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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충성 맹세

1997-04-25

 『미아리의 공동묘지는 자연이 인간을 사멸하게 한 것이며, 동작동의 국군묘지는 인간의 역사, 말하자면 인간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자연이 일으키는 사건 그것의 책임은 신이 져야한다. 그러나 역사가 저질러놓은 이 현실의 모든 사고는 인간이 져야만 할 책임이다』. 이어령씨가 쓴 「통금시대의 문학」 가운데 한 대목이다.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크고 작은 전쟁이 꼬리를 물고있다. 나름대로 명분이 있지만 뜻없이 사람만 죽고 다친 것 또한 없지 않다. 1853년 터키와 러시아, 그리고 몇나라가 뒤엉켰던 크림전쟁이 그 본보기다. 전쟁은 2년5개월이나 계속됐지만 의미없는 살상만 되풀이 됐을 뿐이었다. 때문에 뒷날 적십자운동의 계기가 됐다거나, 톨스토이가 종군해 「세바스토폴이야기」를 썼다는데서 겨우 의미를 찾으려는 시각도 있다.
 인생을 더욱 덧없게 하는 것은 군묘지의 묘비들이다. 젊음을 피워보지도 못한 영령들의 묘비는 끝이없어 더욱 안쓰럽다. 이들의 무덤 앞에 서면 한때 서양에서 유행했다는 묘비명이 떠오른다.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있듯이 한때는 나 또한 살아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들리라. 그러니 나의 뒤를 따를 준비를 하라』. 1376년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의 비석에도 인용됐다는 묘비명이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엊그제 첫 서울나들이를 했다. 찾아간 곳은 동작동 현충원. 그는 방문록에 『민족앞에 지은 죄를 씻고서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지금 북한정보에 목마른 온세계가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모두 주시의 대상이다. 벌써부터 의시와 사시를 던지는 사람도 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진실을 털어놓는 것 한가지뿐이다. 그것이 「인간이 저질러놓은 사고에 대한 책임」일 것이다. 첫 나들이길의 충성맹세는 영령들의 죽음을 의미없게 만들지않는 것으로부터 실천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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