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가 문득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얼마 전 “나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을 때다. 트럼프는 “나에게 아름다운 편지를 썼다. 훌륭한 편지였다”고 털어놨다.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와 적대적인 두 나라 지도자의 협상을 단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캐릭터나 메시지의 상징성에서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재탄생’을 뜻하는 르네상스의 발상지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준세이는 열정, 여자 주인공 아오이는 냉정을 표상한다.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를 구축하려는 북한과 미국도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가며 ‘밀당’을 주고받는 상황이다. 7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방문은 스스로 밝혔듯이 상대방의 진심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종전선언의 분수령인 2차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징검다리인 셈이다.


 지금까지는 비핵화를 가급적 빨리 마무리 짓고 정상국가로 나가려는 북한의 열정과, 조기 비핵화를 원하지만 철저한 검증을 거치겠다는 미국의 냉정이 대치하는 기류였다. 폼페이오 장관 방북 결과, 북미정상회담을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열기로 의견을 모은 것을 보면 장애물 경기의 두 번째 허들을 넘어서는 단계에 다다랐다고 봐도 무난할 것 같다.

                                                                      

 

  폼페이오의 4차 방북 성공 가늠자는 북미정상회담 시기와 장소 결정 여부였다. 양측이 2차 정상회담의 구체적 시기와 장소를 결정하기 위한 협의를 계속 진행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어느 정도 의견조율이 이뤄진 상태인 듯하다. 국빈급 외빈용인 백화원 초대소 오찬장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두 나라에게 좋은 미래를 약속하는 좋은 날이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고, 폼페이오 장관도 “위대한 방문”, “매우 성공적인 아침”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한 걸 보면 짐작이 간다.


 양측의 희망사항이 협상테이블에서 큰 그림으로 그려졌을 높은 확률도 읽혀진다. 북한이 취할 비핵화 조치들과 미국 정부의 참관 문제 등에 대해 협의가 있었으며 미국이 취할 상응조치에 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는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비서관의 전언에서 윤곽이 드러난다. 비핵화 조치와 종전선언을 놓고 넉 달간 힘겨루기를 하던 양측의 의미 있는 진전임에 틀림없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의 1단계 조치로 영변 5㎿ 원자로와 재처리시설 등을 폐쇄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 방북을 수용했을 가능성을 먼저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에 상응하는 조치로 미국이 종전선언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전문가들의 참관 아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해체를 하는 방안 등이 플러스 알파로 포함됐다면 금상첨화다.

                                                                             


 북미 협상의 단계마다 그랬지만, 앞으로도 최우선과제는 불신을 떨쳐버리는 일이다. 워싱턴과 평양에는 상호불신이라는 끈질긴 유령이 상존한다. 특히, 미국 조야에서는 트럼프의 김정은 호감에 딴죽을 거는 주류세력이 늘 만만찮다. 반트럼프 대표주자인 낸시 펠로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의 취향에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고 꼬집는다. MSNBC방송은 “그것은 짝사랑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호의가 정점에 도달했다”며 과유불급을 경계한다.


 이 때문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시간게임(time game)’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폼페이오 장관도 마찬가지다. 중간선거에 연연하지 않아 11월6일 이전에 북미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협상도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준세이와 아오이는 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사서 고생한다.


 열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열정(passion)의 어원이 고통(pain)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사랑이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때 비로소 열매를 맺듯이 북미 간의 비핵화 협상도 마찬가지다. 실패한 과거의 패러다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입구로 하고, 평화협정을 거쳐 북미 국교정상화를 종착지로 삼는 체제보장 시나리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올해 안에 북미정상회담→남북미 종전선언→김정은 위원장 서울 답방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 구상이 탄력을 받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북한 비핵화 시계가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뉴욕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와 플러스 알파를 확인한 뒤 교착상태에 빠졌던 협상의 재개 의사를 흔쾌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계적 관심사인 2차 북미정상회담은 가시권에 들어왔다. ‘조만간’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시기와 장소 결정만 남아 있다는 미국 측의 언급을 보면 긍정적인 신호임에 틀림없다.


 미국과 북한은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이미 다양한 채널 간의 협의를 예고했다. 뉴욕을 방문 중인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폼페이오 장관이 유엔본부에서 만나는 데 이어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미국의 스티브 비건 대북 특별대표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간의 세부적인 조율이 이뤄진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한 미공개 메시지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내용을 미국이 꼼꼼하게 점검하는 절차가 필요해서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는 핵시설의 순차적인 폐기와 검증 가능한 핵사찰을 수용하겠다는 의사가 확실하게 담겼다고 폼페이오 장관이 확인해줬다. 폼페이오 장관의 북한 방문도 다시 추진된다.


 2차 북미정상회담 시기도 미국 측이 먼저 언급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창건기념일인 10월 10일을 지나 10월 중·하순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폼페이오 장관은 10월 이후가 될 가능성이 더 많음을 내비쳤다. 2차 북미정상회담 결과가 트럼프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이 열세에 놓여 있는 중간 선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미국이 서두를 이유가 없어서인 듯하다. 미국 중간선거일인 11월 7일 이전이라면 북한이 내놓을 카드가 미국 중간선거에 확실한 호재가 될 만큼 만족스러워야 한다. 

                                                                                     


 대외 정책에 영향력이 큰 미국 의회와 싱크탱크, 언론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뿌리 깊다. 미국 의회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는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미 행정부 안에서도 비관론이 여전하다.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지난 24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쉽게 핵 프로그램 포기를 원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2021년 1월) 내 완료라는 비핵화 시간표는 북미 양측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9월초 한국 특사단에게 이를 밝혔고, 미국도 비핵화까지 2년여 정도라면 적절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비핵화 완료 시점까지 주고받을 조치의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시간표 정리다.


 미국도 한반도 종전 선언을 비롯해 상응조치를 북한에게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약속해야함은 물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상응조치 시 영변 핵시설 영구폐기’라는 김정은 위원장의 조건부 제안을 수용할지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내놓지 않았다. 미국이 ‘상응조치’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협상 테이블에서 타결짓기 위한 신중한 행보로 여겨진다. 미국이 뉴욕 한미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대외적으로 언급하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엔총회 기간 동안 미국은 대북 제재 유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회담까지 소집하고 있어서다. 섣불리 종전선언 카드를 내줘서는 안 된다는 미국 내 강경 여론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치적 운명을 가를 중간선거를 앞두고 내부 리더십 균열로 지지율이 급락해 돌파구가 절실한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트럼프가 중간선거 이후 탄핵 국면에 접어들어 권좌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계산 아래 북한이 머뭇거리며 시간을 벌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비핵화가 20%에 이르면 되돌아갈 수 없는 시점이라고 트럼프가 생각한다는 사실을 김정은 위원장은 기억해야 한다. 비핵화가 완성되기 이전이라도 구체적 성과가 있다면 단계별 보상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최근 인터뷰에서 “우리는 특정한 시설들, 특정한 무기 시스템들에 관해 이야기해왔다. 이러한 대화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특정 무기 시스템은 미국 본토를 직접 위협하는 화성-14·15형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이동식 발사대 폐기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객관적으로 보면 현재 국면은 미국에 유리한 게임이다. 경제발전과 정상국가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북한이 서두르고 미국이 다소 느긋한 모양새다. 북한이 속도를 내고 싶지만, 미국이 장애물 경기의 허들을 높여 놓은 꼴이다. 미국과 북한이 조건과 행동을 병행하는 게 합리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밝혔듯이 이제 핵 포기는 북한 내부에서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식화됐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나란히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먼저 내리는 모험을 하긴 어렵다. 양측 모두 기존의 협상 문법을 잊고 비핵화와 안전보장을 통 크게 교환하는 거래가 이른 시일 안에 이뤄져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안에 한반도 평화를 정착한 지도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문재인 대통령만큼 원칙주의자인 정치인도 드물다.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은 문 대통령이 ‘그냥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아주 깐깐한 원칙주의자’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자신도 원칙주의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문재인은 내가 아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며 “나도 두 손 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문 대통령 스스로도 원칙주의자임을 자인한다. “원칙보다 강한 것은 없다. 원칙만큼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원칙주의는 지도자의 중요한 자산이자 덕목이다. 문 대통령에게 오늘이 있는 것도 원칙주의가 큰 몫을 했다. 문 대통령의 원칙주의는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국정철학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철학은 적폐청산에서 대표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이 모든 공약에 집착하는 듯한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은 도리어 아쉽다. 문재인 정부가 유독 경제문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모순되는 정책의 난립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추어들에게도 한눈에 보인다.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의 요구사항을 담은 선의의 정책들이 서로 물리고 물리며 갉아먹는 현상이 한꺼번에 드러나고 있는 탓이다.

                                                                                         


 문 대통령 공약 가운데 일자리 창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일자리 상황판을 집무실에 들여놓았다. 매일 상황판을 체크하면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후 1호 지시도 ‘일자리 위원회’ 구성이었다.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일자리’라는 단어를 40여 차례나 반복하면서 일자리 창출 추가경경예산안 통과의 화급함을 야당에 호소했다. 그 결과, 일자리 예산은 지금까지 54조원이나 썼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고용지표는 ‘고용 대참사’로 불릴 만큼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4대강 사업 22조원이면 연봉 2200만원 일자리 100만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던 문 대통령이 무안해질만한 일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층 간 소득격차가 사상 최대 수준으로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빈부격차 해소와 일자리 창출을 내걸고 집권한 문 대통령으로서는 뼈아픈 대목이다. 게다가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 서민층과 청년들의 절망감을 부채질한다.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의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정책이 실업자와 저소득층에게 역효과를 낳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을 정도다.


 소득주도성장에 기초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개혁정책이 취지와는 달리 치명적인 역효과를 낳았지만, 문 대통령의 원칙은 꺾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2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우리는 올바른 경제정책 기조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남북한·외교안보문제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굴러가는 일이 없다는 아우성이 들리지만, 스스로 정한 원칙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으로 풀릴 문제를 정부가 고집을 부리며 온갖 엉뚱한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중국 마오쩌둥 주석의 참새잡기운동이 타산지석의 사례로 꼽힌다. 마오쩌둥은 1955년 농촌을 시찰하다가 참새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한 농민의 탄원을 받는다. 참새가 귀한 곡식을 쪼아 먹는 걸 보고 참새와 함께 쥐, 모기, 파리를 박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대적인 참새잡기운동으로 2억 마리를 없앴지만 다른 부작용이 나타났다.

 

   참새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메뚜기가 폭발적으로 불어나 벼논을 온통 망가뜨려 버렸다. 메뚜기의 포식자 참새가 없어진 후과는 더욱 참혹해졌다. 곡식이 부족해 3년 사이에 4000만 명이 굶어죽었다. 혁명적인 마오쩌둥 정부는 메뚜기의 천적인 참새잡기운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문 대통령은 노자의 ‘도덕경’이 가르치는 ‘대직약굴(大直若屈)’을 떠올려 보면 좋을 듯하다. ‘대직약굴’은 아주 곧은길은 때로는 굽어보이는 법이라는 뜻이다. 이는 큰 원칙이 있는 사람은 작은 데서 원칙을 애써 고집하지 않는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굽히는 것 같지만, 큰 틀에서 보면 굽히는 게 아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주먹 세계에선 일인자가 주먹 자랑하는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다. ‘스트롱맨’ 지도자들이 유달리 활개를 치는 지구촌의 흐름 속에서 그런 현상이 도드라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폴란드 집권여당 대표 등이 최근 스트롱맨 클럽에 가입한 지도자로 꼽힌다.


 스트롱맨 중의 스트롱맨인 트럼프 대통령은 요즘 연이어 다른 스트롱맨들 손보기에 나섰다. 세계 일인자를 노리는 중국의 ‘시황제’ 시진핑 주석에게 잇달아 강펀치를 날린 데 이어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의 손목을 비틀고 있는 게 돌올하게 보인다.

 

  트럼프는 지난 주말(10일) 정치적 무기인 트위터로 공격을 시작했다. 터키산 알루미늄에 20퍼센트, 철강은 50퍼센트로 관세를 올리겠다고 했다. 새 관세율은 현재의 2배 수준이어서 엄청난 파장이 예상된다. 그러자 리라 가치는 하루 만에 최고 24퍼센트까지 폭락했다. 터키발 ‘검은 금요일’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유럽과 미국 증시까지 흔들렸다.

                                                                                        


 에르도안 정부가 미국인 목사 앤드루 브런슨을 간첩활동·테러조직 지원 혐의로 장기 구금하고 시리아·이란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자, 트럼프는 경제 보복으로 응수했다. 경제 보복이 가장 실효적이고 현실적인 제재수단임을 알아챈 것이다.

 

  트럼프가 자국민 한사람 때문에 군사 동맹인 터키에 이처럼 강하게 대응한 것은 11월 중간선거가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브런슨 목사가 소속한 복음주의 교단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다. 트럼프는 이번 제재가 “빙산의 일각”이라면서 브런슨이 풀려나지 않으면 추가 제재를 포함해 보다 강경한 조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15년간의 장기 집권에 이어 지난 6월 대선 승리로 ‘21세기 술탄’으로 등극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단 강경하게 맞섰다. 그는 “미국에게 달러가 있다면 우리에겐 알라가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에르도안이 터키 국민에게는 “베개 밑에 달러나 유로, 금이 있다면 은행에 가서 리라로 바꾸라”고 헌신을 호소했다. 하지만 미국의 실력 행사에 버티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는 중국을 겨냥해서는 무역전쟁에 이어 첨단산업 방어전에 나섰다. 첨단기술 분야에서 최대 경쟁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첨단산업 육성 정책 ‘제조 2025’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이는 중국의 불법적인 기술 빼가기와 지적재산권 침해를 줄기차게 비판하며 중국에 대한 제재를 가속화하는 과정의 하나다. 미국 정부는 로봇, 항공, 첨단 제조업 분야를 연구하는 중국인 유학생의 비자 유효기간을 1년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5년으로 확대한 유효기간을 다시 1년으로 되돌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비공개 만찬에서 “(중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학생들은 거의 모두 간첩”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트럼프는 ‘현대판 차르’로 불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대 러시아 신규 제재를 결정했다. 지난 3월 발생한 전직 이중첩보원 독살 시도 사건에 대한 대응 차원이다. 국내 정치적 의도가 강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지만, 또다시 루블화가 직격탄을 맞았다. 달러 대비 루블화 가치는 20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러시아 증시도 하락세를 드러냈다.


 트럼프에게 가장 고분고분한 게 아베 일본 총리이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일본에 불리한 정책을 고수 중이다. 트럼프는 ‘필리핀 트럼프’로 불리는 두테르테 대통령과는 궁합이 잘 맞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제재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강공책이 먹혀들자 재미를 붙인 듯하다. 일련의 힘자랑은 트럼프가 정치·외교적 목적을 위해 경제적 수단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 극단적 사례에 속한다.

 트럼프의 ‘힘의 외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찮다. 미국 시사 잡지 애틀랜틱은 “미국이 요즘 제재에 중독돼 있다. 제재가 지금처럼 계속 이어질 경우 앞으로는 제재 효과가 반감될 수 있고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위태롭게 해서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교훈은 고금의 진리다. <뉴욕 주 이타카에서>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미국 최초의 무역전쟁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었다. 훗날 ‘보스턴 티파티’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이 붙은 차 사건은 식민지 종주국 영국에 대한 관세저항으로 나타난, 첫 무역전쟁이나 다름없다. 국가 재정의 중추 가운데 하나이던 동인도회사의 경영난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1765년과 1767년 잇달아 새 관세조치인 ‘차(Tea) 조례’를 선포했다. 의회 대표가 없는 식민지에도 과세하기로 한 인지세법과 타운젠드법이 그것이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차는 비싼데다 섬유, 공산품 다음으로 많은 수입품이었다.


 ‘차 조례’를 악법으로 규정한 미국인들은 광범위한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773년 12월16일 저녁 보스턴 항구에서 한 무리 청년들이 떠들썩한 파티를 열고 과일주를 엄청나게 마셔댔다. 이들은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 복장을 하고 있었다. 취기가 돌자 부두에 정박 중이던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역선 세 척에 뛰어올라 340여 개에 이르는 차 상자를 모조리 바다에 던져버렸다. 영국정부가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자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첫 무역전쟁으로 독립국가를 세운 미국은 세계 1위 자리가 위협받자 무력전쟁이 아닌 무역전쟁으로 수성하려는 의중을 드러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벌이는 중국과의 무역전쟁은 대규모 통상마찰을 넘어서는 세계 패권경쟁 차원으로 고조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트럼프의 막무가내 스타일로 보이지만, 정부 차원의 치밀한 계산 아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주말 (20일)중국산 제품 5000억 달러 전체에 관세를 부과할 준비가 돼 있다고 공언했다. 5000억 달러라면 지난해 미국이 수입한 중국산 제품 총액이다. 끝장을 보겠다는 무시무시한 발상이다. 트럼프는 242번째 독립기념일 이틀 뒤인 지난 6일 340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제품에 대해 25퍼센트 관세 폭탄을 퍼부었다. 나흘 뒤인 10일에는 20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10퍼센트의 추가 관세 부과 절차에 들어갔다.


 전쟁은 어느 한쪽이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기기 힘들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유소작위(有所作爲), 화평굴기(和平?起)를 넘어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를 표방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맞대응에 나서 모두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미국이 중국의 보복을 각오하고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손실보다 이익이 크다는 자체 분석을 끝냈다는 뜻이다. 우선 수출액의 단순 비교에서 중국의 타격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지난해 중국의 대미 상품수지 흑자는 무려 3700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중국 수출총액이 1300억 달러에 불과해 피해규모가 중국의 4분의 1수준이다. 중국의 일자리 가운데 대미수출을 통해 발생한 비율은 70대 1인 반면, 중국 수출에 의존하는 미국 일자리 비율은 140대 1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수출의존도가 큰 중국경제는 미국에 비해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경제의 기초 체력에서도 미국이 우위에 있다. 미국 경제는 호황이 지속되면서 각종 경제지표에 청신호가 켜졌다. 올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2분기까지 3.7퍼센트를 웃돌 것으로 추계된다. 완전고용에 가까운 낮은 실업률과 기업경기 확대도 무역전쟁으로부터 미국을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무역전쟁의 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반면에 중국은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6.7퍼센트여서 4분기 만에 둔화된 것으로 집계됐다.


 미·중 무역전쟁에도 미국 증시는 비교적 평온한 편이지만, 중국 증시는 불안정하다. 중국에게 대규모 미국 국채 매도라는 무기가 있으나 미국의 무제한적인 통화 발행권을 감안하면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전망도 나온다.


 두 나라의 무역전쟁이 장기화하면 미국도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견해가 많긴 하다. 이 때문에 미국내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신흥강자 중국을 따돌리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겠다는 트럼프의 결의는 중국과 통화전쟁까지 내비치는 데서도 분명히 엿보인다. 문제는 한국, 일본, 유럽연합 같은 전통적 동맹국에 유탄이 날아오고 있어서다. 무역전쟁에서는 대부분 패자만 존재한다는 역사적 교훈은 다른 목표를 지닌 트럼프의 미국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는 듯하다. <보스턴에서>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법을 가장 잘 지켜야할 사람이 위법·불법 행위를 많이 하는, 이상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법은 만든 사람이 더 잘 지켜야한다. 한국은 정반대다. 법을 지키지 않아도 벌을 잘 받지 않는 게 법을 만든 국회의원이다. 그 덕분에 ‘방탄국회’란 희한한 말까지 생겨났다. 범법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을 체포하거나 구속을 막는 불체포특권까지 누리기 때문이다.


 국회는 가장 기본적인 국회법부터 상습적으로 위반하고 있다. 기초적인 임무인 원 구성 시한을 정한 국회법을 단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20대 국회 후반기를 벌써 시작했어야 하지만, 국회의장조차 없어 놀면서 월급(세비)은 꼬박꼬박 챙기는 중이다.

 

  지난 5월 29일로 20대 국회 전반기는 끝났다. 후반기 국회의장단 선출은 전반기 의장단 임기만료일 전 5일에 해야 한다. 이런 국회법을 지키려면 5월 24일까지는 끝냈어야 했다. 18개 상임위원장은 전반기 임기만료일까지 선출해야 한다. 6·13 지방선거를 핑계로 방치했다. 국회의 직무유기다.

                                                                                        


 국회를 기다리고 있는 현안은 산적하다. 민갑룡 경찰청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안, 각종 민생법안 처리가 밀려 있다. 17일까지 원내교섭단체가 합의를 이뤄내지 못하면, 뜻깊은 70주년 제헌절 경축식을 국회의장 없이 치러야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1994년 국회법 개정 이후 지금까지 제때 국회의장이 뽑힌 것은 19대 국회 후반기인 2014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나마 상임위원장까지 원 구성을 마무리하기까지는 한 달 가까이 더 걸렸다.


 지금의 국회 지도부 공백사태는 여야 4개 원내교섭단체별로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 배분을 놓고 입장과 요구가 크게 달라 초래된 일이다. 자신들의 감투싸움일 뿐 유권자와는 상관없다. 스스로 만든 법을 어겨도 무감각해지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다.

 

  마냥 늦춰도 제재할 방법이 없으니, 허울뿐인 국회법이다. 늦춘 만큼 불이익이 돌아가게 해야 법이 지켜진다. 세비 반납이 방법의 하나이지만, 벌칙조항을 국회법에 넣는 것도 의원들 몫이어서 제 밥그릇을 차버릴 리 만무하다. 밥그릇 챙기기에 국회를 따를 곳이 없다는 악명이 자자하니 말이다.

 국회법 위반 사례는 열거하기도 어렵다. 한 시민단체의 조사결과를 보면 국회의원들은 국회법 6개 조항을 상시로 위반한다. 소속 정당의 의사에 따르지 않고 투표하도록 한 조항은 당론 투표에 익숙한 국회의원들에게는 아예 의미가 없어졌다. 국회의원의 상임위원회 규정도 상시 위반 대상이다. 국회법은 상임위원의 임기를 2년으로 정하고, 회기가 시작된 뒤 30일 이내에 상임위 이동을 금지했지만, 한때 연평균 250건의 불법 이동이 있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상임위 소위원회 회의 내용을 비공개하기로 의결하지 않는 한 공개하도록 한 조항도 거의 지키지 않는다. 자신들의 언행이 공개되는 걸 꺼려 소위원회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수시로 비공개 회의를 진행한다. 국회 내 모든 회의는 회의록을 작성하도록 한 조항도 수없이 위반한다. 다양하게 규제하고 있는 국회의원의 품위조항도 언론 보도로 드러났듯이 있으나마나하다. 국회 출석 의무, 회의장 내 질서문란행위 금지, 타인 모욕·사생활에 대한 발언 금지, 발언방해 금지, 회의진행 방해물건 반입 금지, 겸직내용 신고, 소관 상임위원 직무 관련 영리행위 금지가 대표적이다. 국회 안에 윤리위원회가 있으나 장식용에 불과하다.


 예산·결산안 처리 위반은 상습행위로 손꼽히는 종목의 하나다. 국회가 예산안을 12월 2일까지 처리해야 한다고 헌법에 명시돼 있으나 국회는 번번이 기한을 넘긴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늘 어겨왔다. 여야의 극한 대립 때문이었다. 강제조항이 필요하다. 예산안 처리 지연은 중앙정부의 예산 공고, 집행계획 수립, 분기별 배정계획 같은 집행 준비에 차질을 빚기 때문에 상당한 부작용과 비효율을 낳는다.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드러난 여야 실세 의원들의 쪽지예산 행태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쪽지예산’ 부탁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김영란법) 위반임에도 그렇다.


 국정감사도 기간을 지키지 않는 사례도 다반사다. 헌법 61조와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기국회 집회일 이전에 감사 시작일부터 30일 이내의 기간을 정해 감사를 실시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어길 때가 잦다. 고위공직자 임명동의안 처리 시한(제출한 날로부터 20일 이내) 역시 무시하기 일쑤다. 인사청문 시한이 인사청문회법에 규정돼 있으나 수시로 어긴다. 총선 선거구 획정안도 법정 시한을 지킨 적이 거의 없다. 이를 어겼을 때 제재 장치나 처벌조항을 넣지 않은 것은 입법권을 지닌 국회의원들의 낮은 준법정신 때문이다.


 정치자금법 위반, 선거법 위반처럼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이 걸린 일까지도 몰래 어기는 국회의원들 역시 적지 않다. 법치의 전범이 돼야 할 국회의원들이 나라의 최고 규범인 헌법부터 국회법까지 상습적으로 유린하면서 유권자에게 법 준수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 힘없는 서민들은 법을 어기면 엄한 처벌을 피해갈 수 없다. 자기가 만든 법을 어기는 국회의원은 더욱 엄중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고대 중국의 상앙은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목숨까지 잃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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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 정부는 부패했지만 유능하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신화처럼 뿌리내려왔다. 그러는 동안 진보 정부는 상대적으로 깨끗하지만 무능하다는 틀짓기(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보수 정권과 보수 언론의 끊임없는 낙인효과였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를 싸잡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명명한 보수진영의 주장에는 국가운영 능력만큼은 보수가 한 수 위라는 어설픈 자신감이 서려있었다. 굳건하던 신화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구속에 이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몰락으로 풍비박산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러시아 방문에 앞서 청와대 간부들과 직원들에게 ‘유능해지고, 도덕성을 갖추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세 가지 주문을 각별하게 한 데는 진보 정권의 트라우마가 깔려 있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지방의회의원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를 당 간부들에게 한 것에서도 어렵잖게 예상되는 우려가 묻어나온다.

 

  지방선거의 압승에 따르는 자만과 기강 해이를 염려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지만, 난제임에 틀림없다. 역사적으로나 개별 인물로 살펴봐도 유능과 도덕성을 동시에 갖추기는 지난한 일이다. 여기에다 겸손까지 더하라는 건 사실상 이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보수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나마 유능과 도덕성이 우위에 있다는 결과물을 보여줘야만 할 까닭은 대국민 약속에 있다. 진보 진영의 강점으로 인식된 도덕성은 적폐청산과도 직결된다. 도덕적 우위는 문 대통령이 진보진영의 유전자(DNA)라고 했을 만큼 소중한 자산이다.

                                                                                         


 출범 1년여 동안 진보 정부 인사의 도덕성 문제는 보수 정부 못지않게 논란거리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조어가 정치권에 상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머지않아 있을 것으로 보이는 각료와 청와대 고위직 개편 인사에서 지금까지 비판의 대상이 됐던 도덕성 문제가 다시 시험대에 오를 게 분명하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이 병역면탈·부동산투기·세금탈루·위장전입·논문표절 등 5대 비리 관련자의 고위공직 배제 공약을 지키지 않아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례가 많아 보수 정권과의 차별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2개월 여전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낙마 사태에서 ‘부도덕성의 극치’라는 따가운 평가까지 나왔던 점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사전 검증 과정에서 피감기관 지원 해외출장, 후원금 사용의 위법성 같은 문제를 걸러내지 못한 사실 자체보다 어처구니없는 감싸기가 더 치명적인 논란거리였다. 도덕적 잣대로 재야할 사안을 ‘국민 눈높이엔 맞지 않지만 법적으로 문제없다’며 위법 여부의 잣대를 들이댄 것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


 무리하게 밀어붙인 인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장관에게는 ‘내로남불 결정판’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부의 대물림’을 강하게 비판하며 ‘상속에는 세금을 더 매겨야 한다’는 법안까지 발의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장모로부터 건물을 물려받을 때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증여를 분할해 받은 이중성이 탄로 났다. 특목고 폐지를 주장했던 그가 딸을 국제중학교에 진학시킨 ‘내로남불’은 애교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2월 문 대통령이 청와대 각 비서관실에 선물한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는 앞으로 도덕성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하라’는 뜻을 담은 ‘채근담’ 경구는 ‘내로남불’이 나타날 때마다 호출될 개연성이 크다.


 유능함에 의문부호가 붙는 고위공직자들은 청와대 보좌진과 내각의 곳곳에 보인다. 내각 개편은 무능 판정을 받은 각료를 과감하게 퇴출하고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는지를 측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70% 안팎을 넘나드는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장관과 정책의 지지도는 국무총리실의 업무평가와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위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부처에는 인재 풀을 대폭 넓혀 모두가 인정하는 유능한 인사를 발탁해야 한다. 혼란스럽고 모순이 드러난 일부 경제정책은 종합적이고도 정교한 수술이 필요한 부위다. 외교·안보와 남북관계 외에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분야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약간 더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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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미국 민주당과 한국의 자유한국당이 보조를 맞추고 있는 듯한 모습은 역설적이다. 야당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미국의 진보정당과 한국의 보수정당이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어서다. 이질적인 두 나라 정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훈수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북미정상회담에 딴죽을 거는 듯한 공통분모를 지녔다.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미국 민주당 지도부는 지난 4일 북미정상회담 합의에 포함돼야 할 다섯 가지 원칙을 담은 서한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 서한은 북한의 핵무기는 물론 생화학 무기까지 폐기하는 것을 첫 번째 요건으로 제시했다. 로버트 메넨데즈 의원은 여기에다 북한 인권 문제도 이번에 다뤄야 한다고 숟가락 하나를 얹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밖에도 북미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들과 상의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의회가 언제든지 제재 의무화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제재 유예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을 막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무리한 요구는 상대가 있는 협상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북한 비핵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협상에 곁가지를 더해 달라는 것은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민주당의 이 같은 행태는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이 목전에 둔 11월 중간선거와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벌써부터 트럼프의 노벨평화상까지 거론되고 있기도 해서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민주당의 행태를 참고 넘길 리 만무하다. 트럼프는 주무기인 트위터로 대응했다. “오바마, 슈머(상원 원내대표), 펠로시(하원 원내대표)는 북한에 관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정상회담에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다!” 민주당 정권이 ‘전략적 인내’만 하고 있었을 뿐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음을 꼬집은 것이다.


 트럼프에게 까칠하기로 유명한 뉴욕 타임스도 칼럼을 통해 민주당의 태도를 비판했다. 한반도 전문가인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민주당, 유치하게도 북한에 대한 트럼프의 노력에 저항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힐난했다.

 

   “(민주당에는) 충격과 공포! 트럼프 대통령이 진짜 무언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북한과의 평화협상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깎아내리는 데 더 관심 있어 보인다.” 국무부 한반도 담당관을 지낸 조엘 위트 스팀슨센터 수석연구원도 민주당의 요구사항이 그 누구도 달성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회담 실패를 위한 처방전과 같다고 쏘아붙였다.

                                                                                          


 한국의 자유한국당도 미국 민주당의 대응과 흡사하다. 홍준표 대표가 북미정상회담을 ‘위장평화회담’ ‘우려했던 최악 시나리오’로 매도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지난 7일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더 나아가 “종전 선언이 이뤄지는 것을 결단코 반대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자유한국당 의원 36명도 트럼프에게 전달하는 성명서에서 북한의 생화학무기 폐기, 인권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해야한다며 이상주의에 함몰된 모습을 드러냈다.


 궁합이 맞지 않은 두 당이 비현실적인 주장을 함께 펼치고 있는 것에서는 ‘당파적 심술’이라는 공통점이 엿보인다. 미국의 중간선거와 한국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여기에 포함된다. 진보적인 미국 민주당이 북미정상회담의 파탄을 고대하는 세력으로 꼽히는 군산복합체·네오콘(강경 신보수진영)과 보폭을 같이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민주당에게는 트럼프가 북핵문제 해결에 성과를 내는 건 ‘끔찍한 시나리오’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미국 외교정책 기득권세력의 힘이 어느 정도 막강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 일단 성공하더라도 뛰어넘어야할 장애물이 적지 않음을 실감하는 전조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고대하고, 태극기 집회에서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친미 극우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게 자유한국당이라는 점은 또 다른 역설의 하나다. 독재정권의 후신으로 종북을 빌미삼아 인권탄압에 앞장서온 반인권 세력이 북한의 인권문제에 더욱 관심을 쏟는 듯한 언행도 모순적이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북미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미국 민주당과 한국의 자유한국당의 초당적 지지를 이끌어내야 시너지효과를 얻을 있다는 점이 한미 정상에게는 또 다른 과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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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여행을 하다 허름한 호텔에 묵을 수밖에 없게 됐다. 그것도 빈 방이 없어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써야 했다. 밤이 깊어졌으나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다른 침대의 길손도 잠이 오지 않는지 잠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 손님이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신사는 얼른 일어나 여비가 든 지갑과 귀중품이 든 가방을 들고 물품보관소를 찾아갔다. 잠든 사이에 옆 침대 손님이 자기 귀중품을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게다. 그 때 호텔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같은 방에 계신 다른 분도 조금 전 귀중품을 맡기고 가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의심이 이럴진대 70여 년 동안 적대관계로 지낸 사이라면 오죽할까 싶기도 하다. 북한과 미국이 사상 첫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까지 확정하고도 취소 소동을 벌인 것은 극도의 불신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다. 회담 취소를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정대로 다음달 12일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을 숨기기 어렵다.

                                                                                   


 “그럼 그렇지, 그 버릇 어딜 가겠어.” 북한이 지난 16일 남북 고위급 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맥스선더 한미연합 공중훈련을 빌미삼아 돌연 무기연기하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 취재를 둘러싸고 막판까지 남측 기자들의 애를 태우는 일이 벌어지자 보수진영에서 터져 나온 일성이었다.

 

  북한은 핵실험장 폐기 행사에 전문가를 초청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아 신의가 반감됐다. 일련의 돌출 행동은 북한이 올 들어 남북관계에서 지난날과 달리 신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임해 남측 여론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신뢰를 쌓아가던 참에 나온 것이어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지난 주말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다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상호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 다행스럽다. 6월 1일 남북고위급 회담 재개에 이어 군사당국자회담, 적십자회담을 잇달아 열어 ‘4·27 판문점 선언’을 실천하면서 생채기를 치유하는 과제가 중요해졌다.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최선희 외무성 미국 담당부상이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도 북한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상대방을 막말로 비난하는 사례는 북한의 등록상표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북미 실무접촉을 약속해 놓고 북한 측이 나타나지 않은데다 연락조차 끊은 것도 신뢰 궤도이탈이었다. 이 같은 복합적인 사건은 트럼프 대통령의 되치기 협상 기술에 말려드는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트럼프가 북한의 주특기인 벼랑끝 전술로 회담의 주도권을 빼앗아 온 것이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상국가 지도자 이미지 부각이었다. 국제사회의 정상적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하려 했던 북한의 신의·성실 훼손은 짧은 기간이나마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진정성까지 의심받는 자충수나 다름없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트럼프의 현란한 협상 기술도 한판승을 올린 것처럼 보이지만, 신뢰성에 의문을 남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보다 동맹국인 한국에게 엄청난 무례를 범했다. 자신의 초청으로 열린 한미정상회담 직후 문재인 대통령의 뒤통수를 친 것은 협상의 기술을 감안하더라도 신뢰를 잃는 처신이었다. 앞으로 다른 동맹국들도 트럼프의 말을 끝까지 믿어야할지 섣불리 단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5·26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도 만만찮음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확실하지만, 미국이 적대 관계를 종식하고 체제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것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걱정이 그것이다.


 한번 믿음을 잃으면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 법이다. 스위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헨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신뢰는 유리거울 같은 것이다. 한번 금이 가면 원래대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한다고 해도 높은 수준의 신뢰가 한꺼번에 구축되기는 어렵다. 북·미와 한국의 앞길에는 크고 작은 돌부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신뢰는 진정성에서 나온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에 모두 ‘근육질 지도자’가 포진하자 은근한 걱정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의 ‘애송이 지도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분위기가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던 터여서 더욱 음울했다. 일각에선, 착해 보이기만 한 문재인 대통령이 하필이면 이때 한국 지도자로 뽑혔을까 하는 불운 타령도 늘어놓았다. 문 대통령을 ‘종북’이라고 비난하기에 급급한 보수진영이 특히 그랬다. 문 대통령이 국정 가운데 외교안보 분야가 가장 취약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곁들여졌다.


 올 초부터 급반전을 이룬 한반도 정세를 복기해 보면 동전의 양면 같은 우연과 필연이 모두 행운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새해 첫날 북한 신년사가 남북관계의 분수령이 된 데는 평창 겨울올림픽이라는 운명적 매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 1월1일 신년사에서 북한 대표단을 파견하고 이를 위해 남북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 있다고 제안하는 징검다리가 된 게 평창 겨울올림픽이다. 체면과 명분을 중시하는 북한이 이명박 정부 이래 오랫동안 대결 국면상태였던 남북관계의 매듭을 풀 계기를 찾는 데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은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에다 북한에게 우호적인 남쪽 진보정권의 존재는 플러스 알파 이상이었다. 북한이 문 대통령에게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중재역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신뢰감이 바탕에 깔린 덕분이다. 이는 남북한 양측에 행운의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올림픽이 있더라도 강경노선을 선호하는 보수정권이 남한에 존재했다면 북한이 스스로 약점을 보이면서까지 속내를 터놓기 껄끄러웠을지도 모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존재도 지금까지만 보면 행운을 낳고 있는 듯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여겨진 트럼프 대통령은 알고 보면 평소에도 통 큰 협상의 주인공이었다. 강대국의 명분이나 자존심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트럼프여서 김정은을 일단 믿어보자고 나선 것일 게다.

 

  국무장관 시절 ‘전략적 인내’에 익숙했던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었다면 진보정권임에도 이처럼 과감하고 전광석화 같은 거래를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북한에 늘 속아왔다고 생각하는 민주당 정부라면 돌다리도 두드려보며 천천히 건너려 했을 개연성이 높다. 미국 조야에서는 북미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가 확정된 지금도 ‘신뢰하되 검증하라’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말보다 ‘불신하고 검증하라’는 분위기가 강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냉전 시절 화해와 긴장 완화는 미국의 보수적인 공화당 정부 때 주로 나왔다. 19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 비밀 회담으로 미·중 화해를 이끌어낸 것은 역설적이게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공화당 정부였다.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과의 몰타 정상회담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한 것도 공화당의 조지 부시 대통령(아버지)이었다.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역사적인 담판을 눈앞에 둔 트럼프와 김정은은 이제 ‘신뢰’라는 단어만 명심하면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다. 70여 년이란 긴 세월동안 불신 속에서 대결해왔기에 티끌만한 오해의 소지도 치명타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잖아도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터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8일 이란 핵 협정에서 탈퇴를 선언한 것도 불신이 바탕에 깔렸기 때문이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오는 23~25일 폭파 방식으로 폐기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신뢰를 먼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긍정적인 조짐으로 평가할만하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 합의 후 북한이 국제사회가 원하는 핵시설을 언제, 어디든 사찰하도록 하는 검증방식을 수용하면 의심의 여지는 현격히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미국은 북한 체제보장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과 실천과정에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평화체제는 북한이 오랫동안 줄기차게 요구하고, 미국이 기피해온 현안이다.


 남북한이 함께 추구하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이라는 필연은 우연을 매개로 삼으며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역사학자 E. H. 카가 우연을 매개로 필연이 관철된다고 했듯이 말이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의 동방정책과 시민의 열망이 쌓여 우연 같은 필연을 낳았던 것처럼 남북한과 미국은 역사적 행운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평화를 위한 신념과 운명도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