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여행하다보면 한국인이 잘 찾지 않는 곳에도 일본인들은 빼놓지 않고 몰려오는 모습을 어렵잖게 발견한다. 직접 마주치지 않더라도 그들이 대거 다녀간 흔적은 어딜 가나 방명록에 빼곡하다. 예외가 하나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참혹하게 학살한 현장인 아우슈비츠(폴란드 이름 오시비엥침) 수용소가 그곳이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며 전율했을 만큼 그곳은 홀로코스트(대학살)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신이 있다면 어찌 이런 만행을 그대로 두고 보았단 말인가 하는 회의감으로 말미암아 신학자들조차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정도다.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 근교에 자리한 이 역사의 현장을 가장 많이 찾는 이들은 피해자의 하나인 폴란드 국민이다. 모든 폴란드 학생은 의무적으로 이곳을 둘러보고 아픈 역사를 되새긴다. 두 번째로 많은 방문자는 가해자인 독일 국민이다. 의무사항이 아닌데도 그렇다. 이와는 달리 일본인 방문자수는 한국인과도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 역사의 현장을 견학했을 때 그곳 안내원이 들려준 얘기다.

                                                                                               


   아우슈비츠는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을 만큼 유명한 ‘안네의 일기’와 직접적인 연관을 지녔다. 일기의 주인공인 안네 프랑크의 가족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다른 유대인 1천여 명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안네의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는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됐다. 안네와 언니 마르고트는 다시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졌다가 굶주림과 병마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딸의 일기를 묶어 펴낸 책 ‘안네의 일기’는 나치의 만행과 전쟁의 공포를 고발하는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주 일본 도쿄 공립 도서관 수십 곳에 비치된 ‘안네의 일기’가 일제히 파손된 사실이 드러났다는 소식은 일본의 우경화가 심상치 않음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고의적으로 훼손한 책은 ‘안네의 일기’뿐만 아니라 안네 프랑크 전기를 비롯해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책 수백 권에 이른다고 한다. 국제 유대인 인권단체 사이먼 위젠털 센터는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150만 유대인 어린이들을 모독하는 조직적인 범죄’라고 경고했다.

                                                                                              

                            일본 도쿄 신주쿠도서관에서 최근 찢어진 채로 발견된 <안네의 일기>와관련 책자들.

                            이 도서관에서는 관련 서적 31권훼손됐다. 도쿄=AP=연합뉴스


 
   이를 사소한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일본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격의 책 테러다. 여기에다 “유대인 학살은 날조”라는 구호가 함께 등장했다는 점이다. 가해자인 독일이 유대인 학살 만행을 깊이 뉘우치고 사과와 반성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데도 제3자인 일본인이 날조라고 주장하는 일은 어이 없는 노릇이다. ‘안네의 일기’ 내용이 거짓이라는 칼럼을 썼던 스위스 극우파 청년이 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유럽에서는 나치를 두둔하는 일이 금기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전 세계에 타전한 AFP 통신은 아베 신조 총리의 잇단 과격 언동으로 한국, 중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우경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이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올해 탄생 125주년인 히틀러의 생일(4월20일) 파티를 성대히 열자는 움직임까지 일본 극우파들 사이에서 일고 있다는 점은 한층 우려스럽다.


   아베 정권이 가속 페달을 밟는 과거사 부정은 이런 사회 분위기에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다. 한국 정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주말 시마네 현에서 열린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기념식에 중앙정부 고위 관계자 파견을 강행하고,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훼손하려는 시도는 불길한 전조다. 


   역사의 물길을 거꾸로 돌리려는 일본의 언동을 꺾고 동아시아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의 현명한 압박이 절실해졌다. 무엇보다 일본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국가인 미국의 판단이 매우 긴요하다. 독일의 긍정적인 변화도 자발적인 형태를 띠었지만, 실제로는 주변국들의 끊임없는 압박이 낳은 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노려 일본을 계속 싸고돌기만 하면 자신들의 목표도 달성하기 어렵다.

                                                                      이 칼럼은 내일신문 2월24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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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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