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논어’를 인용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처음엔 내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믿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행실을 살핀다.” 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진정성 있는 조치가 선행되지 않고선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친강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4월 논어의 명구절을 빌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발표한 미·일 공동성명을 비난했다. “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넓게 사귀되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 미·일 안보조약이 냉전시대의 산물이며 댜오위다오(일본 이름 센카쿠 열도)가 중국에 속한다는 근본적 사실은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이 대목을 들었다.
두 사례는 송나라 재상 조보(趙普)가 임종할 무렵 황제 태종에게 아뢰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신에게 논어 한 권이 있사온데 그 반으로 폐하(송나라를 세운 태조를 지칭)를 도와 천하를 도모할 수 있었고, 그 반으로 폐하(태종을 지칭)를 도와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훗날 “논어를 절반만 읽으셔도 천하를 다스립니다”라는 말로 단장취의(斷章取義)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조보가 반쪽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말까지 생겨났다.
이를 원용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홍정욱 전 국회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을 읽으려면 ‘한비자’를, 사람을 이기려면 ‘손자병법’을, 사람을 다스리려면 ‘논어’를, 사람을 구하려면 ‘성경’을 읽으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듯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는 오랫동안 동아시아에서 지배계층의 성전(聖典)으로 통했다.
논어의 가르침은 ‘인’(仁)이 핵심 개념이다. 공자는 인간이 인을 실천하는 이유는 누구나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장 신임했던 제자 안회(顔回)가 ‘인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답한다. 사사로운 욕망을 극복해 예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돌아가야 할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질서와 문화다. 공자는 사회의 여러 계층을 하나로 결속하는 원리가 인(仁)이라고 여겼다.
<공자 초상화>
공자는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려면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 맞는 예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는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위정자와 지식인층이 선왕 대대로 전하는 예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논어 안연편 첫 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라.” 이를 ‘사물(四勿)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공자의 보수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논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과 더불어 ‘군자’(君子)다. 두 단어가 각각 109번, 107번이나 언급된다. 공자의 이상적 인간관인 ‘군자’는 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논어가 군자들에게 내리는 생활 지침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군자는 논어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에 나올 정도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군자는 곧잘 소인(小人)과 대비된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 “군자는 큰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안온한 삶의 터를 생각한다. 군자는 두루 적용되는 법을 생각하고 소인은 작은 혜택을 생각한다.” “군자는 두루 마음 쓰고 편당 짓지 아니하며, 소인은 편당 짓고 두루 마음 쓰지 아니한다.” “군자는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면서 태연하지 못하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중국 취푸의 공자묘>
공자가 내린 소인의 정의에는 성적·계급적 편견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는 게 고문헌·고고학의 대가인 리링 베이징대 교수의 생각이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논어에는 ‘소인’이란 말이 스물네 번 나온다. 평소에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려운 시절이 오면 군자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것을 비유한 대목도 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공자는 군자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 세 가지를 든다. “젊어서는 여색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고, 장성해서는 다툼이 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늙어서는 재물에 대한 탐욕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공자는 ‘정치란 바르게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백성은 행하고, 그 몸가짐이 부정하면 호령하여도 백성은 따르지 않는다.” “법령으로 지도하고 형벌로써 질서를 유지하면, 백성은 법망을 뚫고 형을 피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도덕으로 지도하고 예법으로 질서를 유지하면, 백성은 부정을 수치로 알고 정의를 찾게 된다.” “정치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며, 백성이 위정자를 믿게 해야 한다. 식량, 군비, 백성의 신뢰 가운데 부득이하게 먼저 버려야 한다면 군비, 식량 순서로 버려라.”
<공자 사당>
공자는 중용을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항상 중용을 유지할 것을 역설했다. 공자는 ‘중용의 덕’을 최고의 덕이라고 가르친다.
논어는 인간의 참 본성이 정직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삶은 정직해야 하니, 정직 없이 사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한 것일 뿐이다.” “정직함으로 원망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아야 한다.” 정직은 올바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거는 일을 말한다. “임금을 속이지 않으며, 임금의 안색을 거스를지라도 바른말을 해야 한다.” 논어가 강조한 것은 한마디로 안으로 성인이 되는 것과 밖으로 왕도를 실천하는 일이다.
논어에는 세상 사는 이치나 정치, 문화, 교육 등에 관한 제자들과의 문답, 제자들끼리 나눈 이야기, 공자의 혼잣말, 당대 정치가들이나 평범한 마을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등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공자의 풍모와 성격이 곳곳에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와 제자들이 이야기하던 분위기와 말투까지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하다.
<공자의 일대기를 그린 성적도>
‘논어’의 논(論)은 편집, 어(語)는 어록이란 의미다. 논어는 원래 ‘제논어’(齊論語), ‘노논어’(魯論語), 공자 고택의 벽에서 나온 ‘고논어’(古論語) 세 종류로 전해 오다가 서한 말에 장우(張禹)라는 이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최초의 교정본을 만들었다.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유교문화권에서 논어의 지위는 서양의 성경이나 다름없었다. 2000여 년간 논어는 아무나 함부로 해석할 수 없었다.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면 이단 취급을 받는 것과 흡사하다. 심지어 송나라 주희(朱熹)의 논어 주석본은 원나라 이후 과거 시험의 모범적 교재로 채택돼 다른 학파의 책들과 차별되는 지위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는 논어보다 한참 아래인 주자의 말도 함부로 해석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 윤휴는 주희 말을 자기 스타일대로 해석하다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이러다 보니 논어는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나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철학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논어의 자구 하나로 중요한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논어는 다른 고전들과는 달리 읽는 이에 따라 같은 문장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논어 자체가 갖는 함축성에서 기인한다. 이 때문에 수많은 주석서가 나올 수밖에 없다. 주석서로는 하안(何晏)의 논어집해와 주희의 논어집주가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논어집해부터 일본 학자의 설까지 참고해 ‘논어고금주’라는 새로운 주석서를 편찬했다.
<공자가 시용했던 우물>
동양 문화 속에서 논어는 그저 한 권의 책이 아니다. 중국과 동아시아 문명에서 공자와 논어가 차지하는 위상은 서양 문명에서 예수와 ‘성경’, 플라톤의 ‘대화록’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려 ‘동아시아 사상사는 논어 다시읽기의 역사’라는 표현도 나왔다.
논어는 중국의 혼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136년 한나라 무제가 유학을 국정의 지침으로 삼은 이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공자와 논어는 지고의 가치로 숭배됐다. 일본에서는 ‘논어를 읽은 자가 논어를 모른다’는 속담까지 생겨났을 만큼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서양의 인권혁명을 태동시킨 계몽주의 사상의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논어였다는 견해도 있다.
공자와 논어는 신해혁명 이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 등의 지식인에 의해 중국의 봉건적 누습의 근원이라고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는 시절이 있었다. 이런 풍조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이른바 ‘비림비공(批林批孔·린뱌오와 공자 비판)운동 때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도 IMF 외환위기 직후 한 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부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국에서 논어가 수백만 권이 팔리는 등 선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는 체제안정과 질서유지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공자 떠받들기를 하는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논어는 한국에서도 최고 경영자와 학생에 이르기까지 필독서의 하나로 꼽힌다. 서양에서 중국 붐과 함께 논어가 부각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출간된 3000여 종의 관련 저서와 국내외 160여 종의 번역서가 논어의 위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4년 8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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