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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입력 : 2008-11-07 17:25:23수정 : 2008-11-07 17:25:32

결혼 이주민이나 외국인이 ‘다르다’와 ‘틀리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구별하지 않고 쓸 정도가 되면 “한국사람이 다 됐다”고 한다. 이방인들이 한국생활에서 처음 마주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다른 사람’이 아닌 ‘틀린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르다’와 ‘틀리다’가 혼용되는 까닭을 ‘다르다’는 것이 오류인 것처럼 사회적으로 인식되거나 개개인의 심층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머리로는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아서다.

또 다른 가설은 ‘틀리다’와 ‘다르다’를 별 구분 없이 사용하는 일본어가 일제시대를 관통해온 한국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다. 국어학자들이 입증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일본어에서는 ‘다르다’(ちがう)라는 말에 한 글자만 붙여주면 ‘틀리다’(まちがう)라는 말이 되며 혼동될 소지가 적지 않다. 일본어 사전에는 ‘ちがう’에는 ‘다르다’라는 의미와 함께 ‘틀리다’라는 뜻까지 포함돼 있고, 실생활에서도 ‘틀리다’와 ‘다르다’를 크게 구별하지 않고 ‘ちがう’를 쓴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혼용은 은연중의 행동에서 ‘차이’와 ‘차별’을 구별짓지 못하는 경향을 낳기 십상이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를 비롯한 여러 분야 전문가 8명이 함께 쓴 <다름의 아름다움>(고즈윈)에서는 ‘다름=틀림의 등식’이 뿌리깊은 우리 사회의 한계를 타파하는 작은 열쇠라도 될 만한 슬기가 풍겨 나온다. 다원성의 중요성, 공존과 상생의 지혜가 담긴 이야기가 때로는 잔잔하게, 때론 파도처럼 다가온다.

각광받는 심리학자인 황상민 연세대 교수는 한국인들이 다름을 불편하게 여기고 서로 같아야 한다는 강박증을 지니고 산다는 미국 정치학자의 현장 연구를 바탕삼아 우리 사회의 심리적 질곡을 짚어낸다. 성공에 대한 욕망이 모든 사람들을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에서 ‘다름’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그의 통찰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은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함으로써 배타적이고 교조적으로 변하는 세태를 비튼다. 그는 다양성은 개방, 열림이며 포용이고 어울림이어서 좋은 말이지만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체험담을 들려준다.

임상심리학자인 정승아 한양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기본적으로 불안감에서 오는 것이며, 불안이 커지면 서로 의지해 공동으로 방어하고 적에 대항할 수 있는 같은 편을 찾거나 만들게 된다고 진단했다.

주 교수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만남에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고유 문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서글픈 역사를 담백하면서도 교훈적으로 그렸다. 자연계의 다른 존재들과 조화를 이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디언들의 ‘피마다지윈’한 삶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소크라테스가 있고, 미켈란젤로가 있으며, 셰익스피어가 있었을 것이지만 유럽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세계의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었다고 탄식한다.

장애인, 여성, 이주 노동자, 성적 소수자, 극빈자 같은 사회적 소수 그룹이 겪는 다름의 신산고초는 왜 그리도 잦고 지독한지? 노출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텐데도 말이다. 결혼 이민자 자녀들이 적응에 실패해 어머니의 모국에서 양육되는 사례가 빈발한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는 것도 다름에 대한 경직성의 부산물이어서 우울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의 이야기는 무조건 ‘틀리다’고 재단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또 어떤가. 오랫동안 ‘차이’를 ‘차별’로 반응하던 미국인들이 선거혁명을 통해 수백 년 묵은 ‘다름의 장벽’을 무너뜨린 아름다운 모습이 잠시나마 부럽게 느껴진 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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