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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佛원로작가의 직관·유머 흐르는 산문

입력 : 2008-04-25 17:21:25수정 : 2008-04-25 17:21:31

소설 이외에 잡문을 일절 쓰지 않았음은 물론 후학들에게도 늘 그걸 당부하곤 했던 황순원의 눈으로 보면 아들 동규는 불효자나 다름없다. 시인 황동규는 시보다 산문이 더 쓰기 좋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으니 말이다. 황동규는 실제로 아버지와 다른 문학을 하고 싶어 산문을 쓴다고 했다. 황순원의 시각으로는 ‘루쉰의 잡문은 문학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긍정한 중국 원로학자 우엔량쥔도 도무지 마뜩치 않을 게 틀림없다. 쉽고도 재미있는 산문은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시인 황인숙은 쓰고 싶지 않은 잡문을 생계 때문에 쓰는 시인의 비애를 산문 아닌 짧은 시로 읊었다. “마감 닥친 쪽글을 쓰느라 낑낑거리며/ 잡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부르짖는/ 가난하고 게으른 시인이/ 그 동네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산문을 ‘시의 다른 놀이’이자 ‘시쓰기의 또 다른 여정(旅程)’이라고 여기는 시인 김경주는 ‘시는 언어를 발명하는 작업이고 산문은 언어를 발견하는 작업’이라고 기발하게 비유한다. 주목받는 여성 시인 김선우는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절묘하게 대비한다. “시가 응시-응집-폭발의 과정에 집중한다면 산문은 폭발 후의 잔해를 쓸어모아 다종다기한 그릇에 담는 일이다.”

이렇듯 산문예찬론자들은 삶의 단편에서 길어 올린 비의(秘意), 짧은 글 속에 담긴 촌철살인의 경구, 고혹적인 상징과 비유 등은 산문만의 매력이라고 변호한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프랑스의 원로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현대문학)도 그런 마력과 미덕을 지닌 산문집이다. 일기는 대개 내부로 침잠한다. 하지만 투르니에는 다른 시각으로 어린이들에게 자상한 설명을 덧붙인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다가 글을 몇 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사람 동물 사물 같은 외적인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매일 알아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 속에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사진이 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사각의 틀 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이 산문집에 ‘내면일기’가 아니라 ‘외면일기’라는 색다른 제목이 붙은 까닭을 어른들에게 깨우쳐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투르니에의 오랜 메모장들을 바탕으로 탄생한 ‘외면일기’는 제목과 달리 자신의 내면도 서슴없이 드러내 보인다. 투르니에의 ‘글의 연금술’은 탁월하다. 단편마다 오묘한 힘, 섬광같은 직관, 따뜻한 유머감각이 우러난다. 담백하지만 때로는 쓴웃음을 짓게 하는 그의 단면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절제된 감정은 수많은 생각의 곁가지를 싹틔운다. 오래 씹어야 더욱 은근한 맛이 나는 칡뿌리 같은 느낌을 주는 글들로 채워진 덕분이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사계’마냥 1월부터 12월까지의 달력처럼 구성한 것도 특이한 발상이다. 이따금 공감하기 힘든 부분도 만날 수 있으나 유럽의 문화, 역사, 종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유머 정서도 우리와는 다소 다르기 때문인 듯하다.

50년 가까이 파리 근교 시골 마을에 있는 옛 사제관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는 노작가에게서 감지될 법한 고독이나 우울증세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외려 곳곳에 송곳같은 해학과 슬기가 번뜩인다. 대표적인 살짝 맛보기.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박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생쥐가 소리친다. 오, 천사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