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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

선정주의는 필요악이 아니다 ‘언론의 선정적 보도행태는 태생적 숙명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선정주의’(Sensationalism),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역사가 19세기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로는 세계 최초의 신문으로 공인받는 17세기 초의 독일 ‘아비조’(Aviso)에서도 그 싹을 발견할 수 있다니 말이다. 미국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언론상의 제정자가 본격적인 선정주의의 원조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퓰리처상을 만든 조지프 퓰리처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 퓰리처가 신문으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발상을 처음으로 해내고,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흥미본위의 선정보도 경쟁을 벌여 오늘날의 언론 상업주의를 정착시켰다. 퓰.. 더보기
고려대장경의 비밀--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천년의 신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새 한지에다 불과 몇 달 전 인쇄한 것처럼 보이는 저 두루마리 책이 1천 년 전의 것이라니. 서울대학교 인근에 있는 호림박물관에서 100권에 가까운 초조대장경 인출본(印出本·인쇄본)을 본 첫 느낌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게다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한데 모은 불교 경전 총서이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교지식의 총람이라는 대장경의 1천 년 전 인출본이라는 점을 떠올리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격 때문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대부분 변색이나 훼손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전이었다. 훼손된 인출본도 더러 있긴 하지만 그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온 보관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탓이다. 종이와 먹 1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초조대장경 인출본이 지금까지도 마치 새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는 비.. 더보기
우즈베키스탄의 세종대왕, 울루그베그---실크로드 여행(2)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푸루스트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이자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세종대왕격인 울루그베그의 유산이 무수히 남아 있다. 울루그베그와 세종대왕은 닮은 점이 숱하게 많다. 우선 두 제왕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것부터 닮은 꼴이다. 울루그베그(1394~1449)는 세종대왕(1397~1450)이 그렇듯이 빼어난 학자적 군주였다. 정치보다 학문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울루그베그는 자신이 세운 메드레세(이슬람 국가의 고등교육기관)에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이다”라고 기록해 강력한 교육의지를 펼쳐보였다. 세종대왕 당시의 집현전과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울.. 더보기
같은 삶 다른 삶--고려인 김병화와 황만금---실크로드 여행 (1)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준다.” 8월 하순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중심국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감동적인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인들의 삶이다. 쌍벽을 이루는 김병화(1905~1974)와 황만금(1921∼1997)은 고려인 1세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단순히 소련 정부가 수여하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아서만이 아니다. 두 사람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이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피눈물을 극복하고 기적을 일궈낸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소련의 최고 훈장을 받고 ‘노력영웅’.. 더보기
아부에도 품격이 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심심풀이로 리처드 스텐걸의 (참솔)이란 책을 읽었다. 단순한 처세서나 자기계발서쯤으로 여긴 것과 달리 꽤 깊이가 있는 아부 문화사다. 미국 시사주간지 의 수석 편집장을 지낸 저널리스트가 쓴 책이니 날탕은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던 터이다. 지은이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함께 이란 책도 썼기에 더욱 그랬다. 이란 번역판 제목은 낚싯줄에 가깝게 느껴진다. 원제가 이니 말이다. 구체적인 아부 지침까지 주니 전혀 근거 없는 과장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본류는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역사를 뒤지며 아부의 실체를 해부한 것이다. 지은이는 아부를 ‘전략적인 칭찬, 즉 특별한 목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의 칭찬’이라고 정의한다. ‘아부만큼 효과가 뛰어난 .. 더보기
개념없는 조영남의 일본 대지진 피해 돕기 희망음악회 <서시> 개사곡 가수 조영남이 지난 22일 KBS 1TV ‘일본 대지진 피해 돕기 희망음악회’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개사한 노래를 부른 일이 네티즌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게 억울할까. 그가 이 시의 개사곡을 만든 것만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다 때와 장소를 가릴 줄 모르는 분별력은 ‘개념 없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개념 없기로는 곡을 사전에 검토했을 KBS도 마찬가지다. 방송 직후부터 KBS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도대체 역사를 알고 하는 행동이냐”는 등의 비판 글이 잇달아 올라오고 있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듯하다. 그러자 KBS가 “이웃나라로서 대참사를 겪은 일본을 돕자는 좋은 취지에서 마련한 행사인데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는 입장만 밝혔다고 한다. 윤.. 더보기
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부는 진짜 이유 지난해 초반 이후 최근까지 대기업에서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사이에 기업에서도 인문학 바람이 거센데다 동양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를 기업 임원들이 새삼 즐겨 읽는다고 이상할 건 없지만 유례 없는 현상이어서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몇몇 대기업의 경우 전 사원이 를 읽고 토론했으며, 더욱 주목할 만한 일은 국내 최고 글로벌기업인 삼성 그룹의 수뇌부와 핵심간부들이 이 책으로 ‘열공’ 중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2년 6개월 만에 복원된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직원들이 를 읽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s)는 취지라고 한다. 하긴 조르주 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 같은 지도자도 정국이 난마처럼 헝클어져 해법을 찾기 어려울 때면 홀로 .. 더보기
전태일과 경향신문 조영래의 (돌베개·전태일기념사업회)은 전태일과 경향신문 이야기를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채롭다. 그것도 드라마나 영화로 치면 클라이맥스로 돋움 닫는 대목에서 하이라이트로 언급된다. 오프라인(종이신문)의 한정된 지면 때문에 ‘서재에서’ 칼럼에 생략했던 부분에는 때로는 가슴 아프고, 때로는 감격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 그 시작은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분신, 산화하기 바로 한 달여 전인 10월7일부터다. 경향신문사 신문 게시판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방금 나온 석간신문 한 부를 사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으로 달렸다. ‘인간시장’(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그곳을 이렇게 슬픈 이름으로 불렀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동회(전태일이 만든 평화시장 종업원 친목회) 회원들은 바라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