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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기부, 희생 아닌 ‘창의적 이기주의’

입력 : 2008-04-11 17:41:57수정 : 2008-04-11 17:42:48

과부의 두 렙돈과 빈자일등(貧者一燈). 지난 주말 신분을 밝히길 거부한 60대 할머니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연세대에 찾아와 1억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단상의 편린이다.


예수가 부자들의 많은 돈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더 귀하게 여겼다는 마가복음의 ‘말씀’과 부자의 만 등보다 가난한 사람의 한 등이 낫다는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의 ‘법언’은 맥을 같이 한다. 두 일화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해석도 있긴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작은 정성이 한결 값지다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60대 할머니가 기부한 돈은 ‘과부의 두 렙돈’이나 ‘빈자일등’에 비유할 수 없을 만큼 거액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뜻 깊은 기부자들은 대개 불우한 이웃에 속하는 부류임을 재확인해 주는 일임에 틀림없다. 10년 동안 수입의 대부분인 40여억원을 쾌척하고 정작 자신은 월세방에 사는 가수 김장훈의 이야기도 차원이 약간은 다르지만 큰 뜻은 마찬가지다. 끝내 익명을 고집한 할머니의 기부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 구절을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베풂의 마법사’란 별명을 얻은 메리 제인 라이언의 저서 ‘줌: 행복한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다우)은 ‘주는 행복론’을 자늑자늑하게 설파한다. 베푸는 것이 ‘단순한 적선’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행복해지는 가장 빠른 길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복음이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주었다면 그 대부분이 준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라며 ‘행복한 부메랑론’을 편 시인 월트 휘트먼의 선견(善見)을 연상케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미덕인 기부가 결코 자기희생만은 아니다. 기부는 ‘창의적 이기주의’라고 라이언은 정의한다.

그는 기부가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85가지의 일상적 예화로 오바사바하게 설명한다. 지하철의 거지조차도 기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더없이 역설적인 풍경이다. 어느날 한 여성 사회복지사가 지하철역에서 주머니를 뒤지다 차비가 없음을 확인한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없이 자신이 한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거지에게 25센트만 달라고 청한다. 거지는 흔쾌히 주었다. 사실 사회복지사인 그가 평소에 각별한 애정을 쏟아야 할 사람이 거지가 아닌가. 라이언은 기부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감동마케팅을 펼친다.

라이언은 기부에 관해 몇 가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기부란 도덕적 억압이라기보다 자유로우면서도 살가운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요한 단서를 붙인다. ‘기부를 억지로 하지 말 것.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만 할 것.’

그가 자선과 관대함에도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자선은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관념이지만, 관대함은 그 결과를 보지 않고도 마음이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베풀게 되는 것이다.

‘줌…’에서는 미시간대 사회과학연구소가 5년간 423쌍의 노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1년에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도운 적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수명이 40~60% 정도 긴 것으로 입증됐음을 좋은 실례로 든다.

독일의 정치경제 전문기자 토마스 람게가 ‘행복한 기부’에서 제시한 2-1=3이라는 독특한 수식이 떠오른다. 람게는 이 수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누면 더 많아진다. 왜냐하면 준다는 것은 잘 조직되고 올바르게 이해되기만 한다면, 사회자본과 인간자본에 투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고 나누는 것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돈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無財七施)’를 생각해 보면 안성맞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