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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특활비 공개가 국익 해친다는 국회의 오만

 “빨간 신호등이라도 다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 일본 영화감독이자 배우·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가 일본인들의 집단 심리를 저격한 명언이다. 개개인은 교통질서를 칼같이 지키고 공중도덕의식이 드높은 일본인들이지만, 집단광기가 발휘되면 거칠 게 없다는 걸 풍자한 촌철살인의 비유다.


 이 말은 사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에게 돌려줘야 제격이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자기네 이익이라면 집단으로 욕을 먹더라도 우선 챙기고 보는 관행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때마다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철석 같이 약속하지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 게 우리네 국회의원들이다. 혼자 욕먹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지만, 국회의원 전체가 지탄을 받는 것은 단체기합처럼 표시가 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의 ‘쌈짓돈’으로 불리는 특수활동비의 기밀이 지켜져야 한다고 고집하는 까닭은 유권자를 우롱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직 대통령 두사람이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유용으로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용 내역을 공개하면 국익을 해치고 행정부에 대한 감시 기능이 위축된다는 상고이유가 담긴 의견서를 국회 사무처가 대법원에 제출했다는 소식이 어제(8일) 전해지자 누리꾼들의 비난이 폭주했다. 
                                                                   

 

 국회는 참여연대가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하라며 제기한 소송의 1·2심에서 연달아 패소했지만, 이에 불복했다. 이 소송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과거 특활비 유용 의혹을 고백한 것이 계기가 됐다. 홍 대표는 2015년 페이스북에 ‘2008년 여당 원내대표를 할 때 국회운영위원장을 겸했는데 매달 4000만~5000만원을 국회 대책비로 받아쓰다가 남은 돈을 집사람에게 생활비로 주고 했다’는 글을 올리며 논란을 불러왔다. 당시 신계륜 전 민주당 의원은 특활비를 자녀 유학비에 보탰다고 실토해 책망을 받았다.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할 경우 국회 고도의 정치적 행위가 노출돼 궁극적으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국회의 주장은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다. 특수활동비 수령인에 대한 정보는 개인정보여서 국민의 알 권리보다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도 세금을 내는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장난치지 마라’, ‘적폐세력은 국회다’ 같은 댓글 수천 건이 삽시간에 올라온 게 이를 방증한다.

 지방자치단체들은 특수활동비처럼 쓰이는 기관장의 업무추진비를 유리알처럼 공개하는 추세다. 업무추진비도 기관장들의 ‘쌈짓돈’이라 불리며 세금 낭비의 대표적 사례로 지탄 받아왔다.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이미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해 국민의 알 권리를 실현하고 국회 활동의 투명성과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국회는 5년간 이와 관련한 소송비용으로만 3000만원이 넘는 혈세를 낭비했다.
                                                                       

 국회의 특활비 기밀주의는 개혁에 뒤처진 인상을 주고 있는 자유한국당의 혁신안과도 배치된다. 자유한국당 2기 혁신위원회는 지난달 하순 활동을 마감하면서 발표한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혁신안’에 국회 특수활동비 정보 공개를 넘어 아예 폐지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바른미래당도 지난달 국회 특별활동비 폐지법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국회는 올해 예산에서 모든 국가기관을 통틀어 특수활동비를 가장 큰 폭으로 줄였다고 자랑했지만, ‘꼼수’임이 드러나 힐난을 자초한 전력까지 있다. 국회가 올 예산을 짜면서 실제로는 특활비를 특정업무경비 같은 다른 항목으로 빼돌려놓은 것으로 들통 났다. 국회가 내역을 밝히지 않는 ‘깜깜이’ 업무추진비만도 100억 원에 가깝다고 한다. 행정부의 예산 낭비와 비밀주의를 질타하고 견제하는 국회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납득할 수 없다.

 국회의 이 같은 모습은 감시하는 외부 독립기구가 없는 탓도 크다. 정부 부처나 다른 행정기관이 상급기관의 정기적 감사에다 감사원 감사까지 받는 것과 달리 국회는 사실상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 국회는 스스로 투명성을 견지한다.

 

   의회민주주의 선진국인 영국은 의회 회계와 관련한 독립된 감시기구를 만들었다. 한국도 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예산 투명성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시민사회의 여론이 점차 힘을 얻어간다. 국가 예산·결산 전체를 좌우하는 국회이기에 세금을 더욱 투명하게 사용해하는 무거운 책무가 뒤따른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