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비판이 고조됐을 당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 사설의 위력을 ‘2개 사단의 가치’와 맞먹는다고 비유했다. 워싱턴 포스트 주필 앞에서 한 말이어서 공대(恭待)와 당부의 의미를 담았겠지만, 언론의 힘을 흥미롭게 평가한 것은 분명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문의 하나인 뉴욕 타임스 사설의 영향력은 때론 워싱턴 포스트를 넘어선다. 뉴욕 타임스의 주요 사설은 다른 나라 언론이 인용, 보도할 만큼 파급효과가 지대하다.
그런 뉴욕 타임스가 지난 19일자 신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주의 역행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사설을 실어 눈길을 끈다. 이 신문이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최고지도자를 이처럼 뼈아프게 비판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뉴욕 타임스가 우려한 한국 민주주의 상황은 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몸 바치고 어제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자취와 뚜렷이 겹쳐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은 ‘어떻게 이룬 민주화인데...’라며 편치 않은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 듯하다. 김 전 대통령이 유신 정권 말기 신민당 총재 시절이던 1979년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민주화 투쟁의 결기를 보여준 명언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 국회의원 제명 사유가 뉴욕 타임스 인터뷰였던 것은 무척 공교롭다. 김 총재는 당시 인터뷰에서 미국이 물밑에서 지지하던 이란의 팔레비왕정 체제가 민중혁명으로 말미암아 무너진 사태를 예로 들며, 한국이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 게 빌미가 됐다. 이양우 시인의 같은 제목 시에서 따온 이 말은 군사독재정권의 멸망이 시간문제라는 예언을 내포하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5월에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맞서 가택연금 상태로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여 민주화운동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군부 실세 사조직인 하나회를 단칼에 척결해 문민화를 앞당기는 조치들을 강력하게 실천했다. 금융실명제 단행, 공직자 재산 공개 같은 개혁조치도 문민 정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IMF 외환위기 초래, 측근 비리, 차남의 국정개입 같은 씻기 어려운 과오가 있으나 김 전 대통령이 나라의 틀을 바꾼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의 민주화 투쟁 족적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적이다.
뉴욕 타임스 사설은 김 전 대통령이 이처럼 어렵사리 이뤄낸 민주주의가 역주행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현실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 정부, 비판자들을 겨냥하다’라는 제목의 이 사설은 “해외에서 한국의 평판에 대한 가장 큰 위험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 주로 역사를 다시 쓰고 비판자들을 억압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가혹한 조치들”이라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이 사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개혁, 이석우 카카오 대표 검찰수사가 상징하는 인터넷상의 반대 여론 통제 등 세 가지를 최근의 억압 사례로 들었다.
미국 조야의 고위 인사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들이 도와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일궈낸 세계 유일의 성공사례가 한국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우곤 한다. 뉴욕 타임스도 이 사실을 빼놓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세계적인 산업 강국으로 일어선,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된 경제발전만큼이나 독재로부터 활력 있는 민주주의를 일궈낸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래서 이렇게 경고했던 것 같다. “낮과 밤처럼 확연하게, 북한의 꼭두각시 체제와 한국을 구별해 주던 민주주의적 자유를 박근혜 대통령이 퇴행시켜려고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려스럽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과 애증 관계를 유지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2001년 “아버지와 딸은 다르다”고 평가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잘못 판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민주화 투쟁을 함께 했던 동지들의 일부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반동적인 권위주의에 부화뇌동하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현실을 참담하게 여기고 영면했을 듯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쌍두마차를 형성해 성취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반동을 극복하는 숙제를 남겼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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