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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

개념없는 조영남의 일본 대지진 피해 돕기 희망음악회 <서시> 개사곡

                                                   


 가수 조영남이 지난 22일 KBS 1TV ‘일본 대지진 피해 돕기 희망음악회’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개사한 노래를 부른 일이 네티즌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게 억울할까. 그가 이 시의 개사곡을 만든 것만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다 때와 장소를 가릴 줄 모르는 분별력은 ‘개념 없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개념 없기로는 곡을 사전에 검토했을 KBS도 마찬가지다. 방송 직후부터 KBS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도대체 역사를 알고 하는 행동이냐”는 등의 비판 글이 잇달아 올라오고 있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듯하다. 그러자 KBS가 “이웃나라로서 대참사를 겪은 일본을 돕자는 좋은 취지에서 마련한 행사인데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는 입장만 밝혔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은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2년 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해방 6개월을 앞두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생체실험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까지 제기됐을 정도다.

 조영남은 이미 ‘서시’를 원작과 다른 가사로 불렀다가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로부터 공개석상에서 따끔한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 방송된 MBC TV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세시봉 특집’에서였다. 당시 윤형주는 “나도 (윤동주의) ‘서시’를 가사로 한 노래를 작곡하려 했지만, 고인의 유해를 수습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시도 음률이 있는 노래다. 네 하찮은 작곡 실력으로 원작을 훼손하지 마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정색을 하고 일침을 놓았다. 

                                                   


 조영남이 일본과 관련해 생각 없는 언행과 처신을 보인 게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5년 4월 일본의 극우일간지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아래 전문 참조) 내용으로 물의를 일으켜 KBS 프로그램 MC에서 물러나야했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일본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지난 9월(2004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신사를 본 후 ‘속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2005년 1월 펴낸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랜덤하우스 코리아)이라는 그의 저서 일본판 발간을 계기로 이뤄진 인터뷰였다. 그는 “보통의 신사와 다름없었다. 한국과 중국이 참배는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기에 대단한 장소인가보다 하고 세뇌당해 있었다”며 일본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참배를 대수롭지 않은 듯이 여겼다. 그는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로 뜨거운 한국에 비해 차분한 대응을 하는 일본을 보면 냉정하게 대응하기로는 일본 쪽이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그는 2004년 9월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문화인 초청프로그램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주최 측이 “어디에 가고 싶으냐”고 묻자 “야스쿠니 신사에 가고 싶다”고 대답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조영남의 야스쿠니 ‘참배’는 산케이신문이 나중에 ‘방문’으로 정정 보도했으나 사안의 중대성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는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이 합사된 곳이어서 일본 총리나 각료가 참배하면 한국은 물론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자극해 외교문제로 비화하는 곳이다. ‘독도와 교과서 문제에 냉정히 대처하는 일본을 보면 일본 쪽이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는 발언 역시 약간의 지각만 있는 사람이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조영남의 ‘문제 발언’은 이번에도 그랬듯이 역사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불거지고 있을 무렵이어서 한층 거센 반발을 몰고 왔던 것이다. 반일 감정과 산케이신문의 극우 성향을 감안하면 인터뷰에 응한 것 자체부터 안일한 판단이었다.


 조영남의 글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는 모습을 보며 그네들이 나에게 되묻는 것도 같다.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다. 너희들은 이순신을 섬기지 않느냐.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나 도조 히데키를 위한 제사를 지낸다. 너희들이 안중근, 윤봉길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 우리가 상관 안 한다.’ 이 경우 내 쪽에서 즉각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 “일본 신사 참배를 시비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우리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우리의 반일 감정은 병적으로 느껴진다. 반일이 친미를 불렀다. 일본이라는 큰 나라, 좋은 나라를 옆에 두고 친미로 일관해온 60년 삶이 억울하다”

 이래도 그의 평소 주장대로 ‘광대가 한 짓’ 쯤으로 치부하고 내버려둬야 하는 걸까.

■ 조영남의 산케이신문 인터뷰(2005년4월24일자)기사 전문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로 반일감정이 강한 한국에서 올해 1월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을 출판한 한국의 국민적 가수, 조영남씨(61). 한국에서의 역풍은 거셌지만 “세상 일에 대한 견해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고 지금도 ‘친일’을 굽히지 않는다. 저서가 일본에서 번역되면서 방일한 조씨가 ‘일본에 대한 생각’과 ‘이후의 한일관계’에 대해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친일’하게 된 것은 아니다. 직업상 몇 번이나 방일한 적이 있는 조씨는 일본의 인상을 “풍족하다. 사람이 많다. 이 정도로 큰 나라인데도, 꽤 질서가 잡혀 있다”고 말한다. 아시아의 이웃나라지만 한국과는 다른 풍토, 사람, 문화 등에 흥미를 가졌다.
 3년 전에 한·일이 공동개최한 월드컵. 한국이 4강에 진출하자 많은 일본인이 한국을 열심히 응원해 주었다. 이 감동으로 ‘지일파’를 선언, 다음해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방일. 국회 연설하는 장면을 한국에서 TV로 보고 있던 조씨는 “의사당에서 18번이나 박수가 나왔다. 한국이었다면 외국의 원수가 국회연설을 해도 처음과 마지막에 박수치는 정도일 텐데. 한국인으로서 기뻤다”며 ‘친일선언’을 했다.
 ‘지일파’ ‘친일파’로서 한국의 유력지 ‘중앙일보’에서 칼럼을 연재하고 있던 작년 9월,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문화인 초청 프로그램으로 방일. 어디 가고 싶은 장소가 있는지 물었다. 조씨는 생각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무대… 아니야, 이 때 생각난 것이 야스쿠니신사였다”고 한다. “아니 야스쿠니라뇨…” 교류기금의 담당자는 말을 잃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조씨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속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신사와 다름없었다. 참배는 안 된다고 한국과 중국이 목청 높여 외치고 있어서 대단한 장소인가 보다 하고 세뇌당해 있었다”고 조씨는 웃는다
 참배를 마친 조씨는 “그들(일본인)은 자신들의 조상이 아무리 잔인한 일을 했다고 해도 조상이니까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것이고, 우리들은 범죄자 취급할 수밖에 없어서 합사와 참배는 안 된다고 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골은 메워지지 않아도, 조씨는 그 한가운데 서서 응시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친일선언’을 해도 당연히 일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로 뜨거운 한국에 비해, 차분한 대응을 하는 일본을 보면, “냉정하게 대응하기로는 일본 쪽이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하나의 사물을 보더라도 지배한 측과 지배당한 측이 상대방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눈에 띈다. 피해를 입은 쪽은 작은 일로도 ‘으악’ 하게 되겠죠”라고 일본 측에도 이해를 구하고 있다.
 이후의 한·일 양국에 필요한 일은 “서로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상대의 기분을 이해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아무런 진전도 없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조차 막혀 있는 것이 오늘의 한일관계가 아닐까.
 ‘관계개선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고 생각한 것이 ‘친일’ 책 출판의 이유일 것이다.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 일역(랜덤하우스 고단샤)본은 1500엔으로 간행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