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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박근혜의 아버지 과오 사과하기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드물다. 그게 개인은 물론 가문이나 조직의 명성과 평판에 흠결을 남길 개연성이 높으면 한층 어렵다. 미국 시인 랠프 에머슨은 “분별력 있는 사람은 결코 사과하는 법이 없다”고 사과의 어려움을 갈파한 바 있다. 심지어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숙제로 남는 일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대 일본 총리들의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형식적인 사과가 있었지만 역사 왜곡과 정치인들의 망발로 되돌이표가 되고 마는 것만 봐도 잘못의 인정이 그만큼 지난하다는 걸 방증한다.
사과 얘기가 나오면 일본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독일과 늘 비교되는 것은 사뭇 다른 처신 때문이다. 세계적인 정신의학자인 아론 라자르는 공적인 사과의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 노예제도 사과와 더불어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의 2차 세계대전 만행 사죄를 꼽는다. 일본이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과오를 흔쾌하게 인정하지 않은 탓이 크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노리는 걸 비롯해 역할 확대를 꾀하지만 그때마다 견제를 받는 것도 이런 옹고집이 작용해서다.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기로는 북한도 일본 못지않다. 

 
5·16쿠데타 50주년을 계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에게 아버지는 자산이자 동시에 부채이기도 하다. 역대 최고의 대통령이라는 국민적 인기와 칭송이 하늘을 찌를 듯이 들려와 아버지의 부정적인 유산은 묻혀 버리는 듯하다. 

하지만 정치 환경이 유리하다고 보수 진영에서 부르고 있는 ‘5·16 찬가’에 함몰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독재자의 딸’, ‘유신공주’라는 딱지를 붙인 비토그룹이 온존하고 있는 만큼 아버지의 부채는 박 전 대표가 대선과정에서 풀어야할 숙제다.
박 전 대표 스스로 5·16의 성과가 잘못의 몇 배를 넘는다는 판단을 하더라도 그렇다. 10월 유신의 희생자나 피해자들은 박 전 대표에겐 부담일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 독재와 인권탄압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 전대표가 차기 대선에 이기더라도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박 전 대표가 추구하는 복지와 민주화가 동시에 이뤄지려면 아버지를 뛰어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선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없다. 차기의 시대정신 가운데 하나는 사회통합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 시절에 수난을 겪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위로하면서 그들을 끌어안지 않으면 안 된다.  

박 전 대표는 200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한 자리에서 “아버지 시절에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한 적이 있긴 하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선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을 대상으로 죄송하다는 뜻을 잠시 밝히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풍문으로는 박 전 대표가 먼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지만 상대측이 시비를 걸어오면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들려온다. 아버지에 대한 국민 평가가 ‘성공한 독재’로 사실상 끝났다는 논리를 펴면 그만이란 말이다.
 
                                               


그렇지만 반대파의 공세나 여론에 떠밀려서 마지못해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
용기 있게 잘못을 인정하면 오히려 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참고해야할 모델은 새 천년 개막을 앞두고 과거의 과오를 사과로 정리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다. 이젠 고인이 된 요한 바오로 2세는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인 1999년 12월 18일 15세기에 로마 교회의 권위에 도전해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보헤미아 출신 잔 후스의 처형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후스(1369-1415)는 로마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서에 최고 권위를 부여한 위클리프설을 옹호하다가 콘스탄츠 공회에서 이단자로 단죄 받아 화형당한 체코 국민의 영웅이다. 교황청은 동시에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복권시키고, 나치 통치하에서 박해받은 유태인들을 돕지 않은 데 대해 공개 사과하는 등 잘못된 일련의 과거사에 대해서도 맹성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전임자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예지를 펼쳐 보였다.
                                              


5·16쿠데타 50주년은 갓 지나갔지만 민주화-산업화 세력이 정치적 화해의 산물로 짓는 박정희기념관이 12년의 표류 끝에 오는 9월 서울 상암동에서 문을 여는 것을 변곡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의학자 라자르는 <사과 솔루션>(지안출판사)이란 책에서 사과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강력한 갈등조정수단이자 ‘리더의 언어’라고도 역설한 바 있다. 게다가 라자르는 여성이 남성보다 사과를 더 세련되게 할 줄 안다고 했다지 않은가.


 *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분량을 늘려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