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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대중은 스스로 판단한다

입력 : 2008-05-09 17:34:51수정 : 2008-05-09 17:34:57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가 올초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자 당 밖의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 것부터 맹성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극우보수 언론인 조갑제는 “대중의 여론은 다소 거칠게 표현되지만 그 알맹이엔 진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 5월19일 홈페이지 글에서 “지금 시중에서 ‘청와대에 간첩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대중을 옹호한 것이다.

반대로 진보적 지식인 홍세화는 “대중은 획득한 것도 쉽게 잊지만 가까운 과거 사실도 쉽게 잊는다. 정치적 무관심을 불러오는 대중의 무지와 기억상실증이 수구세력의 자양분”이라고 한탄했다.

유대계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대중의 이미지의 보고(寶庫)에 통행세를 지불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고야 만다”고 경고했다.

기실 ‘대중’이란 말만큼 다의적(多義的)으로 쓰이는 용어도 흔치 않다. 긍정·부정적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며 학문적으로도 대중사회론, 파시즘,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 등에서 쓰는 대중의 개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가치중립적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치열한 미국 쇠고기 수입 논란의 중심에도 ‘대중’이 자리잡고 있다. ‘대중의 무지와 광기’라고 뭇매를 가하는 쪽과 정책의 잘못을 ‘괴담’ ‘대중적 포퓰리즘’ 수준으로 매도한다고 공격하는 쪽이 정면충돌 중이다.

‘대중’을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한 원조는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다. 그는 ‘대중사회’에 대한 모든 해석의 고전으로 불리는 ‘대중의 반역’(역사비평사)이란 명저에서 대중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익명·획일화한 평균인’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인간’ ‘감정에 민감하고 지성이 둔화된 인간’ ‘자만에 빠진 철부지’ 등등. 그의 이런 대중관은 “나는 윤전기 위에서 태어났다”고 술회할 정도로 유복한 언론인 가정의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보는 대중은 합리성이나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군집인 듯하다. 대중적 인간은 목표 없이 살면서 바람에 표류하는 부류로 보이지만 사회를 지배하려든다. 1920년대 말 유럽 상황과 미래 예단에 바탕한 것이어서 오늘날과 거리감이 있겠지만 인터넷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당시와 흡사하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촛불시위, 월드컵 응원, 황우석 사태, 허경영 신드롬, 영화 ‘디워’ 논쟁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르테가의 말대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대중이 완전한 사회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가 소수 엘리트와 대중의 동적인 통일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대중은 이제 어떤 과정을 거치든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한다는 사실을 권력이 수용하지 않으면 낭패하기 십상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깨우친다. 미국 쇠고기 해법도 마찬가지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라고 평가한 미국의 저명한 문예잡지 ‘애틀랜틱 먼슬리’에는 약간의 과장이 섞였음직하다. 하지만 오르테가의 통찰에 놀라울 만큼 날카로운 면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대중을 비판한 오르테가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남다른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사회적 지배계층이 대중의 반역이나 위협보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우월한 사회적 지위에 따른 책임)를 망각한 채 새로운 ‘두뇌귀족’인양 행세하는 것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은 미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래시의 말을 훨씬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대중은 말없는 스승’이라고 한 북한 속담에서도 일말의 지혜가 드러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