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 세계에선 일인자가 주먹 자랑하는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다. ‘스트롱맨’ 지도자들이 유달리 활개를 치는 지구촌의 흐름 속에서 그런 현상이 도드라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폴란드 집권여당 대표 등이 최근 스트롱맨 클럽에 가입한 지도자로 꼽힌다.


 스트롱맨 중의 스트롱맨인 트럼프 대통령은 요즘 연이어 다른 스트롱맨들 손보기에 나섰다. 세계 일인자를 노리는 중국의 ‘시황제’ 시진핑 주석에게 잇달아 강펀치를 날린 데 이어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의 손목을 비틀고 있는 게 돌올하게 보인다.

 

  트럼프는 지난 주말(10일) 정치적 무기인 트위터로 공격을 시작했다. 터키산 알루미늄에 20퍼센트, 철강은 50퍼센트로 관세를 올리겠다고 했다. 새 관세율은 현재의 2배 수준이어서 엄청난 파장이 예상된다. 그러자 리라 가치는 하루 만에 최고 24퍼센트까지 폭락했다. 터키발 ‘검은 금요일’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유럽과 미국 증시까지 흔들렸다.

                                                                                        


 에르도안 정부가 미국인 목사 앤드루 브런슨을 간첩활동·테러조직 지원 혐의로 장기 구금하고 시리아·이란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자, 트럼프는 경제 보복으로 응수했다. 경제 보복이 가장 실효적이고 현실적인 제재수단임을 알아챈 것이다.

 

  트럼프가 자국민 한사람 때문에 군사 동맹인 터키에 이처럼 강하게 대응한 것은 11월 중간선거가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브런슨 목사가 소속한 복음주의 교단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다. 트럼프는 이번 제재가 “빙산의 일각”이라면서 브런슨이 풀려나지 않으면 추가 제재를 포함해 보다 강경한 조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15년간의 장기 집권에 이어 지난 6월 대선 승리로 ‘21세기 술탄’으로 등극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단 강경하게 맞섰다. 그는 “미국에게 달러가 있다면 우리에겐 알라가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에르도안이 터키 국민에게는 “베개 밑에 달러나 유로, 금이 있다면 은행에 가서 리라로 바꾸라”고 헌신을 호소했다. 하지만 미국의 실력 행사에 버티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는 중국을 겨냥해서는 무역전쟁에 이어 첨단산업 방어전에 나섰다. 첨단기술 분야에서 최대 경쟁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첨단산업 육성 정책 ‘제조 2025’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이는 중국의 불법적인 기술 빼가기와 지적재산권 침해를 줄기차게 비판하며 중국에 대한 제재를 가속화하는 과정의 하나다. 미국 정부는 로봇, 항공, 첨단 제조업 분야를 연구하는 중국인 유학생의 비자 유효기간을 1년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5년으로 확대한 유효기간을 다시 1년으로 되돌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비공개 만찬에서 “(중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학생들은 거의 모두 간첩”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트럼프는 ‘현대판 차르’로 불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대 러시아 신규 제재를 결정했다. 지난 3월 발생한 전직 이중첩보원 독살 시도 사건에 대한 대응 차원이다. 국내 정치적 의도가 강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지만, 또다시 루블화가 직격탄을 맞았다. 달러 대비 루블화 가치는 20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러시아 증시도 하락세를 드러냈다.


 트럼프에게 가장 고분고분한 게 아베 일본 총리이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일본에 불리한 정책을 고수 중이다. 트럼프는 ‘필리핀 트럼프’로 불리는 두테르테 대통령과는 궁합이 잘 맞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제재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강공책이 먹혀들자 재미를 붙인 듯하다. 일련의 힘자랑은 트럼프가 정치·외교적 목적을 위해 경제적 수단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 극단적 사례에 속한다.

 트럼프의 ‘힘의 외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찮다. 미국 시사 잡지 애틀랜틱은 “미국이 요즘 제재에 중독돼 있다. 제재가 지금처럼 계속 이어질 경우 앞으로는 제재 효과가 반감될 수 있고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위태롭게 해서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교훈은 고금의 진리다. <뉴욕 주 이타카에서>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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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최초의 무역전쟁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었다. 훗날 ‘보스턴 티파티’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이 붙은 차 사건은 식민지 종주국 영국에 대한 관세저항으로 나타난, 첫 무역전쟁이나 다름없다. 국가 재정의 중추 가운데 하나이던 동인도회사의 경영난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1765년과 1767년 잇달아 새 관세조치인 ‘차(Tea) 조례’를 선포했다. 의회 대표가 없는 식민지에도 과세하기로 한 인지세법과 타운젠드법이 그것이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차는 비싼데다 섬유, 공산품 다음으로 많은 수입품이었다.


 ‘차 조례’를 악법으로 규정한 미국인들은 광범위한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773년 12월16일 저녁 보스턴 항구에서 한 무리 청년들이 떠들썩한 파티를 열고 과일주를 엄청나게 마셔댔다. 이들은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 복장을 하고 있었다. 취기가 돌자 부두에 정박 중이던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역선 세 척에 뛰어올라 340여 개에 이르는 차 상자를 모조리 바다에 던져버렸다. 영국정부가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자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첫 무역전쟁으로 독립국가를 세운 미국은 세계 1위 자리가 위협받자 무력전쟁이 아닌 무역전쟁으로 수성하려는 의중을 드러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벌이는 중국과의 무역전쟁은 대규모 통상마찰을 넘어서는 세계 패권경쟁 차원으로 고조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트럼프의 막무가내 스타일로 보이지만, 정부 차원의 치밀한 계산 아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주말 (20일)중국산 제품 5000억 달러 전체에 관세를 부과할 준비가 돼 있다고 공언했다. 5000억 달러라면 지난해 미국이 수입한 중국산 제품 총액이다. 끝장을 보겠다는 무시무시한 발상이다. 트럼프는 242번째 독립기념일 이틀 뒤인 지난 6일 340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제품에 대해 25퍼센트 관세 폭탄을 퍼부었다. 나흘 뒤인 10일에는 20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10퍼센트의 추가 관세 부과 절차에 들어갔다.


 전쟁은 어느 한쪽이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기기 힘들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유소작위(有所作爲), 화평굴기(和平?起)를 넘어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를 표방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맞대응에 나서 모두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미국이 중국의 보복을 각오하고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손실보다 이익이 크다는 자체 분석을 끝냈다는 뜻이다. 우선 수출액의 단순 비교에서 중국의 타격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지난해 중국의 대미 상품수지 흑자는 무려 3700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중국 수출총액이 1300억 달러에 불과해 피해규모가 중국의 4분의 1수준이다. 중국의 일자리 가운데 대미수출을 통해 발생한 비율은 70대 1인 반면, 중국 수출에 의존하는 미국 일자리 비율은 140대 1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수출의존도가 큰 중국경제는 미국에 비해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경제의 기초 체력에서도 미국이 우위에 있다. 미국 경제는 호황이 지속되면서 각종 경제지표에 청신호가 켜졌다. 올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2분기까지 3.7퍼센트를 웃돌 것으로 추계된다. 완전고용에 가까운 낮은 실업률과 기업경기 확대도 무역전쟁으로부터 미국을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무역전쟁의 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반면에 중국은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6.7퍼센트여서 4분기 만에 둔화된 것으로 집계됐다.


 미·중 무역전쟁에도 미국 증시는 비교적 평온한 편이지만, 중국 증시는 불안정하다. 중국에게 대규모 미국 국채 매도라는 무기가 있으나 미국의 무제한적인 통화 발행권을 감안하면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전망도 나온다.


 두 나라의 무역전쟁이 장기화하면 미국도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견해가 많긴 하다. 이 때문에 미국내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신흥강자 중국을 따돌리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겠다는 트럼프의 결의는 중국과 통화전쟁까지 내비치는 데서도 분명히 엿보인다. 문제는 한국, 일본, 유럽연합 같은 전통적 동맹국에 유탄이 날아오고 있어서다. 무역전쟁에서는 대부분 패자만 존재한다는 역사적 교훈은 다른 목표를 지닌 트럼프의 미국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는 듯하다. <보스턴에서>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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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을 가장 잘 지켜야할 사람이 위법·불법 행위를 많이 하는, 이상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법은 만든 사람이 더 잘 지켜야한다. 한국은 정반대다. 법을 지키지 않아도 벌을 잘 받지 않는 게 법을 만든 국회의원이다. 그 덕분에 ‘방탄국회’란 희한한 말까지 생겨났다. 범법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을 체포하거나 구속을 막는 불체포특권까지 누리기 때문이다.


 국회는 가장 기본적인 국회법부터 상습적으로 위반하고 있다. 기초적인 임무인 원 구성 시한을 정한 국회법을 단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20대 국회 후반기를 벌써 시작했어야 하지만, 국회의장조차 없어 놀면서 월급(세비)은 꼬박꼬박 챙기는 중이다.

 

  지난 5월 29일로 20대 국회 전반기는 끝났다. 후반기 국회의장단 선출은 전반기 의장단 임기만료일 전 5일에 해야 한다. 이런 국회법을 지키려면 5월 24일까지는 끝냈어야 했다. 18개 상임위원장은 전반기 임기만료일까지 선출해야 한다. 6·13 지방선거를 핑계로 방치했다. 국회의 직무유기다.

                                                                                        


 국회를 기다리고 있는 현안은 산적하다. 민갑룡 경찰청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안, 각종 민생법안 처리가 밀려 있다. 17일까지 원내교섭단체가 합의를 이뤄내지 못하면, 뜻깊은 70주년 제헌절 경축식을 국회의장 없이 치러야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1994년 국회법 개정 이후 지금까지 제때 국회의장이 뽑힌 것은 19대 국회 후반기인 2014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나마 상임위원장까지 원 구성을 마무리하기까지는 한 달 가까이 더 걸렸다.


 지금의 국회 지도부 공백사태는 여야 4개 원내교섭단체별로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 배분을 놓고 입장과 요구가 크게 달라 초래된 일이다. 자신들의 감투싸움일 뿐 유권자와는 상관없다. 스스로 만든 법을 어겨도 무감각해지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다.

 

  마냥 늦춰도 제재할 방법이 없으니, 허울뿐인 국회법이다. 늦춘 만큼 불이익이 돌아가게 해야 법이 지켜진다. 세비 반납이 방법의 하나이지만, 벌칙조항을 국회법에 넣는 것도 의원들 몫이어서 제 밥그릇을 차버릴 리 만무하다. 밥그릇 챙기기에 국회를 따를 곳이 없다는 악명이 자자하니 말이다.

 국회법 위반 사례는 열거하기도 어렵다. 한 시민단체의 조사결과를 보면 국회의원들은 국회법 6개 조항을 상시로 위반한다. 소속 정당의 의사에 따르지 않고 투표하도록 한 조항은 당론 투표에 익숙한 국회의원들에게는 아예 의미가 없어졌다. 국회의원의 상임위원회 규정도 상시 위반 대상이다. 국회법은 상임위원의 임기를 2년으로 정하고, 회기가 시작된 뒤 30일 이내에 상임위 이동을 금지했지만, 한때 연평균 250건의 불법 이동이 있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상임위 소위원회 회의 내용을 비공개하기로 의결하지 않는 한 공개하도록 한 조항도 거의 지키지 않는다. 자신들의 언행이 공개되는 걸 꺼려 소위원회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수시로 비공개 회의를 진행한다. 국회 내 모든 회의는 회의록을 작성하도록 한 조항도 수없이 위반한다. 다양하게 규제하고 있는 국회의원의 품위조항도 언론 보도로 드러났듯이 있으나마나하다. 국회 출석 의무, 회의장 내 질서문란행위 금지, 타인 모욕·사생활에 대한 발언 금지, 발언방해 금지, 회의진행 방해물건 반입 금지, 겸직내용 신고, 소관 상임위원 직무 관련 영리행위 금지가 대표적이다. 국회 안에 윤리위원회가 있으나 장식용에 불과하다.


 예산·결산안 처리 위반은 상습행위로 손꼽히는 종목의 하나다. 국회가 예산안을 12월 2일까지 처리해야 한다고 헌법에 명시돼 있으나 국회는 번번이 기한을 넘긴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늘 어겨왔다. 여야의 극한 대립 때문이었다. 강제조항이 필요하다. 예산안 처리 지연은 중앙정부의 예산 공고, 집행계획 수립, 분기별 배정계획 같은 집행 준비에 차질을 빚기 때문에 상당한 부작용과 비효율을 낳는다.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드러난 여야 실세 의원들의 쪽지예산 행태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쪽지예산’ 부탁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김영란법) 위반임에도 그렇다.


 국정감사도 기간을 지키지 않는 사례도 다반사다. 헌법 61조와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기국회 집회일 이전에 감사 시작일부터 30일 이내의 기간을 정해 감사를 실시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어길 때가 잦다. 고위공직자 임명동의안 처리 시한(제출한 날로부터 20일 이내) 역시 무시하기 일쑤다. 인사청문 시한이 인사청문회법에 규정돼 있으나 수시로 어긴다. 총선 선거구 획정안도 법정 시한을 지킨 적이 거의 없다. 이를 어겼을 때 제재 장치나 처벌조항을 넣지 않은 것은 입법권을 지닌 국회의원들의 낮은 준법정신 때문이다.


 정치자금법 위반, 선거법 위반처럼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이 걸린 일까지도 몰래 어기는 국회의원들 역시 적지 않다. 법치의 전범이 돼야 할 국회의원들이 나라의 최고 규범인 헌법부터 국회법까지 상습적으로 유린하면서 유권자에게 법 준수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 힘없는 서민들은 법을 어기면 엄한 처벌을 피해갈 수 없다. 자기가 만든 법을 어기는 국회의원은 더욱 엄중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고대 중국의 상앙은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목숨까지 잃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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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 정부는 부패했지만 유능하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신화처럼 뿌리내려왔다. 그러는 동안 진보 정부는 상대적으로 깨끗하지만 무능하다는 틀짓기(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보수 정권과 보수 언론의 끊임없는 낙인효과였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를 싸잡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명명한 보수진영의 주장에는 국가운영 능력만큼은 보수가 한 수 위라는 어설픈 자신감이 서려있었다. 굳건하던 신화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구속에 이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몰락으로 풍비박산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러시아 방문에 앞서 청와대 간부들과 직원들에게 ‘유능해지고, 도덕성을 갖추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세 가지 주문을 각별하게 한 데는 진보 정권의 트라우마가 깔려 있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지방의회의원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를 당 간부들에게 한 것에서도 어렵잖게 예상되는 우려가 묻어나온다.

 

  지방선거의 압승에 따르는 자만과 기강 해이를 염려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지만, 난제임에 틀림없다. 역사적으로나 개별 인물로 살펴봐도 유능과 도덕성을 동시에 갖추기는 지난한 일이다. 여기에다 겸손까지 더하라는 건 사실상 이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보수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나마 유능과 도덕성이 우위에 있다는 결과물을 보여줘야만 할 까닭은 대국민 약속에 있다. 진보 진영의 강점으로 인식된 도덕성은 적폐청산과도 직결된다. 도덕적 우위는 문 대통령이 진보진영의 유전자(DNA)라고 했을 만큼 소중한 자산이다.

                                                                                         


 출범 1년여 동안 진보 정부 인사의 도덕성 문제는 보수 정부 못지않게 논란거리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조어가 정치권에 상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머지않아 있을 것으로 보이는 각료와 청와대 고위직 개편 인사에서 지금까지 비판의 대상이 됐던 도덕성 문제가 다시 시험대에 오를 게 분명하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이 병역면탈·부동산투기·세금탈루·위장전입·논문표절 등 5대 비리 관련자의 고위공직 배제 공약을 지키지 않아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례가 많아 보수 정권과의 차별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2개월 여전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낙마 사태에서 ‘부도덕성의 극치’라는 따가운 평가까지 나왔던 점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사전 검증 과정에서 피감기관 지원 해외출장, 후원금 사용의 위법성 같은 문제를 걸러내지 못한 사실 자체보다 어처구니없는 감싸기가 더 치명적인 논란거리였다. 도덕적 잣대로 재야할 사안을 ‘국민 눈높이엔 맞지 않지만 법적으로 문제없다’며 위법 여부의 잣대를 들이댄 것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


 무리하게 밀어붙인 인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장관에게는 ‘내로남불 결정판’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부의 대물림’을 강하게 비판하며 ‘상속에는 세금을 더 매겨야 한다’는 법안까지 발의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장모로부터 건물을 물려받을 때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증여를 분할해 받은 이중성이 탄로 났다. 특목고 폐지를 주장했던 그가 딸을 국제중학교에 진학시킨 ‘내로남불’은 애교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2월 문 대통령이 청와대 각 비서관실에 선물한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는 앞으로 도덕성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하라’는 뜻을 담은 ‘채근담’ 경구는 ‘내로남불’이 나타날 때마다 호출될 개연성이 크다.


 유능함에 의문부호가 붙는 고위공직자들은 청와대 보좌진과 내각의 곳곳에 보인다. 내각 개편은 무능 판정을 받은 각료를 과감하게 퇴출하고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는지를 측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70% 안팎을 넘나드는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장관과 정책의 지지도는 국무총리실의 업무평가와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위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부처에는 인재 풀을 대폭 넓혀 모두가 인정하는 유능한 인사를 발탁해야 한다. 혼란스럽고 모순이 드러난 일부 경제정책은 종합적이고도 정교한 수술이 필요한 부위다. 외교·안보와 남북관계 외에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분야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약간 더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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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미국 민주당과 한국의 자유한국당이 보조를 맞추고 있는 듯한 모습은 역설적이다. 야당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미국의 진보정당과 한국의 보수정당이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어서다. 이질적인 두 나라 정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훈수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북미정상회담에 딴죽을 거는 듯한 공통분모를 지녔다.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미국 민주당 지도부는 지난 4일 북미정상회담 합의에 포함돼야 할 다섯 가지 원칙을 담은 서한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 서한은 북한의 핵무기는 물론 생화학 무기까지 폐기하는 것을 첫 번째 요건으로 제시했다. 로버트 메넨데즈 의원은 여기에다 북한 인권 문제도 이번에 다뤄야 한다고 숟가락 하나를 얹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밖에도 북미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들과 상의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의회가 언제든지 제재 의무화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제재 유예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을 막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무리한 요구는 상대가 있는 협상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북한 비핵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협상에 곁가지를 더해 달라는 것은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민주당의 이 같은 행태는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이 목전에 둔 11월 중간선거와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벌써부터 트럼프의 노벨평화상까지 거론되고 있기도 해서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민주당의 행태를 참고 넘길 리 만무하다. 트럼프는 주무기인 트위터로 대응했다. “오바마, 슈머(상원 원내대표), 펠로시(하원 원내대표)는 북한에 관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정상회담에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다!” 민주당 정권이 ‘전략적 인내’만 하고 있었을 뿐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음을 꼬집은 것이다.


 트럼프에게 까칠하기로 유명한 뉴욕 타임스도 칼럼을 통해 민주당의 태도를 비판했다. 한반도 전문가인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민주당, 유치하게도 북한에 대한 트럼프의 노력에 저항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힐난했다.

 

   “(민주당에는) 충격과 공포! 트럼프 대통령이 진짜 무언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북한과의 평화협상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깎아내리는 데 더 관심 있어 보인다.” 국무부 한반도 담당관을 지낸 조엘 위트 스팀슨센터 수석연구원도 민주당의 요구사항이 그 누구도 달성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회담 실패를 위한 처방전과 같다고 쏘아붙였다.

                                                                                          


 한국의 자유한국당도 미국 민주당의 대응과 흡사하다. 홍준표 대표가 북미정상회담을 ‘위장평화회담’ ‘우려했던 최악 시나리오’로 매도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지난 7일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더 나아가 “종전 선언이 이뤄지는 것을 결단코 반대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자유한국당 의원 36명도 트럼프에게 전달하는 성명서에서 북한의 생화학무기 폐기, 인권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해야한다며 이상주의에 함몰된 모습을 드러냈다.


 궁합이 맞지 않은 두 당이 비현실적인 주장을 함께 펼치고 있는 것에서는 ‘당파적 심술’이라는 공통점이 엿보인다. 미국의 중간선거와 한국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여기에 포함된다. 진보적인 미국 민주당이 북미정상회담의 파탄을 고대하는 세력으로 꼽히는 군산복합체·네오콘(강경 신보수진영)과 보폭을 같이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민주당에게는 트럼프가 북핵문제 해결에 성과를 내는 건 ‘끔찍한 시나리오’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미국 외교정책 기득권세력의 힘이 어느 정도 막강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 일단 성공하더라도 뛰어넘어야할 장애물이 적지 않음을 실감하는 전조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고대하고, 태극기 집회에서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친미 극우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게 자유한국당이라는 점은 또 다른 역설의 하나다. 독재정권의 후신으로 종북을 빌미삼아 인권탄압에 앞장서온 반인권 세력이 북한의 인권문제에 더욱 관심을 쏟는 듯한 언행도 모순적이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북미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미국 민주당과 한국의 자유한국당의 초당적 지지를 이끌어내야 시너지효과를 얻을 있다는 점이 한미 정상에게는 또 다른 과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여행을 하다 허름한 호텔에 묵을 수밖에 없게 됐다. 그것도 빈 방이 없어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써야 했다. 밤이 깊어졌으나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다른 침대의 길손도 잠이 오지 않는지 잠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 손님이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신사는 얼른 일어나 여비가 든 지갑과 귀중품이 든 가방을 들고 물품보관소를 찾아갔다. 잠든 사이에 옆 침대 손님이 자기 귀중품을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게다. 그 때 호텔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같은 방에 계신 다른 분도 조금 전 귀중품을 맡기고 가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의심이 이럴진대 70여 년 동안 적대관계로 지낸 사이라면 오죽할까 싶기도 하다. 북한과 미국이 사상 첫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까지 확정하고도 취소 소동을 벌인 것은 극도의 불신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다. 회담 취소를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정대로 다음달 12일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을 숨기기 어렵다.

                                                                                   


 “그럼 그렇지, 그 버릇 어딜 가겠어.” 북한이 지난 16일 남북 고위급 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맥스선더 한미연합 공중훈련을 빌미삼아 돌연 무기연기하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 취재를 둘러싸고 막판까지 남측 기자들의 애를 태우는 일이 벌어지자 보수진영에서 터져 나온 일성이었다.

 

  북한은 핵실험장 폐기 행사에 전문가를 초청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아 신의가 반감됐다. 일련의 돌출 행동은 북한이 올 들어 남북관계에서 지난날과 달리 신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임해 남측 여론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신뢰를 쌓아가던 참에 나온 것이어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지난 주말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다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상호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 다행스럽다. 6월 1일 남북고위급 회담 재개에 이어 군사당국자회담, 적십자회담을 잇달아 열어 ‘4·27 판문점 선언’을 실천하면서 생채기를 치유하는 과제가 중요해졌다.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최선희 외무성 미국 담당부상이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도 북한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상대방을 막말로 비난하는 사례는 북한의 등록상표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북미 실무접촉을 약속해 놓고 북한 측이 나타나지 않은데다 연락조차 끊은 것도 신뢰 궤도이탈이었다. 이 같은 복합적인 사건은 트럼프 대통령의 되치기 협상 기술에 말려드는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트럼프가 북한의 주특기인 벼랑끝 전술로 회담의 주도권을 빼앗아 온 것이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상국가 지도자 이미지 부각이었다. 국제사회의 정상적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하려 했던 북한의 신의·성실 훼손은 짧은 기간이나마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진정성까지 의심받는 자충수나 다름없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트럼프의 현란한 협상 기술도 한판승을 올린 것처럼 보이지만, 신뢰성에 의문을 남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보다 동맹국인 한국에게 엄청난 무례를 범했다. 자신의 초청으로 열린 한미정상회담 직후 문재인 대통령의 뒤통수를 친 것은 협상의 기술을 감안하더라도 신뢰를 잃는 처신이었다. 앞으로 다른 동맹국들도 트럼프의 말을 끝까지 믿어야할지 섣불리 단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5·26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도 만만찮음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확실하지만, 미국이 적대 관계를 종식하고 체제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것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걱정이 그것이다.


 한번 믿음을 잃으면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 법이다. 스위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헨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신뢰는 유리거울 같은 것이다. 한번 금이 가면 원래대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한다고 해도 높은 수준의 신뢰가 한꺼번에 구축되기는 어렵다. 북·미와 한국의 앞길에는 크고 작은 돌부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신뢰는 진정성에서 나온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에 모두 ‘근육질 지도자’가 포진하자 은근한 걱정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의 ‘애송이 지도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분위기가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던 터여서 더욱 음울했다. 일각에선, 착해 보이기만 한 문재인 대통령이 하필이면 이때 한국 지도자로 뽑혔을까 하는 불운 타령도 늘어놓았다. 문 대통령을 ‘종북’이라고 비난하기에 급급한 보수진영이 특히 그랬다. 문 대통령이 국정 가운데 외교안보 분야가 가장 취약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곁들여졌다.


 올 초부터 급반전을 이룬 한반도 정세를 복기해 보면 동전의 양면 같은 우연과 필연이 모두 행운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새해 첫날 북한 신년사가 남북관계의 분수령이 된 데는 평창 겨울올림픽이라는 운명적 매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 1월1일 신년사에서 북한 대표단을 파견하고 이를 위해 남북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 있다고 제안하는 징검다리가 된 게 평창 겨울올림픽이다. 체면과 명분을 중시하는 북한이 이명박 정부 이래 오랫동안 대결 국면상태였던 남북관계의 매듭을 풀 계기를 찾는 데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은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에다 북한에게 우호적인 남쪽 진보정권의 존재는 플러스 알파 이상이었다. 북한이 문 대통령에게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중재역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신뢰감이 바탕에 깔린 덕분이다. 이는 남북한 양측에 행운의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올림픽이 있더라도 강경노선을 선호하는 보수정권이 남한에 존재했다면 북한이 스스로 약점을 보이면서까지 속내를 터놓기 껄끄러웠을지도 모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존재도 지금까지만 보면 행운을 낳고 있는 듯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여겨진 트럼프 대통령은 알고 보면 평소에도 통 큰 협상의 주인공이었다. 강대국의 명분이나 자존심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트럼프여서 김정은을 일단 믿어보자고 나선 것일 게다.

 

  국무장관 시절 ‘전략적 인내’에 익숙했던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었다면 진보정권임에도 이처럼 과감하고 전광석화 같은 거래를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북한에 늘 속아왔다고 생각하는 민주당 정부라면 돌다리도 두드려보며 천천히 건너려 했을 개연성이 높다. 미국 조야에서는 북미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가 확정된 지금도 ‘신뢰하되 검증하라’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말보다 ‘불신하고 검증하라’는 분위기가 강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냉전 시절 화해와 긴장 완화는 미국의 보수적인 공화당 정부 때 주로 나왔다. 19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 비밀 회담으로 미·중 화해를 이끌어낸 것은 역설적이게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공화당 정부였다.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과의 몰타 정상회담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한 것도 공화당의 조지 부시 대통령(아버지)이었다.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역사적인 담판을 눈앞에 둔 트럼프와 김정은은 이제 ‘신뢰’라는 단어만 명심하면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다. 70여 년이란 긴 세월동안 불신 속에서 대결해왔기에 티끌만한 오해의 소지도 치명타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잖아도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터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8일 이란 핵 협정에서 탈퇴를 선언한 것도 불신이 바탕에 깔렸기 때문이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오는 23~25일 폭파 방식으로 폐기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신뢰를 먼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긍정적인 조짐으로 평가할만하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 합의 후 북한이 국제사회가 원하는 핵시설을 언제, 어디든 사찰하도록 하는 검증방식을 수용하면 의심의 여지는 현격히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미국은 북한 체제보장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과 실천과정에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평화체제는 북한이 오랫동안 줄기차게 요구하고, 미국이 기피해온 현안이다.


 남북한이 함께 추구하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이라는 필연은 우연을 매개로 삼으며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역사학자 E. H. 카가 우연을 매개로 필연이 관철된다고 했듯이 말이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의 동방정책과 시민의 열망이 쌓여 우연 같은 필연을 낳았던 것처럼 남북한과 미국은 역사적 행운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평화를 위한 신념과 운명도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끊이지 않는 재벌가 갑질 행태를 보면 조선시대 양반가의 승경도(陞卿圖) 놀이가 불현듯 떠오른다. 당시 양반들은 승경도 놀이로 자녀들에게 복잡하기 그지없는 벼슬자리 체계를 흥미롭고 손쉽게 가르쳤다. 승경도 놀이는 종9품 말단에서 정1품 영의정까지 관직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보드게임의 일종이다. 관직 쟁탈전을 벌여 누가 먼저 높은 자리에 올라가나를 겨루는 놀이인 셈이다.

 

  종경도(從卿圖), 종정도(從政圖)라고도 불리는 승경도는 ‘벼슬살이를 하는 도표’라는 뜻이다. 커다란 도표에 벼슬 이름을 쓰고, 윷가락 같은 ‘윤목’(輪木)을 굴려 나온 수만큼 말을 이동하다 영의정을 거쳐 마지막 벼슬인 ‘봉조하’(奉朝賀·은퇴한 고위 관리에게 특별히 내린 벼슬)에 도착하는 사람이 이긴다.


 윷놀이가 서민의 오락이라면, 승경도 놀이는 양반의 게임이었다. 승경도는 태조 이성계를 도운 개국공신 하륜(河崙)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왕조와 다르게 관제를 복잡하게 개편하면서 관직을 쉽게 알리는 방법을 궁리하던 중 사찰에서 스님들이 성불도(成佛圖)라는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창안했다고 한다. 하륜의 취지야 나쁘지 않았겠지만, 소수 지배계층을 위한 입신양명의 놀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책임감과 도덕적 의무를 가르치기보다 고관대작의 길을 자연스레 배우는 결과를 낳았다.

                                                                               


 중앙과 지방을 합해 3800명을 넘지 않은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300여 종의 관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양반 자녀들은 일곱 살 때부터 승경도 놀이를 하면서 서민들과 현격히 차별화된 삶을 꿈꿨다. 승경도 놀이를 잘하는 사람이 실제 학문적 성취보다 높게 평가받는 폐단까지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청백리는 많아야 218명, 적게는 87명에 불과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청백리 칭호를 받은 관리는 뇌물을 안 받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받을 만큼 받아 뇌물에 관심이 없어질 정도의 고위관리가 많다는 학설도 있다. 오죽했으면 청백리 되는 일이 3대가 영의정을 역임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있을까.


 재벌기업 총수들의 자녀 교육은 양반 가문의 승경도 놀이 차원을 넘어선다. 입사 3~4년 만에 ‘기업의 별’인 임원이 되고, 단기 속성 과외로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능력 검증이 되지 않은 자녀를 무리하게 승진시키는 사례도 예삿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나라 경제 전체의 위험도를 키운다는 우려가 제기된 지도 오래다. 대한항공·한진그룹 삼남매와 이들의 어머니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갑질 행태에서 속속 드러나는 재벌가의 횡포와 특권 의식은 세계적인 유명세를 치르는 중이다.

                                                                                       


 몇 년 전부터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들은 대개 재벌 3세들이다. 이들은 정상적인 입사와 승진 절차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국내 주요 15개 그룹 28명의 재벌 3세들은 평균 28세에 입사해 31세에 임원이 됐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입사부터 임원 선임까지 걸린 기간이 평균 3년에 불과하다. 이들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수단도 대부분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법을 통해서다. 교육과정도 일반인들과 달라 외국 유학 시간을 거치며 한국의 사회, 경제 전반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부잣집에서 자란 아이는 커서 훌륭한 리더가 되지 못한다는 연구결과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발표된 적이 있다. 션 마틴 보스턴대 경영학 교수 등 3명의 연구자는 이 논문에서 ‘부잣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도취성이 강한 어른으로 자라 조직을 이끄는 훌륭한 리더가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자식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강하고 충동적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적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반집 도련님이나 규수처럼 자라 특권의식만 가득한 재벌 3세들이 갑질 횡포로 구설에 오르는 것도 이런 탓이다.


 총수 일가의 자녀라고 무조건 경영에 참여하고 경영권을 승계 받는 관행은 청산돼야할 적폐의 하나다. 외국 유수 기업들처럼 재벌 자녀들이 소유권을 물려받는 대신 경영권을 행사하지 않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영에 참여하더라도 일정기간 체계적인 경영 능력을 검증받아야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기업은 대주주의 독점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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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신호등이라도 다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 일본 영화감독이자 배우·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가 일본인들의 집단 심리를 저격한 명언이다. 개개인은 교통질서를 칼같이 지키고 공중도덕의식이 드높은 일본인들이지만, 집단광기가 발휘되면 거칠 게 없다는 걸 풍자한 촌철살인의 비유다.


 이 말은 사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에게 돌려줘야 제격이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자기네 이익이라면 집단으로 욕을 먹더라도 우선 챙기고 보는 관행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때마다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철석 같이 약속하지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 게 우리네 국회의원들이다. 혼자 욕먹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지만, 국회의원 전체가 지탄을 받는 것은 단체기합처럼 표시가 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의 ‘쌈짓돈’으로 불리는 특수활동비의 기밀이 지켜져야 한다고 고집하는 까닭은 유권자를 우롱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직 대통령 두사람이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유용으로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용 내역을 공개하면 국익을 해치고 행정부에 대한 감시 기능이 위축된다는 상고이유가 담긴 의견서를 국회 사무처가 대법원에 제출했다는 소식이 어제(8일) 전해지자 누리꾼들의 비난이 폭주했다. 
                                                                   

 

 국회는 참여연대가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하라며 제기한 소송의 1·2심에서 연달아 패소했지만, 이에 불복했다. 이 소송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과거 특활비 유용 의혹을 고백한 것이 계기가 됐다. 홍 대표는 2015년 페이스북에 ‘2008년 여당 원내대표를 할 때 국회운영위원장을 겸했는데 매달 4000만~5000만원을 국회 대책비로 받아쓰다가 남은 돈을 집사람에게 생활비로 주고 했다’는 글을 올리며 논란을 불러왔다. 당시 신계륜 전 민주당 의원은 특활비를 자녀 유학비에 보탰다고 실토해 책망을 받았다.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할 경우 국회 고도의 정치적 행위가 노출돼 궁극적으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국회의 주장은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다. 특수활동비 수령인에 대한 정보는 개인정보여서 국민의 알 권리보다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도 세금을 내는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장난치지 마라’, ‘적폐세력은 국회다’ 같은 댓글 수천 건이 삽시간에 올라온 게 이를 방증한다.

 지방자치단체들은 특수활동비처럼 쓰이는 기관장의 업무추진비를 유리알처럼 공개하는 추세다. 업무추진비도 기관장들의 ‘쌈짓돈’이라 불리며 세금 낭비의 대표적 사례로 지탄 받아왔다.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이미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해 국민의 알 권리를 실현하고 국회 활동의 투명성과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국회는 5년간 이와 관련한 소송비용으로만 3000만원이 넘는 혈세를 낭비했다.
                                                                       

 국회의 특활비 기밀주의는 개혁에 뒤처진 인상을 주고 있는 자유한국당의 혁신안과도 배치된다. 자유한국당 2기 혁신위원회는 지난달 하순 활동을 마감하면서 발표한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혁신안’에 국회 특수활동비 정보 공개를 넘어 아예 폐지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바른미래당도 지난달 국회 특별활동비 폐지법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국회는 올해 예산에서 모든 국가기관을 통틀어 특수활동비를 가장 큰 폭으로 줄였다고 자랑했지만, ‘꼼수’임이 드러나 힐난을 자초한 전력까지 있다. 국회가 올 예산을 짜면서 실제로는 특활비를 특정업무경비 같은 다른 항목으로 빼돌려놓은 것으로 들통 났다. 국회가 내역을 밝히지 않는 ‘깜깜이’ 업무추진비만도 100억 원에 가깝다고 한다. 행정부의 예산 낭비와 비밀주의를 질타하고 견제하는 국회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납득할 수 없다.

 국회의 이 같은 모습은 감시하는 외부 독립기구가 없는 탓도 크다. 정부 부처나 다른 행정기관이 상급기관의 정기적 감사에다 감사원 감사까지 받는 것과 달리 국회는 사실상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 국회는 스스로 투명성을 견지한다.

 

   의회민주주의 선진국인 영국은 의회 회계와 관련한 독립된 감시기구를 만들었다. 한국도 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예산 투명성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시민사회의 여론이 점차 힘을 얻어간다. 국가 예산·결산 전체를 좌우하는 국회이기에 세금을 더욱 투명하게 사용해하는 무거운 책무가 뒤따른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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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가운데 하나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들곤 한다. 이 전 대통령은 닳을 정도로 이 책을 여러 번 읽었고, 해외순방이나 휴가를 갈 때도 빼놓지 않았다고 대통령 재임 당시 청와대 참모들이 애써 알렸다. 이 전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돈 문제로 엄청나게 시달리자, 전 재산 기부를 공약한 뒤 ‘청계재단’을 설립할 무렵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법정 스님이 입적하자,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길상사 빈소를 찾아가 조문할 정도였다.


 그는 돈 욕심이 없다는 걸 기회 있을 때마다 극구 부각하려 했다. 아킬레스 건처럼 여긴 탓이다. 그는 선거 때 말썽 많았던 ‘BBK’와 ‘다스’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지금도 우긴다. 이 전 대통령이 한 측근의 입을 빌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변호인단 구성에 어려움이 있다”고 황당한 해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 재산이라곤 29만원 밖에 없다’며 추징금 납부를 거부했던 희언(戱言)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검찰 수사 결과 밝혀진 이 전 대통령의 재산 실상은 복마전을 방불케 한다. 1천억 원대의 차명재산을 소유하고 있음이 사실상 입증되고 있다. 사회기부형태로 세웠다는 청계재단마저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운영해 변칙상속 수법이라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됐다. 심지어 스님에게서까지 받은 뇌물은 110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소한의 명예를 지켜야할 대통령의 돈 집착은 서민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그것도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형·아들·부인·사위·조카에 이르는 ‘가족 게이트’다.

                                                                                


 한때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정두언 전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비극은 돈과 권력을 동시에 잡으려 한 것이다. 돈이 일종의 신앙, 돈의 노예가 돼 있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정치인에게 돈은 필요악이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까지 그토록 돈의 노예가 될 까닭이 있을까 하고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한다. 법정 스님이 말하는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다.


 2007년 대선 후보자로 등록하면서 프로필에 적은 이명박의 가훈은 ‘정직’이었다. 어머니의 평소 가르침이 ‘정직하게 살아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겨뤘던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이명박 후보는 자신의 도덕성에 문제가 없음을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도곡동 땅이 어떻다고요? BBK가 어떻다고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나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서울시장 시절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그였으니 거짓말은 털끝만큼도 없을 법했다. 많은 국민은 믿지 않았겠지만. 그는 재임 시절인 2011년 9월 청와대 비서관회의에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므로 조그마한 흑점도 찍으면 안 된다”고 가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사기극이었음이 끝내 파헤쳐졌다. 국민을 속여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 거짓을 바탕으로 비리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증거물은 조작이고, 측들의 검찰 진술은 허위라고 버텼다. 자신의 대선 홍보물에 ‘전과경력 없음’으로 기재했던 이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엔 ‘전과 11범’이란 사실도 이번 검찰 수사 결과 처음으로 확인됐다.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네 차례의 수사에서 모두 무혐의 처리했던 검찰과 특검이 이번처럼 제대로 수사를 했더라면 이 전 대통령은 당선조차 되지 못했다.


 이 전 대통령 구속은 법의 심판 과정이기 전에 절제를 모르는 권력의 탐욕에 대한 엄중한 경종이기도 하다. 이 전 대통령의 구속 사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기소와 더불어 ‘제왕적 권력바로세우기’의 본보기다. 최고 권력자의 국민 기만과 권력 남용의 재발방지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정치보복을 하고 싶어도 이 정도의 죄상이 아니라면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는 지경이 됐을까 하는 반문도 가능하다. 심증은 넘쳤으나, 그동안 ‘스모킹 건’(결정적 물증)만 확보하지 못했던 적폐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게다. 철저히 속여온 핵심 사건인 ‘BBK’와 ‘다스’는 수많은 선의의 피해자가 상존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사화(士禍)까지 들먹이며 정치보복으로 몰아가는 견강부회는 정치적 언사에 불과하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을 함께 감옥에 보내는 게 세계인들에게 마냥 부끄러운 일일까.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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