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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한옥, 다시 사랑받을까

입력 : 2008-11-21 17:42:41수정 : 2008-11-21 17:42:43


어언 40년째 한옥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는 이론적으로 완전 무장한 한옥 전도사다. 서울 동소문동의 80년 넘은 전통 한옥에서만 35년째 산다. 그는 1968년 평화봉사단원으로 강릉의 조선시대 고택 선교장(船橋莊)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한옥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한국에 눌러앉은 것도 한옥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통 한옥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자연 속에 녹아 든 전통미와 사방이 열려 있는 동양적 여백미를 갖춘 예술품이다. 그의 한옥예찬은 비교건축론으로 기를 죽인다.

“중국 전통 건축물은 ‘나는 이렇게 부자고 힘이 세다’는 오만한 느낌을 준다. 일본 전통 건축물은 너무 깔끔해서 정이 가지 않는다. 이에 비해 한옥은 부드러운 곡선이 ‘어서 오세요’ 하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듯한 포근함이 감지된다. 그래서 한옥을 고려청자만큼, 유럽의 모나리자 그림만큼 중요한 보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한국의 혼’ 같은 한옥을 헐어버리고 아파트를 지은 뒤 ‘돈 벌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불이 난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애지중지하는 한옥을 떠나야 할 위기여서 한결 그렇다.

한편에서는 이처럼 한옥을 푸대접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옥 열풍이 뜨거워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울 북촌이나 전주의 한옥마을 같은 곳을 찾는 이가 몰라보게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집값도 크게 올랐다는 풍문도 있다. 서울대에 ‘한옥 짓기’ 강좌가 이번 학기에 처음 개설된 것도 같은 흐름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이것도 한옥의 복권이라 해야 할까. 덩달아 한옥에 관한 책도 어느새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가 나올 정도가 됐다.

한옥을 사랑하고 한옥 지킴이를 자처하는 ‘새로운 한옥을 위한 건축인 모임’이 펴낸 <한옥에 살어리랏다>(돌베개)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한옥의 멋스러움과 현대적 거주 공간으로서의 장점을 소담스레 얘기하듯 들려준다.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에서부터 제주도의 전통 초가에 이르기까지 27채의 한옥이 등장한다. 국내 유일의 한옥 동청사인 서울 혜화동사무소, 치과병원으로 정겹게 활용되는 한옥 등 300여 컷의 컬러 사진과 100여 컷의 도면까지 보태져 살갑게 ‘보며 읽을’ 수 있는 실용서이기도 하다.

한옥을 ‘여유가 있는 집’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집’ ‘비울수록 채워지고 나눌수록 커지는 집’이라고 한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정의가 그윽하다. 서울 강남에서 살다가 능소헌과 청송재로 이사와 십수 년째 살고 있는 풍경사진가 조향순씨의 글 가운데 한 대목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아이가 초등학생 시절 ‘우리 집’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도화지에 네모반듯한 아파트를 그렸다. 그것만으로는 구별하기 힘들겠다고 판단했는지 아이는 그림 옆에 ‘00아파트 00동 00호’라고 써놓았다.” 조씨에게 한옥은 자식들을 건전한 사고와 관용을 갖춘 자유인으로 키우기에 적당한 집이다.

한옥이 어떻게 변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해답을 준다.

우리네 주거공간 가운데 아파트 비중이 전체 주택의 60%에 육박하고, 남은 한옥 가운데 50%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옥’이란 낱말이 새우리말큰사전에 처음으로 등재된 게 1975년이라니 사라져감에 대한 안타까움의 산물이 아닌가.

<아파트 공화국>이란 책을 펴낸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얼마 전 잠깐 화제가 됐던 기억을 되살리면 뜨끔하다. 줄레조 왈. “서울은 아파트 때문에 하루살이 도시다.” 이렇게 일갈한 외국인도 봤다. “유럽 국가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복원하겠다고 나서는데 한국은 멀쩡한 과거 유산을 재개발 명목으로 없애고 있네.” 하긴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한옥 예찬론을 들먹이고 있으니 이 또한 역설이 아니고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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