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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일관된 평화를 갈구하다

입력 : 2008-04-04 17:12:14수정 : 2008-04-04 17:13:31

평화는 무조건 다 좋은 것인가? 이 물음이 한없이 절절할 때가 있다. 힘 센 ‘갑’은 총칼을 휘둘러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다반사인데도 약한 ‘을’은 언제나 말로만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 경우엔 심리적 유혹이 다가오곤 한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나 미국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이는 죽는 순간까지 유혹을 뿌리쳤지만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하긴 고대 로마의 정치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정의로운 전쟁보다 나쁜 평화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키케로의 명언은 오늘날 평화주의자들이 가장 즐기는 말의 하나가 됐다.

노르웨이의 평화학 창시자 요한 갈퉁도 평화를 위해 무력과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강대국들의 논리에 나쁜 평화론으로 맞선다.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목적뿐 아니라 수단 역시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갈퉁의 이 같은 생각을 집약한 책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들녘)이다.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저질러지는 전쟁과 폭력은 결코 평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 이라크 전쟁 5주년을 보름 전에 넘긴 미국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초강대국 미국은 국제적인 반전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계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선택했다고 강변한다.

어떤 경우든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여야 한다는 갈퉁의 생각은 ‘과정의 평화학’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칸트의 윤리학과도 상통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갈파한 손자(孫子)를 사실상 평화학의 창시자로 떠받드는 갈퉁이기에 당연한지도 모른다.

갈퉁은 평화를 총소리가 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와 모든 국민의 인권과 복지를 지켜내는 ‘적극적 평화’로 나눈다. 소극적인 평화를 ‘국가 안보 개념의 평화’, 적극적인 평화를 ‘인간 안보 개념의 평화’로 흔히 일컫는다.

갈퉁의 등록상표인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비폭력 저항이 현실성이 있기는 한가라는 회의론을 자주 불러일으킨다. 개인의 확고한 평화 철학이 어느 정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낳는다. 실제로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가 펼치는 평화적 비폭력 운동에 대한 대가로는 중국의 비평화적 무력 진압만 기다리고 있다. 언제까지나 평화적 수단을 지켜야 하는지 고뇌하는 티베트인들이 적지 않다. 갈퉁은 인도 독립을 이끌었던 간디의 비폭력 민중저항과 20세기 역사적 사건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용기 있는 개혁 같은 것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갈퉁이 학생들에게 자주 던진 질문에 이런 게 있다. “세 사람 앞에 두 개의 오렌지가 있다. 세 사람 모두 배가 많이 고파 오렌지를 먹고 싶다. 여기서 갈등이 발생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 힘 센 두 사람이 오렌지를 차지할 수는 없다. 이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답변이 쏟아진다. “공평하게 오렌지 2개를 각각 3등분한다. 제비뽑기를 해서 두 사람이 오렌지 하나씩 갖는다. 즙이나 주스로 만들면 공평하고 쉽게 나눠 먹을 수 있다. 오렌지 2개를 크기가 작은 오렌지나 다른 과일 3개로 바꾸어 하나씩 가진다. 훗날 무수한 오렌지를 가질 수 있도록 오렌지 씨앗을 심는다. 오렌지를 팔아 돈으로 나누어 갖거나 나누기 쉬운 다른 물건을 산다.”

갈퉁은 어떤 갈등이라도 이처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는 1970년대부터 남북한을 수없이 오가며 한반도 평화를 모색해 온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 휴전선으로 막힌 철길과 도로를 다시 이으라는 것도 갈퉁의 획기적인 제안 가운데 하나였다. 부산과 일본의 규슈를 수중익선으로 연결하라는 제안도 곁들였다. 자신의 조국 노르웨이에서 아내의 고국 일본까지 기차를 타고 달려보는 게 소원이어서다. 그런 갈퉁의 평화학이 한반도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