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운동의 아버지 토머스 페인은 “정부는 최상의 상태에서도 필요악일 뿐이며 최악의 상태에서는 견딜 수 없는 악”이라고 주장한다. 보통사람은 정부가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살수 있다는 게 페인의 생각이다. 미국인의 80퍼센트 정도가 연방 정부를 필요악으로 생각한다는 조사결과도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1981년 후보 시절에 한 얘기는 한층 강렬하다. “정부는 문제를 푸는 주체가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어서 정부가 없으면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될 개연성이 높아 정부를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정부가 필요한 까닭은 약하고 상처 받기 쉬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모든 사람에게 정의를 베풀어 세상을 공평하고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해서 사람들은 정부가 아예 없는 것보다 악한 정부라도 있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우리는 어떤가?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5년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꼬집었다가 엄청난 파문을 불러왔다. 유감스럽게도 18년 전 그가 한 말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원자력 발전소 부품 비리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상 초유의 전력 대란이 일어나자 애먼 국민에게 그저 불볕더위를 참고 절전하는 수밖에 없다고 타박하는 게 우리네 정부요 공무원이다.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천인공노할 일이요, 국민의 생명을 사욕과 바꾼,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며 남 탓하기에 바쁘다. 감사원이 지난해 특별 감사에서 원전 비리를 적발했을 때는 뭘하고 있다가 폭염이 닥쳐온 뒤에야 전 정부를 욕하며 부산을 떠는지 모르겠다.
정책 실패로 인한 충격은 언제나 힘없는 서민만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희대의 부실 저축은행 비리도 정부 관료의 문제였다. 국가 경제가 휘청거려도 희생양 몇 명만 찾아내 책임을 지울 뿐 큰 고기들은 모조리 면피로 끝난다.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으로 퍼부은 수백조원의 공적 자금을 회수하지 못해도 정부와 공무원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다.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라는 IMF 외환위기 당시 이미 그랬다. 지난 4월 12조원의 국가예산이 펑크 났다는 사실이 들통 났을 때도 앞 정부만 탓했다. 자기들이 한 짓임에도 영혼 없는 공무원들은 얼굴색조차 바꾸지 않았다. 오죽하면 괴테 같은 대문호까지 나서 “정책 실패는 수백만 명의 국민을 불행과 참혹에 빠뜨려 괴롭힌다”고 일침을 놓았을까.
철밥통들은 먹을 게 있는 곳엔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자신들이 섬겨야 하는 국민에게 돌아가야 할 자리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꿰찬다. 퇴직 후에도 공공기관의 자리는 으레 자기네들끼리 주고받는 걸로 안다. 모피아(재정부), 교피아(교육부), 산피아(산업부), 감피아(감사원), 국피아(국토교통부), 원전마피아 같은 범죄조직을 떠올리는 이름은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전·현직 관료들의 ‘끼리끼리 문화’가 국가 재난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다.
공무원·군인연금은 복지정책의 악성 종양이 된 지 오래다. 이대로라면 20년 뒤 국민세금으로 메워야 할 적자 보전액이 연간 20조원 이상 늘어난다. 서민들이 공무원·군인들의 노후자금을 대는 데 허리가 휠 것이라는 염려가 태산 같다. 연간 4천만원 이상의 연금을 받는 은퇴자에게 건강보험료를 부과하려는 계획이 세 번이나 무산된 것도 퇴직 고위 공무원의 저항과 현직 고위 공무원들의 동조 때문이다. 공적 연금 수령자 37만 명 가운데 6퍼센트인 고위직 출신이 월평균 18만원도 못내겠다는 거다.
국민세금으로 부담하는 공무원 본인과 자녀에 대한 무이자 대학 등록금 대출액도 4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서민 자녀는 정부 지원 학자금 대출기관인 한국장학재단에서 빌려도 연 2.9퍼센트의 이자를 내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으로 받는 공복(公僕)이 국민에게 되레 ‘갑’ 행세를 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 3.0 비전선포식을 거창하게 열었지만 진정으로 국민을 중심에 두는 정부가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많다. 공무원들이 가슴 속에 잊지 않고 새겨놓은 건 ‘우리는 어떤 대통령보다 오래간다’는 금언이다. 대통령이 관료 출신을 잘 챙겨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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