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사상 처음 올림픽 3연패의 신화를 쓴 ‘장거리 황제’ 스벤 크라머(32·네덜란드)도 아니었다. 유일한 대회 3관왕 ‘바이애슬론 황제’ 마르탱 푸르카드(30·프랑스)도 아니었다. 역대 최연소(17) 여자 금메달리스트인 재미교포 ‘천재 스노보더’ 클로이 킴도 물론 아니었다. 역대 두 번째 어린 나이로 금메달리스트가 된 러시아의 ‘피겨여왕’ 알리나 자기토바는 더욱 아니었다.
전 세계 언론이 꼽은 평창올림픽의 최고 스타는 대한민국의 작은 시골마을 출신 여자 컬링 대표 ‘갈릭 걸스’(마늘소녀들)였다. ‘갈릭 걸스’는 주전선수 4명이 모두 마늘 명산지인 경북 의성 출신이어서 외국 언론이 붙여준 별명이다. ‘갈릭 걸스’는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놓쳤으나 대회 내내 인기몰이를 하며 세계 언론들이 하나같이 ‘엄지척’한 선수들이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이 K팝 스타에 맞먹는 인기를 얻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노로 바이러스를 피했는데 컬링 병에 걸렸다’는 기발한 기사 제목이 인기 척도를 가늠하게 한다. 뉴욕 타임스 같은 언론사들은 의성 현장에 취재기자를 파견해 장문의 기사를 송고할 정도였다.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패러디 영상 올리기 경쟁 현상을 낳았다. 컬링의 스톤과 비슷한 로봇 청소기나 빗자루와 흡사한 대걸레가 등장하는 국민 ‘밈’(meme)까지 탄생했다.
‘갈릭 걸스’가 평창올림픽의 상징처럼 떠오른 건 단순히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만은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도 감동적일만큼 스토리텔링 요소가 무궁무진해서다. 평창올림픽이 열리기 전에는 국내에서 ‘컬링’이란 종목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비인기 종목 정도가 아니라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은 게 4년 전 소치 올림픽 때였으니 더 말할 게 없다.
팀원 가운데 2명은 친자매이고, 후보인 김초희 선수만 제외하고 모든 팀원이 의성여고에서 공부한 고향 친구들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한국 컬링 저변이 어떤지 상상하고 남을 게다. 이들은 작은 시골마을 체육교사가 눈물겨운 노력 끝에 키워낸 보배다. 20년 전 김경두 교사가 캐나다에서 컬링 스톤 중고 세트를 처음 가져왔을 당시 이 돌멩이들을 어디에 쓰려고 가져왔는지 따지는 세관원들에게 몇 주에 걸쳐서 설명을 해야 했다는 일화를 들으면 쓴웃음이 나온다.
여자 컬링 대표가 위대한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온갖 설움을 겪으면서 불모지를 개척해 새로운 역사를 썼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취는 온 국민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팀 코리아가 역대 동계올림픽 최다 메달을 수확한 일보다 빙상 종목 편중에서 벗어나 썰매와 설상 종목, 컬링 등에서도 세계 정상권에 올라 균형 잡힌 겨울스포츠 강국이 됐다는 점이 무엇보다 의미가 크다.
썰매 입문 5년여 만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스켈레톤의 윤성빈.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에서 은메달을 따내 올림픽 도전 58년 만에 한국 스키의 첫 메달을 안긴 ‘배추 보이’ 이상호. ‘세계랭킹 50위’ 봅슬레이 4인승 선수로 은메달을 딴 원윤종, 전정린, 서영우, 김동현. 이들도 컬링 대표 못지않은 평창 올림픽의 영웅들이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으며, 모든 스포츠는 인기 있는 종목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국민에게 선물했다.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7번이나 수술대에 올랐지만 끝내 극복하고 금메달을 목에 건 쇼트트랙 임효준. 예상치 못한 스피드 스케이팅 1500m 동메달리스트 김민석. 매스스타트 초대 챔피언에 등극한 이승훈. 3연속 올림픽 메달을 일궈낸 이상화. 올림픽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이들도 빼놓을 수없는 팀 코리아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역대 최고라는 빙질 평가, 무장군인이나 총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편안하면서도 역대 어느 올림픽보다 안전한 올림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외곽 지원팀,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올림픽’ ‘흑자 올림픽’ ‘친환경 올림픽’ ‘문화올림픽’ ‘평화올림픽’을 달성한 조직위원회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에도 박수를 아낄 까닭이 없다.
해외언론이 ‘흠잡을 것 없는 게 흠’이라고 호평한 것만 봐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초기의 사소한 시행착오 외에 ‘옥에 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던 모범 올림픽으로 기억될 평창의 드라마는 세계인의 상찬 속에 막을 내렸다. 이제 스포츠를 이용하려는 정치꾼들의 못난 언행과 각 종목 스포츠협회의 적폐만 제거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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