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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집요한 ‘건국절’ 주장, 이제 접어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지난주 주목할 만한 사실이 더 보태졌다.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데다 단발적인 여론조사 결과여서 진보적인 언론조차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뜻 깊은 광복 70주년 경축사에서 ‘건국 67주년’이라고 몰역사적인 발언을한데 이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까지 건국절 제정을 새삼 언급한 직후에 나온 것이어서 의미가 적지 않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가 지난주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 시점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 3분의 2에 가까운 64%의 국민이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라고 응답했다. 남한정부가 수립된 1948년이라는 응답은 21%에 불과했다.

 

  1919년 임시정부수립이라는 응답이 모든 지역과 연령층에서 큰 편중 없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무엇보다 보수적인 새누리당 지지층조차 52대 27의 비율로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시점으로 본다는 점은 끈질기게 건국절을 추진하는 세력을 겸연쩍게 만든다.


 친일행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고위 인사들과 일부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건국절 제정 논리는 헌법과 역사를 무시하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1948년 9월1일 발행한 대한민국 정부 관보 1호에는 '대한민국 30년 9월1일'이라고 명백하게 인쇄되어 있다>


 이 문구가 들어간 것은 현재 헌법이 아니라 제헌헌법부터다. 제헌헌법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이 부분은 보수 진영이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강하게 주장해 반영됐다.

 

  이승만이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강조한 내용은 이렇다. “기미년 3월 1일 우리 13도 대표들이 대한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 기초를 세운 것이고 이 국회에서 임시정부를 계승해서 29년 만에 민국을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싸워가지고 이때 진력해오던 것이라 하는 것을 우리와 이후에 우리 동포들이 알도록, 잊어버리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이승만 정부가 출범한 직후 1948년 9월1일 발행한 대한민국 정부 관보 1호 상단에도 '대한민국 30년 9월1일이라고 발행날짜를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대한민국 정부 출범이 1919년 임시정부를 기준으로 한다는 점을 천명한 것이다. 

 

  친일성향이 짙은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이 2000년대 들어 느닷없이 ‘건국절’ 제정을 들고 나올 때 밝힌 명분과는 정반대다. ‘식민지근대화론’ 주창자인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2006년 7월 한 일간지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글을 기고해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진정한 의미의 빛은 1948년 8월 15일의 건국 그날에 찾아왔다’고 주장한다. 

                                                                                                  

   
 뉴라이트들과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세계에서 건국절이 없는 유일한 나라’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가장 숭배하는 미국조차 ‘독립기념일’이 있을 뿐 ‘건국일’이라는 이름은 없다. 일본이 1966년에 제정한 건국기념일을 예로 든다면, 우리에겐 그날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개천절이다. 공산혁명을 이룩한 중국도 10월1일을 ‘국경절’이라 부를 뿐, 건국일이나 건국기념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많은 나라들이 새삼스럽게 ‘건국일’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나라의 오래된 역사를 부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건국’이라는 용어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건국절 제정 주장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와해시킨 이승만의 반역사적 죄과를 합리화하고, 건국에 참여한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친일행위를 희석시키면서 건국 공로를 인정받아 기득권을 지키려는 꼼수가 도사리고 있다. 친일의 부끄러운 역사를 덮고 종북논란이라는 이념적인 대립을 부추겨 정치적 이익을 얻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광복절을 기준으로 하면 독립운동과 친일이라는 구도가 성립하지만, 건국절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데올로기 대결 구도로 돌려버린다. 


 식민지를 겪은 나라 가운데 해외에서나마 정부를 조직해 20년 넘게 독립운동을 펼친 자랑스러운 사례가 우리 나라 외에는 없다. 패배와 좌절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축소하고 폄훼하려 드는 것은 아이러니다. 건국절을 제정하려는 것은 제2의 경술국치나 다름없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으로 삼으면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시혜(施惠)의 역사로 왜곡하고 분칠하려는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 극우진영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닷새 뒤면 경술국치일 105주년을 맞는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