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6-20

 캄보디아를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킬링 필드」를 맨먼저 떠올린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적화된 1975년, 수천명의 시체들이 널브러진 살육장을 목도하고 붙잡혔다가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 디스 프란. 먼저 빠져나간 동료 뉴욕 타임스지 기자 시드니 센버그와 그가 재회의 기쁨으로 힘차게 포옹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존 레넌의 「생각하세요」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킬링 필드」는 그곳에서 3년간 억류됐다가 탈출한 디스 프란이 쓴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데다 그의 역을 맡은 행 느고르도 캄보디아 억류생활끝에 탈출한 경험이 있어 영화의 생동감을 더해준다.「킬링 필드」의 악명높은 실제 주인공은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인 것이나 다름없다. 월남 패망직후 정권을 장악한 폴 포트는 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2백여만명의 동족을 무참히 살육, 인류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아직도 「킬링 필드」시대의 공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어쩌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훈 할머니의 참극도 「킬링 필드」때문에 깊어졌는지 모른다. 권력에서 물러난 뒤에도 내전을 지휘해 온 폴 포트가 마침내 투항했다니 삶의 무상을 새삼스레 느끼게 한다. 아직 미스터리가 남아있는 그의 투항을 둘러싸고도 캄보디아판 합종연횡설까지 나돈다. 노로돔 라나리드 제1총리와 훈센 제2총리가 「이상한 연정」을 꾸려가고 있는 캄보디아에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폴 포트의 세력을 서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에서 그의 투항이 비롯됐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퍼져 있다. 이 때문에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지 않고 사면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그가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역사라도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킬링 필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데 캄보디아의 비극이 있다. 1, 2총리 세력간의 총격전으로 새로운 내전위기에 빠져들고 있어서다. 북한을 생지옥으로 만든 김정일도 폴 포트의 인생역정에서 느끼는 바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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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6-13
 
전쟁만큼 걸작을 낳는 문학적 소재도 드물게다. 최인훈을 우리 문단의 거목으로 평가받게 했던 「광장」 역시 6·25전쟁이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싶다. 주인공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때문에 시달림을 당하다 북으로 올라가 그곳 정치체제에 가담해 보지만 북의 「광장」, 남의 「밀실」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전쟁포로가 되어 제3국행을 택하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게 소설의 줄거리다. 이렇듯 전쟁과 포로는 바늘과 실에 비유될 만큼 숙명적인 관계다. 극적인 장면이라면 6년6개월동안 공산 베트남의 포로수용소에서 전기고문 등 엄청난 가혹행위를 당한 적이 있는 미 공군조종사 더글러스 피터슨이 베트남주재 미국대사로 부임한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지난달 9일의 일이다.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전쟁포로로는 프랑스의 사베앙이라는 대위가 첫 손가락에 꼽힐 법하다. 그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때 사라토프 수용소에 갇혀 지긋지긋한 생활을 하는 동안 누구하나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를 마땅히 챙겨야 할 조국 프랑스도 무관심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를 어여삐 여긴 수용소장의 「특별지시」로 수용소안의 한 모퉁이에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그는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다 포로가 된지 꼭 100년 하루만인 1912년 무려 144세란 나이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버금가는 일이 아직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 국방부가 파악하고 있는 미송환 국군포로는 무려 2만명 안팎에 이른다. 전사자들의 유해라도 송환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자극받지 않았으면 실상파악마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억류 국군포로들의 참상은 그곳에서 탈출한 조창호 중위의 증언이나 또다른 귀순자 이순옥씨의 수기 「꼬리없는 짐승들의 눈빛」에서 절절하게 나타난다. 60년대 중반까지 9차례나 확인을 거부한 북한당국이 지금이라고 우리의 요구에 응할지 의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의 불행을 더이상 방치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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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6-10

주일미군의 유지이유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막는 명분으로 미국은 「병마개 이론」이란 걸 내세웠다. 미국이 병마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언제 또다시 병속에서 솟아 나올지 모른다는 논리가 미국민과 이웃나라들에 적잖은 설득력을 지녀왔다. 미국의 병마개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아시아지역 국가들에는 이제 우려될 만큼 느슨해졌다. 소련과의 냉전을 구실로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묵인해 온 미국이 탈냉전이후 한층 병마개를 헐렁하게 만들었다.오는 9월 최종확정을 앞두고 엊그제 일본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에 사전 설명하는 친절(?)을 베푼 미·일 방위협력지침 중간보고서만 봐도 그렇다. 군사비를 줄여서 좋고 중국도 견제할 수 있어 꿩먹고 알까지 먹게 되는 카드로 생각하는 미국. 미국의 요구를 못이기는 체하면서 받아들여 경제대국에 걸맞은 정치·군사적 영향력 증대를 노리는 일본. 두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탄생하게 될 방위협력지침은 한국과 중국엔 민감하기짝이 없는 「뜨거운 감자」가 되고 남는다. 이미 중국은 강력한 반발을, 한국은 조건부 지지입장을 공식적으로 내보였다. 그러잖아도 일본이 자위대 활동영역을 넓혀 가기위해 헌법개정의 명분만 찾고 있는 때와 맞물려 우리의 염려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으려면 최소한 독일 수준의 신뢰를 쌓은 뒤라야 된다.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서독총리는 이스라엘로 날아가 돌팔매를 맞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죄를 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나치에 희생당한 폴란드인의 영혼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한독일대사관이 한국의 어느 제과업체가 히틀러를 광고모델로 사용한 것에 대해 철회를 요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한국이나 중국인들을 진정으로 감동시킨 장면을 보여준 일본 정치가가 있으면 나서 보라. 감동은커녕 야스쿠니신사나 전범들의 위패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나날이 늘어나고 망언이 끊이지 않는 걸 일본은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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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6-03

변화에 대한 인간심리는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다. 상당수의 산업심리학자들은 「인간성은 변화를 싫어한다」는 걸 통설로 내세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창조물 가운데 인간만큼 새 것을 좋아하는 동물은 없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프랑스 총선에서 좌파 연합이 집권 우파를 꺾고 승리를 거머쥔 것은 변화를 갈구하는 유권자 심리의 산물이다. 결국 제5공화국 들어 세번째의 코아비타시옹(좌우 동거 정부)이 불가피해졌다.지난 86년 우파의 총리로 입각해 집권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을 견제했던 시라크 대통령이 이번에는 형편이 뒤바뀌었다. 사회당소속 총리가 될 리오넬 조스팽 제1서기(당수)의 견제를 받게 된 것이다. 돌고 도는 역사의 아이러니로만 표현하기엔 부족한 느낌을 준다. 「변하면 변할수록 옛 모습을 닮아간다」는 프랑스 격언이 이래서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우파 대통령에 좌파 총리라는 엉거주춤한 정부 형태는 좋게 말해 좌·우익의 균형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프랑스인들의 「선택의 딜레마」가 작용한 거나 다름없다. 사실 좌파, 우파라는 말의 비조부터 프랑스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공회에서 부유한 부르좌를 대변했던 지롱드파와 소시민층과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삼았던 자코뱅파는 각각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앉았다. 이때의 자리 위치가 이념의 이름을 갈라 놓은 것이다. 이렇듯 프랑스 정치에서 좌우 동거의 역사는 태생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프랑스 총선 결과는 지구촌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앞서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좌파인 노동당의 승리 여세가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까지 미쳤다는 분석이 정설이다. 이란 대선에서 변화와 개방의 깃발을 높이 든 진보 인사가 당선된 것도 마찬가지다. 변화의 도미노현상을 예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우리네 정치권에서 나라밖의 정치적 변화를 보는 눈은 「자기 논에 물대기」식이다. 여당은 참신한 인물로의 세대교체만 부각시키는 반면 야당은 정당간 수평적 정권교체의 의미를 늘상 앞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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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5-08
 
 영국왕이었던 헨리 3세는 국민들의 근검절약을 위해 「검소령」이란 걸 내린 적이 있다. 이 검소령의 뼈대는 의상에 황금이나 보석을 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처음엔 왕의 말발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왕은 궁리끝에 「매춘부나 도둑놈은 이 법령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단서를 붙여 다시 공포했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보석과 황금이 런던시민들의 치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얼마뒤 왕이 프랑스왕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게 됐다. 영국법령을 알 리 없는 왕비는 갖가지 보석으로 몸단장을 하고 궁전에 나타났다. 헨리 3세는 자신이 공포한 법령을 설명했으나 왕비는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은 그 다음날 당장 검소령을 폐지하고 말았다. 왕비부터 법령을 지키지 않아 「매춘부」가 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그런 일화를 가진 영국에서 새로 탄생한 재상과 그 가족의 검소하고 소박한 일상생활이 잔잔한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신문을 받아든 독자들은 토니 블레어 신임총리의 자녀들이 이삿짐을 나르는 사진을 보고 느낀 바가 적지 않았을 법하다. 영국총리 관저에는 가정부도 두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는다. 그 때문인지 며칠전 새 퍼스트 레이디인 세리 부스여사가 축하화분을 전하기 위해 아침 일찍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를 듣고 잠옷바람으로 나오려던 모습이 텔레비전 카메라에 잡혀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았다.
 블레어총리에겐 노동당 당수시절의 흥미있는 얘기도 전해진다. 내무장관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8살이던 막내딸 캐트린이 받았다. 이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아빠는 설거지중이니 나중에 전화하세요』. 손수 노동을 하는 그가 과연 노동당 당수답다는 평을 들을 만도 하다. 하기야 러시아의 역대 통치자가운데 가장 존경받고 있는 표트르 대제는 의자와 식기 등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쓸정도였다. 블레어가 금세기 최연소 영국총리에 취임한 사실보다 근검하는 그의 생활이 우리국민의 눈을 더욱 번쩍뜨이게 하는 것은 모범적인 지도자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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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4-25

 『미아리의 공동묘지는 자연이 인간을 사멸하게 한 것이며, 동작동의 국군묘지는 인간의 역사, 말하자면 인간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자연이 일으키는 사건 그것의 책임은 신이 져야한다. 그러나 역사가 저질러놓은 이 현실의 모든 사고는 인간이 져야만 할 책임이다』. 이어령씨가 쓴 「통금시대의 문학」 가운데 한 대목이다.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크고 작은 전쟁이 꼬리를 물고있다. 나름대로 명분이 있지만 뜻없이 사람만 죽고 다친 것 또한 없지 않다. 1853년 터키와 러시아, 그리고 몇나라가 뒤엉켰던 크림전쟁이 그 본보기다. 전쟁은 2년5개월이나 계속됐지만 의미없는 살상만 되풀이 됐을 뿐이었다. 때문에 뒷날 적십자운동의 계기가 됐다거나, 톨스토이가 종군해 「세바스토폴이야기」를 썼다는데서 겨우 의미를 찾으려는 시각도 있다.
 인생을 더욱 덧없게 하는 것은 군묘지의 묘비들이다. 젊음을 피워보지도 못한 영령들의 묘비는 끝이없어 더욱 안쓰럽다. 이들의 무덤 앞에 서면 한때 서양에서 유행했다는 묘비명이 떠오른다.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있듯이 한때는 나 또한 살아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들리라. 그러니 나의 뒤를 따를 준비를 하라』. 1376년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의 비석에도 인용됐다는 묘비명이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엊그제 첫 서울나들이를 했다. 찾아간 곳은 동작동 현충원. 그는 방문록에 『민족앞에 지은 죄를 씻고서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지금 북한정보에 목마른 온세계가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모두 주시의 대상이다. 벌써부터 의시와 사시를 던지는 사람도 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진실을 털어놓는 것 한가지뿐이다. 그것이 「인간이 저질러놓은 사고에 대한 책임」일 것이다. 첫 나들이길의 충성맹세는 영령들의 죽음을 의미없게 만들지않는 것으로부터 실천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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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4-16 
 
 19세기 중반 미국의 정치권은 뇌물스캔들에 휘말려 있었다. 이른바 크레디트 모빌리어스캔들이었다. 이 무렵 뇌물관행을 지켜보며 일기장속에서나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시민여론을 작품활동으로 정리한 사람가운데 하나가 마크 트웨인이었다. 그는 한 상원의원의 비서로 겨울회기동안 일하면서 의회의 부패상과 주역들의 언행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렇게해서 나온 소설이 「도금시대」였다.그가 찰스워너와 함께 쓴 「도금시대」는 크레디트 모빌리어회사가 주식으로 의회를 매수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스캔들로 상처를 입은 의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뒷날 대통령이 돼 암살당한 제임스 가필드는 죽는 날까지 이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를 괴롭힌 돈은 현역의원시절 받은 329달러. 그는 조사위에 불려나가 증언하느라 죽을 맛이었지만 신문들은 물을 만난 고기같았다. 그러나 그는 일기장에서 조차 자신의 비행을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내 이름도 기사에 났다. 뉴욕 「선」지에 실린 크레디트 모빌리어기사는 사악한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가장 나쁜 경우이다』
 요즘 신문들은 날마다 한보비리 관련기사로 도배를 하다시피하고 있다. 자연히 수많은 상류 지도층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요 며칠사이에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정객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고 있다. 미소까지 지으면서 당당하게 검찰청에 들어서/던 그들이었지만 나올때 모습은 작아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김수희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또 얼마나 많은 의원들이 작아져야 하는가. 움츠린 그들은 갖가지 이유를 둘러대며 말바꾸기에 또 한번 바빠져야 한다. 비극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에서 싹텄다. 돈드는 정치풍토를 개선한다고 말만해놓고 그 속에 안주해온 결과다. 요즈음 검찰에 불려다니는 의원들의 일기장내용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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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4-04

악마보다 더한 비난과 천사보다 결코 덜하지 않는 찬사를 함께 받는 것이 술이다. 동서양과 시대의 고금에 차별없이 호평과 악평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잉거솔이 「술은 범죄의 아비요, 더러운 것의 어미」라고 한것은 마치 「술은 번뇌의 아버지요, 더러운 것들의 어머니」라고한 팔만대장경의 기록을 보는것 같다. 「사람은 체면있는 신사로 술집에 들어갔다가 중죄인으로 술집에서 나온다」는 글롭스의 말이나 법화경에서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경계한 것도 맥이 통한다.의적이 처음으로 곡식으로 술을 빚어 바치자 우 임금이 마셔보고 술잔을 거꾸로 엎으면서 『후세에 반드시 이것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가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의적을 멀리하고 술을 없애라고 했다는 게 「전국책」(전국책)에 실려있다. 전설상 중국의 최고 왕조인 하 왕조의 시조인 우임금은 순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요·순시절엔 아예 술이 없었다는 얘기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인간에겐 사려분별을 기대하지 말라」고 한 키케로의 눈으로 보면 덕치로 평화롭던 요·순시대는 거꾸로 사람다운 사람이 살지않던 시절인 셈이다.
 영국에는 「주신이 군신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거나 「술은 악마의 피」라는 등 술을 악평하는 속담이 풍부하다. 그런 영국이 세계 위스키시장의 황금어장으로 봉노릇을 하는 한국을 향해 시장을 더 개방하라는 것을 보면 술은 역시 신사의 체면을 마비시키는 물건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술 소비가 계속 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최근에는 주부와 청소년 알코올중독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해 9월에 위스키 수입액이 사상최초로 1천억원을 돌파했고 항암효과가 있다는 보도 때문에 적포도주의 수입도 급증하고 있다.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주류업계의 방송광고금지조치를 검토하라고 지시해 「술과의 전쟁」에 나섰다. 절주운동은 우리가 더 급한듯 한데 매일밤 TV화면 가득히 술판이 벌어지고 스튜디오에 칵테일 바까지 등장하니 방송의 술광고금지는 남의 나라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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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4-01

 분·초를 다툴만큼 빠르게 변해가는 요즘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심리학자들은 「파랑새 증후군 환자」라 부른다. 파랑새 증후군은 직장인들이 겪는 대표적인 노이로제 현상가운데 하나다. 감원, 명예퇴직, 인력 재배치, 축소경영 등 어딜가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좌우명을 앞세우는 요즘 세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신경증세다. 이는 경제가 바닥을 헤매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지구적인 현상이기도 하다.이런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일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면서 다른 곳에 희망적인 일이 있을 거라는 환상에 잠긴다. 동화의 주인공인 남매처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파랑새」를 찾아 떠나보고 싶어한다. 심지어 해외에서 그런 파랑새를 찾으려는 명퇴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렇지만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다는 걸 곧 깨닫고 말 것이다.
 「파랑새 증후군환자」와 대조되는 개념은 「프로테우스형 인간」이다. 상황변화에 누구보다 적응이 빠른 능동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프로테우스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바다의 노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신으로 나온다. 포세이돈의 아들이기도 한 프로테우스는 원래 변덕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표상이었다. 예언력을 가진 그는 자신의 예언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필요하면 물·불·야생동물 등으로 자주 모습을 바꿨기 때문에 그런 평을 들은 것같다.
 국내외 기업과 각국 정부가 파괴경영에다 허리띠 졸라매기로 위기탈출계획을 세우는 추세에선 프로테우스형 인간이 되지 않으면 견뎌내기 어려워졌다. 미국에선 사장을 제외하곤 모든 직급을 다 없애는 파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계급파괴에 앞장서고 있는 기업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월트 디즈니사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만큼 내로라하는 곳이다. 국내에서 경제부총리와 1·2위를 다투는 재벌기업들의 부장이상급 간부들이 비행기 좌석 등급낮추기등 구두쇠전략을 선언하고 나선 것 역시 프로테우스형 환경적응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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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1997-03-27 
 
 언어철학의 거장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조차도 뇌물을 준 사실이 있다면 놀랄지 모른다. 독일이 1937년 비트겐슈타인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때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있었다. 당시 빈에 살고 있던 그의 여동생 2명이 나치의 「종족법」으로 재판을 받게 될 처지에 놓였다. 다급해진 그는 독일로 달려가 나치관리와 협상을 벌였다. 곡절 끝에 그는 독일 중앙은행에 돈을 예치하면 여동생들을 다치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스위스은행에 예치된 돈을 찾아 독일관리가 일러준 계좌로 송금, 여동생들이 무사하게 됐음은 물론이다.「공직자와의 뇌물거래는 필요악」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음직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영국의 대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비트겐슈타인과는 반대의 경우다. 뇌물을 받은 죄로 평생동안 쌓아 올린 권위와 명성을 하루 아침에 잃었다. 우리에겐 이름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언으로 더 잘 알려진 그가 거액의 뇌물을 받아 먹었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도 「돈이 힘이다」라는 걸 절감해서 일까. 「추상법관」(秋霜法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청렴하고 정직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대법관시절 자기 연봉의 20배에 달하는 뇌물을 꿀꺽 삼켰다.
 지난 25일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일본 정계의 뇌물수수사건인 「오렌지 스캔들」은 한보사건과 점점 닮아가고 있어 점입가경이다. 엄격히 말해 오렌지 스캔들이 다소 먼저 일어나 한보사건이 이를 뒤쫓고 있는 형국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오렌지 공제조합의 부도가 거센 파문의 발단이 된 점이 우선 흡사하다. 일본의회에서 국정조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치소에 수감중인 한 정치인 피의자가 폭로한 연루자 명단에 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 등 전직 총리 5명을 포함해 여야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두루 망라돼 있어 파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관련자들이 하나같이 『한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왜 내 이름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낸 것 역시 한보사건 연루자들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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