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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북핵, 시지프스 신화, 고르디우스 매듭

 북한 핵문제는 시지프스의 바위,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신화와 전설에 곧잘 비유할 만큼 지난하다. 남북한과 미국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바윗돌 굴려 올리기 형벌처럼 소득 없는 작업을 끝없이 반복해왔다. 워낙 복잡하고 정교하게 묶여 도무지 풀 수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기도 하다. 온갖 형태와 방법의 협상이 진행돼 왔지만, 위기-파국-반전-합의-위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부터 이어져 온 북핵 난제는 마냥 미봉상태로 갈 때까지 가보는 듯했다.


 그러던 북핵 문제가 평창 겨울올림픽을 전후해 한반도 정세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로 대반전을 맞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북핵 선제타격설이 사그라지지 않아 전쟁의 먹구름이 한반도에 드리워져 있던 걸 보면 상전벽해에 가까운 상황변화다. 지켜보는 이들이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당사자들도 파격적인 전개에 현실을 믿어야할지 내심 혼란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서슴없이 ‘외교적 사변’을 입에 올리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고르디우스 매듭 자르기 전설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사상 초유의 북미 정상회담 제안과 수락을 단숨에 결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빚어내는 통 큰 협상 스타일이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낼 개연성도 엿보인다.

                                                                                   


 남북한과 미국의 전례 없는 삼각 ‘톱-다운 외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 전환마저 느껴진다.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세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날 ‘아래로부터의 협상’을 거치는 방식 대신 특사를 활용한 속도 외교전을 택했다. 과거의 지루한 샅바싸움이 생략됐다.


 북한 특유의 ‘살라미 전술’도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 북한은 벼랑끝 전술과 함께, 쓸데없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조차 쪼개고 또 쪼개 자신들의 이익으로 만드는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살라미 외교전술의 귀재로 불린다.  

 연초부터 보여주고 있는 김정은의 과감한 외교 행보는 파격과 실용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것이 장기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든, 미국의 경제제재 압박과 선제타격 위협 때문이든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감지된다. 북한 지도부는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지금까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는 자신들의 계획표를 짜 놓고 평화협정 체결과 체제유지 보장 전략을 펼쳐 나가는 듯하다.

 

   북한 스스로 이제 충분한 협상 카드를 축적해 놓았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공포감이 동시에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김정은은 한국 특사를 통해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미국 측에 의중을 드러내 보였다. 비핵화의 청사진(로드맵)은 결국 북한 체제의 안전보장 장치와 맞바꾸기다.
                                                                                         

 

 북미 최고지도자의 뜻이 확고하다면 현안의 일괄협상과 일괄타결 방식도 가능하다. 관건은 어떤 경우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다. 핵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 북미 국교정상화를 일괄 합의하고, 그 이행과정을 6자회담에서 점검해가는 방식을 채택하면 최선에 가깝다. 이는 단계별 이행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합의가 번복되었던 지금까지의 해법을 극복할 대안의 하나다. 상황을 직접 주도하면서 결단을 내리는 두 지도자의 공통점에 비춰보면 진전이 의외로 빨라질 개연성도 있다.


 일괄 타결에 성공하더라도 비핵화 검증 과정에 지뢰밭이 깔려 있다는 견해를 무시할 수 없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과정은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그동안 북한의 기만전술에 놀아났다고 여기는 이들은 신기루 같은 약속에 대북제재만 완화해줄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난다고 북핵 문제가 바로 해결되겠나 하는 불신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북미 모두 벼랑끝 대치를 청산해야할 마지막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특히 북한에게는 의표 찌르기, 의중 떠보기 같은 변화무쌍한 협상기술을 자랑하기보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자세가 절실하다. 미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뤄내고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저우언라이 총리가 신조로 삼았던 ‘대관세찰’(大觀細察·큰 시야를 갖되 자세히 살펴본다)의 지혜는 남북한과 미국 지도자 모두가 이 시점에 명심해야 할 말이다. ‘햇볕이 났을 때 건초를 말려라’하는 서양의 속담과 함께.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