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를 코앞에 두고 대학가에서 불거진 표현의 자유 논란은 우리 사회의 기본적 자유 지수를 심각하게 곱씹어보게 한다. 그에 앞서 1·2차 ‘민중총궐기 대회’를 계기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둘러싸고 한바탕 첨예한 갈등이 빚어진 뒤끝이어서 표현의 자유는 한층 중대한 과제로 떠올랐다.
고 김수영 시인의 1960년대 시 ‘김일성 만세’가 2015년 대한민국 대학가에서 대자보로 나붙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 상징성이 크다. 문학과 예술은 상징을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 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로 시작하는 이 시는 55년 전 당시 표현의 자유와 검열을 비판한 도발적인 작품이다.
11월말 경희대에서 맨 먼저 나붙은 이 대자보는 강제 철거 때문에 오히려 고려대 등으로 퍼지게 됐다. 김수영의 시 아래에는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고양이체’까지 등장해 더욱 화제가 됐다. ‘안녕하새오 고양이애오. 판사님 이거 제가 썼어오’처럼 쓰는 고양이체는 최고권력을 희화화하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면 누리꾼이 공유할 때 애용한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을 때 네티즌의 풍자놀이인 셈이다.
이 시를 패러디 한 글들도 나붙었다.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 한국 표현의 자유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경찰과 검찰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이 대자보는 서울 마포구에서 가구공방을 운영하는 황 모 씨가 공방 창문에 ‘독재자의 딸’이라고 쓴 글을 게시하자 경찰이 떼라고 요구한 일을 패러디한 듯하다. 경찰은 황 씨에게 “박 대통령이 독재자의 딸이라는 근거를 대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토대다.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머스 제퍼슨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우선시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로 이어질 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정부와 집권당은 1차 ‘민중총궐기 대회’의 폭력성에만 초점을 맞춰 공안몰이에 나섰을 뿐 8만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기본적 자유가 위협받는 상황을 외국 언론이라고 방치할리 없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해 해외의 권위 있는 매체들이 박근혜 정부의 퇴행을 비판하기 시작한지는 이미 오래됐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표현은 최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 ‘더 네이션’에 ‘한국, 독재자의 딸이 노동자를 탄압하다’에도 등장했으며, 2012년 대선 당시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도 박근혜 후보를 ‘독재자의 딸’로 소개했다. 민주국가로 인정받아온 한국의 국제적 평판과 이미지에 중대한 손상이 가해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민주화 이후 역대 한국 정부는 국가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정부마다 수천억 원의 직·간접 예산과 인력을 들여 국가이미지 제고를 위해 전 국민의 아이디어 모으기에 나설 정도다. 노무현 정부는 국가이미지위원회를 만들었고, 이명박 정부는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띄웠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문화체육관광부 새해 업무계획에 국가브랜드 개발을 첫 손가락에 올렸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전하는 국가브랜드’를 공모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다. ‘코리아 프리미엄’이라는 브랜드 마케팅을 위해 올해 20억 원이던 관련예산도 내년에는 2배가 넘는 45억 원으로 증액됐다. 하지만 아무리 공들여 쌓은 탑도 지도자 한 사람의 독단적인 생각 때문에 모래성 무너지듯 한다면 허탈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은 경제성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에 걸맞은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품격이 뒷받침돼야 한다. 뉴욕 타임스도 문제가 된 사설에서 ‘해외에서 한국의 평판에 대한 가장 큰 위험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 주로 역사를 다시 쓰고 비판자들을 억압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가혹한 조치들’이라고 경고했다. 해외 언론의 비판 기사에 놀라 외교관들이 나서 반론문을 쓰는 소동을 보면 수십 년 전을 떠올리게 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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