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에서 “(퇴근 후) 보고서 보는 시간이 제일 많다”고 한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청나라 옹정 황제였다. 옹정제야말로 ‘보고서 통치의 대명사’다. 옹정은 밥 먹을 때조차 보고서를 곁에 둘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민심과 비밀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모든 지방 관리들로부터 ‘주접’(奏摺)이라 일컫는 민정 보고서(상주문·上奏文)를 받았다. 보고서는 하루 평균 20∼30건, 많게는 60∼70건에 이르렀다. 하루에 8만자를 읽고 8천자씩 업무지시를 한 셈이다.

 

  옹정제는 이 보고서를 읽고 답글을 쓰는 데 밤 시간을 거의 다 보냈다. 제위 13년 내내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하루 20시간 한결같이 일하면서 초인적인 정력을 과시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옹정은 자신의 의견이나 지시사항, 비평 같은 것을 일일이 직접 써서 보고서를 올린 관리에게 다시 보냈다. 이 답글은 황제만이 쓰는 붉은 먹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주비’(朱批)라고 불렀다.

 

  주접은 옹정제가 관료집단을 장악하는 독특한 통치술이기도 하다. 현장 실상 파악이 목적이었지만, 관료들의 붕당(朋黨)을 막고 군주독재체제 강화 수단으로 훨씬 많이 이용됐다. 옹정은 박 대통령을 뛰어넘는 일인통치주의자였다. 그는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이다. 이 한 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기둥에 써붙여 놓고 실천한 통치자였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이라는 말은 옹정에게 가장 적절한 사자성어다.

                                                                  

                                                       <옹정제 초상화>

 

  옹정제는 하루만 쉬어도 일이 밀리기 때문에 베이징 밖으로 나가볼 여유조차 없었다. 옹정제의 전기를 쓴 일본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야말로 세계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라고 평한다. 드넓은 천하의 모든 일을 황제 혼자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방식은 옹정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과로 탓에 13년의 재위기간으로 만족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것도 지나치게 성실한 결과다.

 

   박 대통령도 회견에서 “1초가 아깝다”고 했다. “엄중한 국정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취미 따로 국정 일 따로 하기엔 시간이 없다. 자나 깨나 국민들 생각이고 그곳에서 보람을 느낀다. 적어도 나는 그런 식으로 국정에 임하고 있다.”

 

  옹정제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아버지 강희제가 이룩한 강성대국의 초석을 허물어뜨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박 대통령 역시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위업 잇기에 지나치리만큼 집착하는 듯하다.

 

   옹정은 한족 불만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문자옥’(文字獄)이라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동원했다. 문자옥은 황제의 이름에 들어간 한자를 쓰거나 황제가 싫어하는 글자를 사용했다는 죄목을 씌워 관직을 삭탈하거나 비판적 지식인을 사형까지 시키는 황제의 무자비한 전횡이다. 옹정 때는 한족에 대한 사상탄압이 절정에 달한 시기다. 박 대통령이 비판세력을 소통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는 자세도 이와 흡사하다.

                                                           

                                                <옹정제가 주비한 보고서(상주문)>

 

   옹정의 독재는 수많은 후유증을 낳았다. 그의 일인독재 개혁 드라이브도 뿌리 깊은 관료제의 병폐를 끝내 해결하지는 못했다. 시스템을 온존시킨 채 일인 통치에 매달린 필연적인 귀착이었다. 옹정제의 통치방식은 ‘선의에 찬 악의의 독재’라고 불린다. 강력한 독재체제에 익숙해진 중국 민중은 독재체제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길들여졌다. 우리나라의 보수 노년층이 유신시대를 그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의든 아니든, 옹정의 통치행태를 본보기로 삼는 것은 복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글로벌 정보사회에는 걸맞지 않다. 대통령이 최적의 인물을 발탁하고 실질적 권한을 과감하게 위임하는 것만이 창조적 정치·경제로 나가는 길이다. 장관들과 여당 수뇌부가 대통령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는 만기친람은 불통의 주요원인 가운데 하나다. 능력과 리더십이 떨어지는 각료들을 그대로 앉혀 놓고 과거 회귀형 국정운영을 고집하는 바람에 미래를 내다보는 여권 내부인사들과 보수진영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퇴임 후 어떤 분위기일지 옹정제라는 거울에 비춰 보면 좋겠다.

 

***주접(奏摺)제도--황제가 지방 관료들에게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한 사적인 상주문이다. 일종의 비밀 직보제도다. 청나라 강희제가 도입한 이후 그의 아들 옹정제가 가장 활발하게 이용했다. 이 비밀통신체계는 관료들의 태만을 감시하고 민심을 정확히 읽는 효과를 노렸다. 여기에는 정치·군사적 상황에 관한 정보 보고나 정책 건의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옹정제의 답글은 훗날 ‘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라는 책으로도 발간됐다.

 조선시대 정조 대왕이 비밀편지를 활용해 각 정파를 관리하고 정국을 이끌어 나간 방식은 청나라의 주접제도와 흡사하다.

                                                            

                                               <옹정제가 강학하는 모습 그림>

 

***문자옥(文字獄)--만주족 출신인 청나라 통치자들은 명나라 문인들에게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청나라에 복종하는 문인들에게는 안무의 방법을, 불복하는 문인들에게는 진압의 방법을 썼다. 강희제가 즉위한 이듬해 절강 호주의 문인 장정용이 개인적으로 문인들을 모아 ‘명사’(明史)를 편찬했다. 장정용이 죽은 뒤에 어느 관리가 그 책에 청나라 통치자들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다고 고발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장정용의 관을 파헤치고 육시(戮屍)를 했으며, 그의 아들과 서언을 쓴 사람, 책을 찍은 사람과 책을 판 사람, 심지어는 그곳의 관리까지 모두 70여 명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런 사건은 글로 인해 빚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문자옥(文字獄)’이라고 불렀다.

 옹정제 대에는 문자옥이 더욱 심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여유량(呂留良) 사건이다. 여유량은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학자이다. 명나라가 망한 후 반청 투쟁에 가담했으나 결국 실패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글을 가르쳤다. 그런데 어떤 관리가 자꾸 벼슬을 하라고 천거하자 아예 절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후 절에 들어가 책을 썼는데 당연히 청나라 통치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책은 여유량의 사후에도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증정(曾靜)이라는 호남 사람이 우연히 여유량의 글을 읽고는 그의 학식에 탄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자인 장희(張熙)에게 여유량의 고향 절강에 가서 그가 남겨둔 문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오도록 했다. 절강에 이른 장희는 문고의 행적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여유량의 제자 둘도 찾게 되었다. 장희는 제자들을 증정에게 소개했으며, 그들 네 사람은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가 청나라 통치에 이르자 모두들 분개하여 청나라를 비판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청나라 왕조를 뒤엎을 방법까지 논의했다.

 그러나 몇몇 서생의 힘으로는 대사를 이룰 수 없었다. 증정은 막강한 병권을 쥔 섬서·감숙의 총독이자 한족 대신인 악종기(岳鐘琪)를 설득하면 대사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희에게 편지를 주어 악종기에게 보냈다. 악종기가 편지를 뜯어보니 함께 청나라에 대항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악종기는 속으로 대단히 놀랐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장희를 돌려보냈다. 그 후에 이 사실을 조정에 고발하자, 진노한 옹정제는 즉시 그 서생들을 북경으로 잡아 올려 엄히 문초를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여유량 가문까지 연루가 되고 말았다. 옹정제는 여유량의 무덤을 파헤치고 목을 잘랐으며,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 여유량의 후대와 두 제자들을 멸문(滅門)시켰다. 이외에도 여유량을 존경하고 따르던 적지 않은 서생들이 머나먼 변방으로 귀양을 갔다.

 ‘문자옥’에는 여유량의 경우처럼 조정에 대항한 사건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경우는 억지로 덮어씌우거나 글자 때문에 생겨난 사건이었다.

 건륭제 시대에 들어서면 탄압은 더욱더 가혹해져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집도, 그 목적의 일단은 내용의 검열에 있었다고 하며,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금서로 전부 훼손된 것도 수천 부에 달하고, 일부분을 뽑아내어 태워진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중국인민정치현상회 산하의 역사·문화학자들이 오천 년 중국사를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쓴 책 <중국상하오천년사>에서 인용)

 

***강건성세(康乾盛世)--청나라의 강희, 옹정, 건륭 세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이어진 태평성세의 시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일컫는다. 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최고통치자인 황제들의 역량 측면에서 가장 우수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한 무제나 당 태종과 같이 왕조마다 특출난 황제는 있었지만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세 황제의 133년 동안의 재위기간(1662~1795)만큼 번영과 국운상승이 장기간 유지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세 황제 가운데서도 각각 60년간 황제의 자리를 지켰던 강희제(재위 1662~1722)와 그의 손자인 건륭제(재위 1735~1795)에 비하면 중간에 위치한 옹정제(재위 1722~1735)는 재위기간도 13년밖에 안되는데다 두 황제의 화려한 업적에 가려졌다.

 

                                                                 이 글은 내일신문 1월13일자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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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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