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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악은 과연 평범할까

 입력 : 2008-10-24 17:37:55수정 : 2008-10-24 17:38:09

경악할 만한 범죄 사건을 접할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다. 지난 20일 새로운 한 주일의 출근 무렵 서울 논현동 고시원에서 불을 지르고 흉기를 마구 휘둘러 무고한 6명을 살해한 정 모씨의 끔찍한 범행도 예외는 아니다. 구속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잘못했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되풀이한 정씨의 순간적 모습은 악한과 거리가 멀어보였다. 최근 암으로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에게 쾌유를 기원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씨에게서도 흡사한 느낌을 받는다.

아렌트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성격 파탄자이거나 정신 이상자도 아닌 너무도 멀쩡하고 평범한 사람임에 놀라 논쟁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유명한 용어를 창안해냈다. 아렌트에게 대중적인 명성을 안겨준 것은 ‘악의 평범성’이란 한 마디 때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아이히만이 괴물이기를 바랐던 수많은 기자들이 지루한 재판정 풍경에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고 떠나버렸을 때 끝까지 자리를 지킨 아렌트가 건져낸 월척이었다.

아렌트가 이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쓴 것은 본문에서 단 한번뿐이다. 그것도 마지막 문장에서.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세계의 지식인들은 이 한 마디를 놓고 수많은 논쟁을 벌였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아렌트가 지켜본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장교이면서도 유대인 여성을 정부로 둘 만큼 유대인 혐오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친구의 권유에 마지못해 나치 친위대에 합류했을 뿐이다.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음은 물론 나치의 정강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아이히만이 상부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라 일말의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 낯 두꺼움에 고개가 끄덕여질 뿐이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그와 같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도착자나 사디스트가 아니었으며, 무섭고도 두려울 정도로 정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데 있다.” “악한 일은 대부분 (사악함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

이렇듯 모든 악행은 인간의 악마적 속성이 아니라 사고력의 결여에서 나온다는 게 아렌트의 생각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뭉쳐진 기계적인 인간이었을 따름이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관해 경영학의 대부였던 피터 드러커가 자서전에서 조금 다른 견해를 내놓았던 게 인상적이다. “이는 아주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악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악행을 하는 사람이 평범할 뿐이다. 아렌트는 스스로 ‘위대한 죄인’이라는 낭만적인 환상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많은 이아고(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악한), 엄청난 죄를 짓는 평범한 사람들, 약간의 맥베스 부인(맥베스의 여주인공으로 권력욕이 강한 여인)이 있다. 사탄을 ‘어둠의 왕자’라 부르는 관용어구가 아렌트의 표현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악은 결코 평범하지 않지만 인간은 평범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인간은 어떤 조건으로든 악과 흥정해서는 안 된다. 그 조건은 언제나 악의 조건이지 인간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렌트와 드러커, 누구 손을 들어줘야 할까. 정답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가슴 속에 숨어있는 아이히만을 찾아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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