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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

같은 삶 다른 삶--고려인 김병화와 황만금---실크로드 여행 (1)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준다.”

 8월 하순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중심국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감동적인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인들의 삶이다. 쌍벽을 이루는 김병화(1905~1974)와 황만금(1921∼1997)은 고려인 1세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단순히 소련 정부가 수여하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아서만이 아니다. 두 사람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이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피눈물을 극복하고 기적을 일궈낸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소련의 최고 훈장을 받고 ‘노력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김병화는 두 차례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당시 김병화 집단농장이나 황만금 집단농장은 소련이 자랑하는 콜호즈의 대표적인 목화·벼 재배 농장이어서 외국에서 농업 관련 귀빈이 오면 이들 농장을 가장 먼저 방문하게 했을 정도다. 두 농장은 소련 지역에서 가장 높은 수확량의 신화를 창조한 것은 물론 한때 세계 최고의 수확량을 기록하기도 했다고 한다. 황만금은 ‘노동영웅’ 칭호 외에도 세 번이나 레닌훈장, 10월 혁명훈장을 비롯한 노동 영예메달을 받았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공훈 목화 재배업자’란 칭호도 얻었다.

 김병화는 발전을 거듭하던 고려인의 ‘북극성’ 콜호즈가 다민족 콜로즈로 바뀌는 중대 변화를 맞았으나 여러 민족이 힘을 합쳐 농업·목축·건축·문화 등의 각 부문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북극성’ 콜호즈를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김병화는 우즈베키스탄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5~8기 대의원으로도 활동했다.

 황만금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한 후 타슈켄트 남부의 얀기율의 목화공장 공급자로 노동활동을 시작했다. 타슈켄트 철도관리경영 책임자, ‘레닌의 길’ 콜호즈 지도자, 북치르칙 구역 당 관리자로 일하며,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쌓아 나갔다. 1953년 타슈켄트 주 북치르칙 구역의 ‘폴리트오트젤’ 콜호즈를 맡으면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황만금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집단농장이 번성하면서 소련 당국의 인정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콜호즈의 지도자였던 황만금은 한편으로는 학업을 계속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고급 당학교 경제과를 졸업했다. 이를 바탕으로 콜호즈에서 더욱 체계적인 지도력을 발휘해 나갔다. 황만금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해 소련 당국은 그에게 내각위원회 국가상을 수여했다. 황만금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공화국에 억압의 바람이 불었던 이른바 ‘목화사업’ 기간에 아무런 근거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됐다. 3년 반 동안 재판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91년 모든 기소가 기각되고, 이후 복권되는 불운을 겪었다.

 고려인들은 지금도 이 같은 두 사람의 영웅적인 행적을 잊지 못하고 추모한다. 타슈켄트시 백테미르 김병화 농장 한쪽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과 흉상이 세워져 있다.
                                                          


                                                 <김병화 박물관>

 두 사람의 길은 처음엔 같았지만 나중엔 조금씩 달라졌다. 반 세대 정도의 차이 때문일까?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김병화는 끝까지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남았다. 그는 지금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아버지’로 불린다. 김병화와는 달리 황만금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개방정책에 영향을 받아선지 새로운 삶에 눈을 떠 공동체 못지않게 개인의 미래도 생각하는 자본가로 변신했다.

 두 사람의 자녀교육관도 달랐다. 김병화는 자신의 사회주의 철학을 자식들의 인생에도 그대로 이입했다. 집단농장에서도 다른 농장원의 자식들과 똑같이 대우했다. 김병화의 자녀들은 소련 해체 후 하나 같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 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반대로 황만금(黃萬金)은 이름처럼 자식들에게도 일찍부터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했다. 황만금의 자녀들은 모두 백만장자로 컸다고 한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가 된 우즈베키스탄에서 거대한 온실재배로 수십만~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재력가가 된 것이다. 황만금의 자녀 중에는 한국에 진출해 거부가 된 인물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바람직한 삶을 살았을까? 평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김병화 흉상>

                                                          


                                                                                  


                                                                                      


                                                                         

                                                          <김병화 박물관 관장인 ‘장 태 에밀리아’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