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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미·일 방위협력지침

1997-06-10

주일미군의 유지이유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막는 명분으로 미국은 「병마개 이론」이란 걸 내세웠다. 미국이 병마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언제 또다시 병속에서 솟아 나올지 모른다는 논리가 미국민과 이웃나라들에 적잖은 설득력을 지녀왔다. 미국의 병마개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아시아지역 국가들에는 이제 우려될 만큼 느슨해졌다. 소련과의 냉전을 구실로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묵인해 온 미국이 탈냉전이후 한층 병마개를 헐렁하게 만들었다.오는 9월 최종확정을 앞두고 엊그제 일본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에 사전 설명하는 친절(?)을 베푼 미·일 방위협력지침 중간보고서만 봐도 그렇다. 군사비를 줄여서 좋고 중국도 견제할 수 있어 꿩먹고 알까지 먹게 되는 카드로 생각하는 미국. 미국의 요구를 못이기는 체하면서 받아들여 경제대국에 걸맞은 정치·군사적 영향력 증대를 노리는 일본. 두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탄생하게 될 방위협력지침은 한국과 중국엔 민감하기짝이 없는 「뜨거운 감자」가 되고 남는다. 이미 중국은 강력한 반발을, 한국은 조건부 지지입장을 공식적으로 내보였다. 그러잖아도 일본이 자위대 활동영역을 넓혀 가기위해 헌법개정의 명분만 찾고 있는 때와 맞물려 우리의 염려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으려면 최소한 독일 수준의 신뢰를 쌓은 뒤라야 된다.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서독총리는 이스라엘로 날아가 돌팔매를 맞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죄를 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나치에 희생당한 폴란드인의 영혼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한독일대사관이 한국의 어느 제과업체가 히틀러를 광고모델로 사용한 것에 대해 철회를 요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한국이나 중국인들을 진정으로 감동시킨 장면을 보여준 일본 정치가가 있으면 나서 보라. 감동은커녕 야스쿠니신사나 전범들의 위패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나날이 늘어나고 망언이 끊이지 않는 걸 일본은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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