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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올바른 역사교과서’의 더블스피크

 미국영어교사협회는 해마다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말을 가장 탁월하게 구사한 사람이나 단체에 ‘더블스피크상’을 준다. 러트거스대학 윌리엄 러츠 교수가 주도해 1974년 제정한 이 상의 첫 수상자는 캄보디아 주재 미 공군 공보담당관이던 데이비드 오퍼 대령이었다. 오퍼 대령의 수상 이유는 “기자 여러분이 계속 ‘폭격’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건 폭격이 아니라 공중지원”이라고 견강부회한 공로다.


 걸출한 역대 수상작의 하나로 미국 국방부가 ‘민간인 사상자’를 ‘부수적인 손실’이라고 둘러댄 것이 손꼽힌다. 미국 민간항공국이 ‘비행기 추락’을 ‘제어를 벗어난 지상으로의 비행’으로, 미 국무부가 세계인권현황보고서에서 ‘살해’를 ‘불법적이거나 자의적인 생명의 박탈’로 기발하게 표현한 말도 빼어난 수상작에 속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인류를 전멸시킬 수 있는 ‘MX 핵미사일’을 ‘평화수호자’라고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더블스피크’(Doublespeak)는 정치적 목적으로 실제 의미를 위장하거나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언어다. ‘이중화법’ ‘이중발화’(二重發話) 등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의미를 전달하기 쉽지 않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 응용돼 나왔다. 

                                                                                               

              충남 서산시가 해미읍성 뒷동산에 역대 대통령들의 장승을 세워 놓고 전두환 대통령은 ‘정의사회구현’,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라고 표기해 비난을 사고 있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근무하는 오세아니아 정부의 ‘진리부’는 역사왜곡을 담당하는 곳이다. 진리부의 슬로건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이다. 진리부에서는 책, 잡지, 신문 같은 모든 과거 저작물을 현재 시점에 맞게 완벽하고 철저하게 조작하고 재생산한다. 전쟁을 담당하는 부서의 이름은 ‘평화부’다. 


 북한이 일당독재국가이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식 이름을 쓰는 것도 ‘1984’에 비유할 만하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숙청한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과 관련된 기사웹 아카이브의 99퍼센트를 삭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국 언론은 ‘1984’의 진리부를 연상시킨다고 꼬집었다.


 태생부터 민주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민주정의당을 창당하고 관공서 입구마다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간판으로 도배질을 했던 역설적인 상황은 더블스피크의 모범사례 가운데 하나다. 민주·정의 파괴자들이 민주정의의 옷을 입고 활개를 쳤으니 말이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기로 하면서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야말로 올해의 더블스피크상으로 제격이다. 미국이 아니어서 후보추천이 불가능하지만, 추천이 가능하다면 수상자격은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췄다. 국가가 만드는 획일교과서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호도하는 것은 물론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의 ‘진리부’처럼 과거를 왜곡, 재생산하려는 기도(企圖)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라는 용어를 애써 피하며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명명한 것은 자신감이 없다는 방증이나 다름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한 것과 꼭 닮았다. 역사에는 올바른 정답이 있을 수 없으며, 관점과 견해가 있을 뿐이다. 국정 교과서는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이더라도 국정 교과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해외 여러 나라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인데도 정부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우긴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박근혜 대통령이 되풀이해 일본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국정화는 시계침을 거꾸로 돌리려는 조처”라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이 그토록 싫어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일이다.


 더욱 가관은 박 대통령이 국정화 문제로 불필요한 국론분열이 일어나서는 안 되며 국민통합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역설한 대목이다. 더블스피크의 정수이자, 박 대통령 특유의 유체이탈적 언어유희다. 평지풍파를 일으켜 온 나라를 갈등과 분열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꾸짖는 꼴이다. ‘올바른 국사교과서를 만들려는 노력이 정치적 문제로 변질돼 안타깝다’는 말도, 자신이 저질러 놓고 남을 탓하는 억설이나 다를 바 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