환경을 탓해서는 안된다. 구하라, 믿으라, 그러면 얻으리라’는 메시지가 종합선물세트처럼 담겨 있다는 결론이다.

지은이는 윈프리가 모든 문제의 원인과 책임이 각자에게 있다고 역설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치적 가치를 되살리고 정치의 장이 제자리로 돌아가 맡은 몫을 다하게 해야 한다면서. 요즘 한국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어딘지 닮은 점이 많다. 다 읽고 나면 비판이 과도하지 않느냐는 느낌을 받을 독자도 있겠지만 비대칭적인 시각 교정에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박언주·박지우 옮김. 1만98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1-16 17:36:17수정 : 2009-01-16 17:36:19

▲청부과학…데이비드 마이클스 | 이마고

“지난 20년간 소송과 정치, 여론에서의 전략은 영리하게 구상되고 실행됐으나 그것이 승리의 수단은 아니었다. 건강을 해친다는 비난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에 대한 의심을 만들어내는 것, 대중에게 담배를 피우도록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흡연권을 옹호하는 것, 건강 위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객관적 과학연구를 독려하는 것에 기초한 지연전술이 핵심이었다.”

1972년 미국 담배연구소 직원이 동료에게 쓴 이 편지는 흡연 폐해론 방어에는 정책이 아닌 과학이 지름길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 물증의 하나다. 어느 중역이 흡족해 하면서 남겼다는 메모는 훨씬 적나라하다. “의심은 우리의 제품이다. 일반 대중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사실의 실체’에 도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의구심의 조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논쟁거리를 만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거대 담배회사들이 수십년에 걸쳐 후원한 연구가 조작되고 제조업자에게 유리한 데이터만을 선별해 내놓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름하여 ‘펀딩효과’다. 연구후원자들이 원하는 결과와 과학자들의 보고서 사이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리키는 이 말은 가장 존경받는 과학자들에게조차 예외가 아닐 정도다. 1980년대 간접흡연이 문제를 일으키자 담배업계는 낯 뜨거운 ‘건전과학’ 운동을 벌인다. 자본과 과학의 뒷거래인 ‘청부과학’이다.

쓰레기 과학이 건전과학의 탈을 썼으니 양두구육 격이다. ‘제품방어 산업’이라고 불리는 청부과학은 결국 간접적인 청부살인과 다를 바 없다.

선두주자인 담배 업계를 보고 배운 것은 한두 종의 기업만이 아니었다. 석면, 납, 크롬, 수은, 디아세틸, 방향족 아민 화학염료, 벤젠, 플라스틱 화합물, 베릴륨, 염소 화합물, 농약과 각종 살충제, 의약품 제조기업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해물질 배출산업의 집대성이다.

클린턴 정부에서 에너지부 차관보로 일한 적이 있는 조지워싱턴대 환경·산업보건학 교수 데이비드 마이클스의 <청부과학>(원제 Doubt Is Their Product)은 자본·기업과 결탁한 과학이 인간의 건강과 환경을 어떻게 파괴하고 위협하는지에 대한 고발장이다. 치명적인 위험상품의 과학적 은폐·왜곡 수법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위험성에 물타기하는 교묘한 데이터 조작방법 등을 읽다보면 분노가 치미는 걸 참아내야 한다.

중대한 건강 위험을 기업들이 수년간 자기들만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문건들, 불확실성을 제조하기 위한 업계 캠페인을 입증하는 서류들, 발표되지 않은 채 기업후원자들에 의해 감춰진 중요 과학연구들도 까발려진다. 부도덕 업자들은 때로는 가장 영리한 정책이라는 ‘전략적 무지’로 대응한다.

미국의 거대 석면 제조사들이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지급한 막대한 보상금 때문에 파산하기 수십년 전에 이미 석면의 위험성을 밝힌 역학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공분을 금치 못한다. 대중들은 ‘죽음의 팝콘’을 알고 있을까. 김이 나는 팝콘 봉투를 열면서 맡는 향료 연기가 기관지와 폐의 적이라는 사실을. 팝콘에서 나오는 디아세틸이라는 물질로 인한 피해 연구 결과가 오래 전에 나왔으나 미국 산업안전보건부는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폭로한다. 모든 게 미국 얘기지만 한국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금방 다가온다.

지은이는 공중보건을 수호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과학의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무익하고 역효과만 낳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확실성을 기다리다 보면 영원히 기다리게 되기 때문이다. 과학연구에 참여한 모든 후원자의 완전한 정보공개와 최종 심판자로서의 법원의 기능을 강화할 것 등 12가지 제안도 내놓았다. 이홍상 옮김. 1만9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9-01-02 17:41:50수정 : 2009-01-02 17:41:52
ㆍ하지만 미국의 위기는 70년대 시작됐다

▲장기 20세기…조반니 아리기 | 그린비

미국 진앙의 전세계적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세계질서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필연적 쇠퇴를 의미하는가? 다수의 전문가들은 유보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려 한다. 미국 쇠퇴론이나 몰락론은 대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금융위기와 이라크전쟁의 실패 같은 당면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더불어 세계체계론을 주도하는 조반니 아리기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 위기는 1970년대에 벌써 시작됐다고 맥을 짚는다. 한때의 우발적인 것이 아닌 구조적인 위기라는 견해다. 미국의 금융적 팽창이 이 때부터 본격화됐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리기는 주요 저작의 하나인 <장기 20세기>(원제 The Long Twentieth Century: Money, Power and the Origins of Our Times)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순환 과정의 분석을 통해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를 정밀 투시한다. ‘장기 20세기’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특수한 발전 단계를 구성하는 네 단계 가운데 20세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세기를 일컫는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20세기의 시작과 끝을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과 1991년 소련 붕괴로 잡고, 이를 ‘단기 20세기’라고 명명했던 것과 비교된다.

아리기는 장기 20세기 자체의 심층 분석보다 중세 이탈리아의 제노바, 네덜란드, 대영제국을 거쳐 미국 헤게모니의 금융적 팽창 시기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자본주의의 미래 시나리오를 그리려 한다.

이 책의 중심 열쇳말은 ‘체계적 축적순환’이다. 체계적 축적순환이란 용어는 자본주의를 교역 세계 최상층으로 보는 아날학파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관점에서 도출한 것이다. 체계적 축적순환은 국가간 체계와 결합됨으로써 본격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지은이는 파악한다. 아리기는 브로델, 월러스틴과 학문적 노선을 같이 하면서도 적지 않은 차이점을 드러낸다. 브로델의 장기순환 추세나 니콜라이 콘드라티에프의 순환개념 같은 ‘비과학적이고 자본주의에 고유한 동학이 아닌 것’으로 자본주의적 순환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아리기의 생각이다. 이 책은 3분의 2 이상을 ‘장기 20세기’ 이전의 역사적 자본주의 전개과정 논의에 할애한다. 미국 주도의 세계자본주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자본주의 시기 전체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선결조건이라는 논리에서다.

첫 번째인 제노바 축적 순환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를 자본주의 시대와 연결하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 고도금융의 부상과 국가형성을 통해 나타나는 국가간 군사적 경합이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수립하는 기본 틀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 네덜란드 축적체제에서는 본격적인 세계경제로 자리잡은 새로운 축적체제가 ‘보호비용 내부화’를 통해 세계상업의 집산지이자 대양의 패자로서 전 지구적으로 축적을 확대해 나간다. 세 번째인 영국 헤게모니 시기에는 세계의 공장으로서 전 지구적 상업적 네트워크 형성과 자유무역 제국주의라는 틀을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네 번째인 미국 헤게모니 하의 세계자본주의는 앞선 모델의 일정한 계승인 동시에 새로운 변신과 일정 부분 지양의 형태를 띤다.

미국은 자신들의 쇠퇴하는 헤게모니를 반전시키기 위해 앞선 헤게모니 국가들보다 훨씬 많은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체계의 구조적 위기를 감소시키기보다 도리어 심화시키게 되는 증거들이 이라크 전쟁의 실패와 미국발 금융위기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예상되는 향후 체계의 카오스에 대해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첫 번째 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지만 대서양 공동지배 방식으로 진정한 세계제국이 형성되고 전 세계에서 착취한 이윤에 의존해 새롭게 지배를 전환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가 세계 시장사회의 중심지로 등장해 비교적 형평성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길이다. 세 번째 길은 헤게모니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끝없는 세계적 수준의 카오스가 지속되는 것이다.

다음 세계 헤게모니를 장악할 잠재력을 가진 지역으로 아리기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곳은 다른 전문가들처럼 동아시아다. 다만 현실화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남겨놓았다. 한·중·일을 포함한 동아시아 경제팽창 수행 주체들의 역량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기는 이 책의 출간 이후 일본보다 중국의 부상을 중심에 놓고 논의를 시도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중국의 경제적 성장이 그 자체로 세계문화와 문명들의 상호존중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시장 사회의 등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여기에는 중국 중심의 세계 체계를 거부하는 미국의 저항이 거셀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1994년에 초판이 나왔던 이 책의 시간적 간격을 한국어판 서문에서 보완해설하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는 그 최종적 위기로 판명날 수 있는 시기에 진입했다. 미국은 단연코 세계 최강국으로 남아 있지만 나머지 세계에 대한 미국의 관계는 ‘헤게모니 없는 지배’로 묘사된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지금에서야 출간된 것은 때늦은 감이 있다. 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 스터디그룹들에서 학습교재로 쓰일 정도로 유명세를 내왔다.

아리기가 이사로 있는 페르낭 브로델 연구센터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한 적이 있으며 세계체계론 소개에 열정을 바치고 있는 전문가인 백승욱 중앙대 교수의 3년간에 걸친 세심한 번역이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는 취약점을 만회해주고 있다. 3만5000원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8-12-19 17:27:25수정 : 2008-12-19 17:33:12


Posted by 김학순

입력 : 2008-11-28 17:32:04수정 : 2008-11-28 17:32:07

클루지…개리 마커스 | 갤리온

살빼기 전쟁을 벌이면서도 밤참으로 라면을 먹고 있는 걸 보면 참지 못해 한 젓가락만 달라고 졸라댄다. 담배가 몸에 해로운 줄 알지만 끊지 못한다. 시간 낭비일 뿐 도움이 되지 않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소파에 누워 심심풀이로 본다. 마감시간이 며칠 남아 있으면 미루고 미루다가 임박해서야 부산을 떤다.

이런 게 사람이다. 멍청한 짓을 하면서 그것이 멍청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런 것은 또 어떤가. 봉건제도, 십자군전쟁, 노예제도, 공산주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탈레반 정권 등을 뼈저리게 겪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불완전했지만 도덕적으로 정당했고 대안체제보다 낫다고 믿는다. 한국에서 군사정권 시절이 좋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정신적 오염 상태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인간이 이처럼 불합리한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일상적으로 하는 까닭은 진화과정이 빚어낸 기묘한 인간의 마음 탓이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소문난 개리 마커스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같은 인간의 마음을 ‘클루지’(kluge)라는 별난 개념으로 풀이한다. ‘클루지’란 공학자들이 완벽하지 않은, 엉성한 해결책을 가리킬 때 쓰는 특수용어다. 마커스는 인간의 마음이 세련되게 설계된 기관이 아니라 서툴게 짜맞춰진 기구 같다며 ‘클루지’라고 부른다.

인간의 마음이 이처럼 ‘클루지스러운’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진화의 관성’ 때문이라고 마커스는 분석한다. ‘생존’ 때문에 최선의 선택을 방해받는 진화의 법칙, 즉 진화의 관성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과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주먹구구식으로 진화해 와 언제나 정상 작동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나는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를 계산하지는 못한다”고 했던 아이작 뉴턴의 말에 이해가 간다.

마커스는 <클루지>라는 같은 이름의 책에서 인간의 마음은 선조들이 아주 오랫동안 동일 환경 속에서 진화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여러 ‘반사체계’와 비교적 최근에 진화해서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숙고체계’로 이뤄지게 됐다고 전제한다. 틀에 박힌 일을 처리할 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반사체계이며, 틀을 벗어나 생각할 때 유익한 게 숙고체계다. 인간의 마음이 클루지스러운 것은 두 체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마커스는 말한다.

그는 인간 진화의 장구한 세월을 꿰뚫는 역사적인 통찰을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엮어낸다. 기억, 신념, 선택, 의사결정, 언어, 행복, 쾌락, 심리적 붕괴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주요 정신영역을 구석구석 살펴 생각의 함정을 캐낸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의 심리구조도 ‘클루지’ 징후 가운데 하나다. 자신의 견해에 반대되는 연구에서는 쉽게 결함을 찾아내는 반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결론을 내린 연구에서는 똑같이 심각한 결함이 있어도 잘 찾아내지 못하는 현상이 대표적인 예다. 목격자의 증언에 허점이 많아 재판과정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일이 줄어든 것도 비슷한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맥락과 단서를 중심으로 조작된 기억이 많은 탓이다. 저자는 인간의 기억이 정확성보다 속도를 중시한다는 데서 원인을 찾는다.

잘 생긴 사람이 면접에서 유리한 것처럼 심미적인 요인이 신념의 형성과정에 잡음으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클루지’의 파생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들이 그리 쓸모없을 것 같은 정책을 고집하는 이유 역시 ‘클루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이미 실행되고 있는 정책을 그렇지 않은 정책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기존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객관적 자료가 없을 때도 그렇다. 이는 현직에 있는 사람이 왜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는지를 입증해 준다고 한다.

한 기결수가 90일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뒤 89일째 되는 날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한 실화는 의지의 허약함을 보여주는 ‘클루지’ 증후군이다.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와 3년 동안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20만원짜리 수표 가운데 앞의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현상도 비슷하다.

저자는 확증 편향, 정신적 오염, 부적절한 자기통제, 초점 맞추기 착각, 애매한 언어체계, 정신장애에 대한 취약성 같은 것이 사람의 인지적 구성에 존재하는 여러 결함의 모델이라고 제시한다. 우리의 뇌가 돈보다 먹는 것에 탐닉하며, 돈을 상대적으로 계산하고, 미래를 그리 염두에 두지 않는 편이며, 가치와 가격을 혼동하거나 틀짜기(Framing)에 약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클루지’를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는 마음의 장점과 약점에 대한 섬세하고도 균형 잡힌 이해를 통해 우리 자신과 사회에 함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클루지’에 대처하는 13가지 처방을 내놓은 것도 이를 나름대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지은이가 관찰한 반사체계와 숙고체계의 갈등은 쾌락원리를 좇는 무의식적인 원초아(id)와 현실원리를 좇는 의식적 자아(ego)의 갈등으로 인간심리를 묘사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론의 현대적 해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창조론의 한 갈래인 지적설계론과 전통적인 진화론을 싸잡아 비판하는 도전적인 수작이라고 할 만하다. 최호영 옮김. 1만3800원


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