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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권도정치 9단 박지원과 국민의당

 유권자들이 절묘한 균형추를 만들어준 20대 총선 이후 여의도 정가에 새로 떠오른 화두의 하나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권도정치’(權道政治)다. 여소야대 정국에다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의당의 위상이 낳은 것이지만, 세 번째 원내대표를 맡는 흔치 않은 기록을 세운 박지원 의원이라는 주인공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선 ‘박지원 주의보’까지 발령했을 정도다.


 더민주 안민석 의원은 최근 “권도정치 9단인 분이 세 번째 원내대표가 되셔서 대한민국 국회가 박지원 의원의 권도정치에 휘둘릴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고 논평했다.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도 공감을 표시했다. “박 원내대표가 새누리당이고 더민주고 쥐었다 폈다 할 것”이라며 “각 정당들이 주관성이나 주체성, 일관성을 잘 유지할 수 있는지, 처음부터 협상에 나설 때 원칙과 기준이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다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권도’의 본질은 춘추전국시대 맹자가 제나라를 방문해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최고의 유세객 순우곤과 토론한 일화가 잘 대변해 준다. 순우곤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물건을 주고받을 때 직접 신체를 접촉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고 하셨죠?”라고 묻는다. 맹자가 그렇다고 하자 순우곤이 다시 따지듯 질문한다.

 

  “그러면 형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형수를 잡아 구해주는 것도 예에 어긋나는 것이겠군요?” 유가(儒家)의 과도한 원칙주의를 꼬집은 것이다. 하지만 맹자는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물에 빠진 형수를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지요. 남녀가 물건을 주고받을 때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서 건져주는 것은 권도이지요.”


 여기서 순순히 물러날 순우곤이 아니었다. “지금 천하의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정치일선에 나아가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올바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맹자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천하가 물에 빠지면 정도(正道)와 원칙을 통해 구해야 하고,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잡아 구해야 합니다.”

                                                                                 


 이렇듯 권도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임시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행위규범이다. 목적 달성을 위한 임기응변의 방편이기도 하다. 현실정치에선 타협과 실리를 중시하는 게 권도정치다. 박지원 원내대표가 권도정치 9단으로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역사상 권도정치의 상징인물은 조선의 정조대왕이다. 효율적인 국가경영을 위해 때로는 정적(政敵)인 권신들과 편지로 막후정치를 펼치는 등 권도를 발휘했다.  


 그렇지만 권도정치는 자칫 잘못하면 불의에 빠질 위험과 한계를 지닌다. 권도정치에 치중하면 정치철학의 부재에 처할 확률도 높다. 권도를 바르게 구현하려면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대처방법이 요구된다. 의(義)가 아닌 사리와 사욕이 개입되면 권도는 본질을 벗어나기 쉽다. 박 원내대표와 국민의당이 경계해야할 것은 당리당략으로 흐르는 일이다.

                                                                               

                                                                    <정조대왕 어진>


 이미 국회의장 직을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새누리당에 줄 수 있다, 연정도 할 수 있다는 등 말이 진중하지 못해 국민의당 지지율이 떨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원 구성 협상을 앞두고 상임위원회 분할 문제도 나눠먹기나 밥그릇 챙기기로 비치는 권도정치가 아닌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권도정치는 정도정치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권도 하나만으로는 명분을 지닐 수 없다. 그게 국민을 위한 정치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김종인 더민주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최근 박 원내대표를 만났을 때 ‘정도로 가자”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총선에서 제3당 입지를 굳히고 자신감과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 박 원내대표와 국민의당 지도부가 권도정치에 초점을 맞추면 정도정치를 벗어날 위험부담이 크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박 원내대표의 노련한 권도정치는 안철수 대표의 새정치와 결합해야만 시너지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안철수대표의 새정치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낡은 정치를 개혁하는 데 권도정치를 도구로 삼아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