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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인권과 진실보다 더 큰 국익은 없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의 대명사처럼 됐지만,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조작의혹도 드레퓌스 사건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간첩혐의라는 본질적 성격은 물론 집권세력의 행태와 사회분위기가 모두 흡사하다.

 

   우선 피고인인 유우성 씨가 한국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탈북자다. 게다가 그는 화교출신이다. 군사 기밀을 독일에 넘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기피대상인 유대인이었던 점과 비슷하다.

 

   단순히 간첩을 잡으려는 의도를 넘어 고도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됐을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도 유사하다. 프랑스 군부는 진범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 대신 드레퓌스를 처벌해 독일군의 관심을 돌리고 허위 정보를 유포하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유우성 씨 사건은 그를 채용한 야당출신 서울시장에게 타격을 입히려는, 깊은 뜻이 내재돼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사 왔다.
                                                                     

 

  유씨가 1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자 국가정보원이 유일한 물증인 북한 출입경 서류를 조작해 간첩행위를 입증하려한 것은, 프랑스 군부가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니라는 확증을 얻은 후에도 진실을 은폐하려 한 행위와 근사하다.


 

    드레퓌스 사건에는 국가주의를 앞세운 왕당파와 보수적인 가톨릭 교계, 국수주의적인 우익언론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드레퓌스를 옹호한 소설가 에밀 졸라 같은 지식인들을 ‘국가안보를 해치는 몹쓸 자들’이라고 매도하기에 바빴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도 왠지 기시감이 보이지 않는가? 새털처럼 가벼운 입으로 자주 구설을 자초하는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중국정부가 가짜 공문서라고 발표하자, 중국 후진국론을 들고 나와 반박하다 또다시 망신을 당했다. “선진국이 안 된 국가들에서는, 뭐 꼭 중국이 그렇다고 제가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 정부기관에서 발행한 문서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익을 지키는 일인지 국익을 해치는 것인지도 계산하지 못하는 판단력을 보면 그가 한국 최고의 대학을 나온 검사출신이 맞는지 의아스럽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자료 사진>

 

   위조서류를 만들어낸 국정원 협력자가 자살을 시도하면서 명백한 조작사건임이 드러났지만, 박대출 새누리당 대변인은 증거조작과 간첩혐의는 별개라며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다. 사법부가 유일한 간첩혐의 증거는 출입경 기록이라고 명시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걸 보면 그가 진실을 생명처럼 다루는 언론인 출신이 맞는지 반문하고 싶다.

 

  일부 언론이 증거조작이란 본질을 외면한 채 물타기로 국정원을 비호한 행태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의 프랑스 우익언론과 빼닮았다. 이름을 네 번 바꾸고 화교임을 숨긴 사실을 부각시켜 물증만 없을 뿐 심증은 뚜렷하다는 태도였다. 대부분의 보수신문과 방송은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졌지만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했다. 지난 주 국정원 협력자의 자살기도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 되자 마지못해 국정원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더욱 걱정스러운 건 얼굴 없는 국민의 언동이다. 유력 신문 인터넷 기사들에 달린 댓글은 섬뜩하다. 간첩 잡는 일이라면 증거를 조작도 좋다는 글이 넘쳐난다. “간첩 잡는 국정원 무력화세력들은 어느 나라 인간들인가?” “인권법을 들먹이면서 반국가행동하는 놈들, 간첩죄 방조자 아닌가 의법처리해야 한다.” “간첩 잡는데 혐의가 문제지, 간첩 잡는 과정에서 서류조작이 필요하면 그것도 방법이다.” “정보를 넘긴 게 확실한가가 중요하지 서류조작이 무슨 큰 죄냐?” “본질을 파 보라. 간첩을 두둔한 자는 같은 부류로 봐야 한다.” “본질은 간첩사건인데, 종북수구들은 고작 서류 위조타령이나 하다니...”
                                                                   

 

   이런 분위기에서 ‘열 명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명의 무고한 시민이 억울하게 처벌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법언을 들먹이는 건 구차하고 사치에 가깝다. 드레퓌스 사건은 진실과 정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국익과 국가안보가 얼마나 폭력화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훗날 프랑스 총리를 역임한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이렇게 일갈했다. “국가이익, 그것이 법을 위반할 힘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법에 대해 말하지 말라. 자의적인 권력이 법을 대신할 것이다. 오늘 그것은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사람을 칠 것이며, 국가이익은 이성을 잃은 채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 채 쳐다만 볼 것이다. 정권이 국가이익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만약 그것이 드레퓌스에게 적용된다면 내일 다른 누군가에게 적용될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3월10일자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