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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전설을 역사로 만든 슐리만

 입력 : 2008-09-19 17:47:59수정 : 2008-09-19 17:48:14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트로이를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복원한 고고학계의 신화적인 거목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마냥 우호적이지만 않다. 엄청난 돈을 벌어 어릴 적 꿈인 트로이 유적 발굴을 끝내 실현하지만 고고학자도 발굴자도 아닌, 보물에 눈이 먼 도굴꾼일 뿐이라는 혹평까지 따라다닌다. 슐리만은 유적 발굴자이면서 동시에 귀중한 유적의 훼손자라는 오명도 남아 있다. 해서 오늘날 위인전에 그의 이름이 오르는 것에 불만인 사람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어린이를 위한 역사이야기’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감명 받아 트로이 문명을 현실로 입증한 그의 집념은 사뭇 감동적이고 높이 사 줄 만하다. ‘하인리히 슐리만 자서전’(일빛)에서는 그의 불타는 열정이 여름철 태양처럼 이글거린다. (자서전이지만 부인 소피아와 에른스트 마이어 박사가 슐리만 사후에 추가한 부분이 많다.)

‘돈키호테’라는 딱지가 붙기도 한 그는 트로이 왕궁 건축지에 관해 수백 명의 학자들이 수백 권의 책을 써왔지만 누구도 그걸 실제로 확인하거나 발굴하려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꼬집는다.

“나는 진정으로 돈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내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였다. 장애는 끊임없이 많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의 열정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나는 어렵사리 바로 눈앞까지 다다른 큰 목적에 어떻게든 도달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일리아드는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고 위대한 그리스 민족으로부터 그 영예의 관을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실증하고 싶었다.”

그가 트로이 유적 발굴을 위한 고고학 지식 습득과 사업을 위해 무려 15개 국어를 공부하는 과정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영어에 목을 매달다시피하는 한국의 분위기로 보면 이 책에서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외국어 학습요령이다. 독일 출신인 그는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스웨덴어, 폴란드어, 아랍어 등에다 라틴어, 현대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원전으로 호메로스 책을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다. 그것도 한 가지 외국어를 웬만큼 능숙하게 하는데 짧으면 6주, 길어야 6개월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나는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영어 학습에 전념했다. 그 때의 절박한 상황에서 모든 언어를 쉽게 익힐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발견했다.” 그 간단한 방법을 요약하면 이렇다. 수없이 소리 내어 읽을 것, 문법에 매달리거나 번역 투로 하지 말 것, 매일 1시간씩 공부할 것, 항상 흥미로운 대상에 관해 작문을 하고, 이것을 교사의 지도를 받아 수정할 것, 전날 수정된 것을 암기하고 다음 시간에 암송할 것.

슐리만의 정식 학교생활은 가난 때문에 열네 살에 끝난다. 점원, 심부름꾼, 작은 도매상을 거쳐 거대한 무역회사 사장이 된다. 슐리만은 마흔여섯 살 때 모든 것을 접고 트로이를 찾아 나선다. 3년여 동안 일꾼 100여명과 더불어 37m 높이의 언덕에서 1t 트럭 25만대분이나 되는 흙을 파낸다. 아홉 권의 관련 저서도 쓴다. 그러나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 시작부터 사후에까지 학자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가 학자가 아니라는 단 한 가지 이유다. 처음에는 전설만 믿고 땅을 파헤친다며 조롱한다. 나중엔 비과학적이고 비도덕적으로 트로이 유적을 망가뜨렸다고 헐뜯는다.

생전엔 그 자신이 트로이를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미케네 유적만 발굴한 모양새가 된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유적의 여섯 번째 층에 묻힌 트로이가 드러난 사실을 깎아내릴 수 없다. 그가 나폴레옹이 주도한 정복자의 약탈 시대와 요한 빙켈만의 이른바 ‘예술 고고학’을 넘어 새로운 고고학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도 있지 않은가. 슐리만의 정신이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를 낳았다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