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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인사 여론 떠보기 1998-02-09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됐을 당시 미국의 정치여론을 주도한 언론인은 월터 리프먼과 헨리 루이스 멘켄이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였던 두 사람의 필봉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워싱턴 정가의 희비가 사뭇 엇갈릴 정도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두사람은 루스벨트를 마구 깎아내렸다. 멘켄은 당원들이 전당대회에서 「가장 약한 후보」를 애써 골라 지명했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여론」이라는 명저와 함께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리프먼은 한술 더 떴다. 그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란 중책을 맡기엔 주요자질을 단 한가지도 갖추지 못한 「상냥한 보이스카우트 단원」같다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런 루스벨트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더보기
[여적] 주고 욕먹는 훈장 1998-02-07 산악인 안드레아스 헤크마이어는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을 세계 최초로 오른 뒤 나치정권이 주는 훈장 「산악운동의 영웅상」과 축하금 3백마르크를 받고 카 퍼레이드까지 벌였다. 이를 두고 세계 산악계에선 숭고한 산악정신을 나치정권에 팔아넘긴 행위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헤크마이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치정권 또한 훈장을 주고 욕얻어 먹은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손꼽힌다.우리나라도 8,000m이상 고봉과 7,000m급 거벽을 정복한 산악인에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체육훈장을 준다. 1977년 고상돈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8,848m의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뒤부터다. 이 훈장을 탄 사람만 이미 150명에 가깝다. 그러자 훈장을 마구 나눠주듯하는 처사를 마뜩찮아하는 산악인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훈장.. 더보기
[여적] 새 정부의 작명 1998-01-14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김정희였다. 그가 스스로 지은 예명이나 호는 무려 503개나 된다. 귀양살이의 서러움이 담긴 노구가 있는가 하면 취흥이 도도할 때 문득 떠올린 취옹, 공자를 생각하면서 붙인 동국유생도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단연 우리 귀에 익은 추사였다.비록 김정희가 아니라도 이름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강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름의 상징성을 너무 신비화하다 보면 「이름의 미신」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다. 고대 로마인들이 이름 좋은 사람부터 전쟁터에 보낸 것도 미신 탓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무런 전공이 없던 스키피오를 일약 지휘관으로 발탁한 것은 단지 이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다. 요즘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진영이 .. 더보기
[여적] 장애인과 정치 1997-11-12 3년전 뉴욕의 관광명소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장애인 차별 빌딩」으로 낙인찍혀 미국사회의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다. 미국 장애인권익보호협회가 법무부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빌딩은 장애인 편의시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1931년에 완공돼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 법도 하다. 하지만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연방정부의 판정이 나와 막대한 예산을 들여 100층이 넘는 빌딩의 개수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우리나라에서라면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하버드대가 지난 9월 케네디 스쿨에 입학한 한국인 척추마비 학생을 위해 60년이 넘은 유서깊은 건물의 출입문을 뜯어고쳤다는 소식을 상기해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세계 중심국이 되겠다고 어쭙잖.. 더보기
<정동칼럼> 대권실험의 비극 1997-10-25 매화 옆의 바위는 예스러워야 제격이다. 소나무 아래 바위는 거친 듯해야 제맛이 난다. 대나무 곁에 놓인 바위는 앙상한 것이라야 어울린다. 화분 안에 얹는 돌은 작고 정교해야 좋다. 중국 고사에 적실하게 묘사된 명장면이다. 이렇듯 삼라만상이 제자리에 있을 때라야 저절로 격조가 배어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우아하고 품격이 넘쳐나도 있을 자리가 아니면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하물며 대자연의 으뜸인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적재적소라는 말이 생겨난 연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올 대선정국을 관전하면서도 새삼 제자리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낡아빠진 정치풍토에 한줄기의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를 모아온 이른바 영입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한계성은 단지 본인들의 안쓰러움에 그.. 더보기
[여적] 월드컵 본선 4연속 진출 1997-10-20 박찬호선수와 월드컵 축구대회 예선경기가 없었다면 올 한해를 어떻게 넘겼을까 한번쯤 자문해보지 않은 우리 국민은 없음직하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구석을 찾아봐도 실낱같은 희망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집단우울증에 시달려온 우리 국민에게 박찬호와 월드컵축구 대표팀은 구세주였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더구나 축구는 우리국민 전체의 자존심까지 걸린 스포츠다.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이라는 쾌거를 사실상 결정지은 우즈베키스탄과의 어웨이경기는 한국축구의 최대약점이었던 골 결정력 부재를 너무나 속시원하게 해소시켜 준 한판이기도 하다. 온 국민이 희열하는 모습을 보느라면 국민대통합의 청량제가 달리 없지 않나 싶다. 대리만족, 카타르시스 등 심리학에서 등장하는 효과들이 우리에겐 어쩌면 부수적인지도 모.. 더보기
[여적] 여중고생 흡연 1997-08-27 담배회사 사장의 손자가 금연운동을 벌인다면 믿어지지 않을 게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담배판촉 때문에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미국에서 실제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 미국에 담배를 유행시킨 주역이자 담배회사 「레이놀즈」로 억만장자가 된 리처드 레이놀즈의 손자 패트릭이 바로 그다. 그는 담배기업 손자답게 19살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여자친구들에게 멋있게 보이려는 게 직접적인 동기였다.그러다 35살때 담배를 끊어 버렸다. 금연과 때를 같이해 그는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레이놀즈 주식을 깡그리 팔아치우고 담배광고금지법 제정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의 금연운동 이유는 이렇다. 『사람들은 나 자신을 먹여 살린 회사의 손을 물어뜯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를 먹여 살린 손인 담배산업이 실은 수백만명을 죽이.. 더보기
<정동칼럼> 진퇴의 미학 1997-06-21 정치인은 이따금 배우에 비견되곤 한다. 양쪽 모두 연기를 필요로 하는 데다 인기를 먹고 사는 공통점을 지닌 속성 때문일 게다. 퇴장이 멋져야 명배우로 갈채를 얻듯 정치인도 끝맺음이 산뜻해야 평가받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지 오래다. 우리네 선인들은 안분과 더불어 「시중」을 공직 윤리와 처신의 기준으로 삼아 왔다. 시중은 나가야 할 때 나가고 물러가야 할 때 물러감을 일컫는다. 사실 나가는 것보다 물러날 때를 가리는 게 사뭇 어렵다. 오죽했으면 시경에까지 「시작을 잘못하는 사람은 없어도 끝맺음을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경종을 울려 놨을까.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 법언을 익히 들어오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현실로 닥치면 여간해서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모양이다. 정치란 마약과 같아 한번 발.. 더보기
[여적] 폴 포트의 투항 1997-06-20 캄보디아를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킬링 필드」를 맨먼저 떠올린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적화된 1975년, 수천명의 시체들이 널브러진 살육장을 목도하고 붙잡혔다가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 디스 프란. 먼저 빠져나간 동료 뉴욕 타임스지 기자 시드니 센버그와 그가 재회의 기쁨으로 힘차게 포옹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존 레넌의 「생각하세요」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킬링 필드」는 그곳에서 3년간 억류됐다가 탈출한 디스 프란이 쓴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데다 그의 역을 맡은 행 느고르도 캄보디아 억류생활끝에 탈출한 경험이 있어 영화의 생동감을 더해준다.「킬링 필드」의 악명높은 실제 주인공은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인 것이나 다름없다. 월남 패망직.. 더보기
[여적] 국군 포로의 비극 1997-06-13 전쟁만큼 걸작을 낳는 문학적 소재도 드물게다. 최인훈을 우리 문단의 거목으로 평가받게 했던 「광장」 역시 6·25전쟁이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싶다. 주인공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때문에 시달림을 당하다 북으로 올라가 그곳 정치체제에 가담해 보지만 북의 「광장」, 남의 「밀실」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전쟁포로가 되어 제3국행을 택하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게 소설의 줄거리다. 이렇듯 전쟁과 포로는 바늘과 실에 비유될 만큼 숙명적인 관계다. 극적인 장면이라면 6년6개월동안 공산 베트남의 포로수용소에서 전기고문 등 엄청난 가혹행위를 당한 적이 있는 미 공군조종사 더글러스 피터슨이 베트남주재 미국대사로 부임한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지난달 9일의 일이다.인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