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를 달구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과 드라마 ‘미생’은 한국 사회의 세대 정서를 표징하는 문화콘텐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념이나 갈등요소를 빼놓고 즐기자는 주문이 많지만, 정치와 사회는 그냥 두지 않는다. 나무가 조용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멎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진영논리나 세대갈등을 부추기지 말자면서 은근히 싸움을 붙이는 시누이 같은 이들도 적지 않다.
‘국제시장’이 격동의 현대사를 관통해 온 장년들에게 최루성 회억으로 다가가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국인 세대는 위대했다.” 보수 진영의 대표 논객이라고 자부하는 한 원로언론인은 이처럼 강렬하게 표현했다. “오랜만에 꼭 보고 싶은 영화가 나왔다”고 분위기를 띄운 언론인도 있다.
정치권은 한술 더 떴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퍼지니까 국기 배례를 하더라. 그렇게 해야 나라라는 소중한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애국심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관객의 실소(失笑)를 이끌어내는 풍자 장면까지 정치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꼬집는 이가 많았다. 여야 정치인들은 수다자리에서 소외되지 않을까 두려워 너도나도 영화관으로 몰려간 뒤 공감의 촌평을 쏟아낸다.
드라마 ‘미생’ 세대는 ‘국제시장’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단하고 답답한 현실이 화급하다. 힘들지만 아버지 세대처럼 희망이라도 보이면 소원이 없겠다는 게 이들의 솔직한 심경이다. 지난날의 무용담만 늘어놓는 기성세대가 야속하기만 하다. 취업·결혼·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조차 사라졌다고 한숨을 내쉰다. ‘미생’ 세대는 ‘국제시장’ 세대가 고난의 시대를 극복하고 성공신화를 썼다는 것을 훈장 삼아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한다고 불만투성이다.
최근 대학생들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인데 이어 기자회견과 ‘F학점’ 주기 퍼포먼스를 연 것은 ‘미생’ 세대의 몸부림이다. 대학생들은 정부에 분노하는 이유가 결국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의 경제정책이 서민경제 살리기가 아니라 정부와 재계만의 위기 탈출용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는 정부에 대한 단순한 불만을 넘어 기성세대를 향한 항변이다. 새누리당이 추진 중인 이른바 ‘장그래법’도 ‘미생’의 주인공인 비정규직 장그래를 줄이기는커녕 외려 늘려 ‘장그래 양산법’에 불과하다고 꼬집는다. 여당의 개정안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이 담겨 4년 뒤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를 보면 ‘국제시장’ 세대와 ‘미생’ 세대의 생각 격차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걸 실감할 수 있다. 20~30대의 70퍼센트 안팎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50대 후반부터 60대 이상의 70퍼센트 내외는 ‘콘크리트 지지’를 보낸다. 대통령이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막무가내 지지를 보내는 ‘국제시장’ 세대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근대화 시대의 주역을 자처하는 올드 보이들은 ‘미생’ 세대의 아픔을 나약이나 의지박약 같은 눈길로 바라본다. 게다가 틈만 나면 ‘북한의 위협이 여전한데도 종북주의자들에게 놀아난다’는 단세포적 논리로 제압하려 한다. 미래를 위한 창의성과 역동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 않아도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는 우리 사회를 한층 더 과거회귀형으로 돌려놓을 개연성이 높다.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고쳐 써야 한다고 한바탕 요란을 떨며 이승만을 건국영웅으로 만들고 박정희를 신화화하는 시도가 극성을 부릴지도 모른다. 기득권 세력이 과거 통제를 핵심 통치수단으로 삼으려는 조짐은 오래전부터 보여 왔다.
광복 70주년을 되돌아보면서도 ‘국제시장’ 세대의 추억보다 ‘미생’ 세대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노력에 무게가 실려야 마땅하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빨랫줄에 앉은 참새의 심정으로 앞날을 걱정하는 ‘미생’ 세대에게 완생의 꿈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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