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손의 편지에는 다분히 익살기가 섞였지만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직업을 빗댄 상상력은 번뜩이는 작가답다. 고통을 겪는 사람을 돕거나 치유해 준다는 소명의식을 일단 젖혀놓고 직업이 갖는 특성만 보면 호손의 재담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의사는 병을 앓는 환자의 불행을 먹고 살고, 변호사는 다투는 당사자들의 불행 덕분에 사는 걸 부인할 수만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의사와 비슷한 직역인 약사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것이라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그러고 보면 한 나라의 최고 인재들이 머리를 싸매고 이 두 곳에만 몰려드는 건 가히 국가적 불행이나 다름없다.
최근 의사·약사, 변호사 집단이 보여주는 행태는 ‘남의 불행’을 떠올리고 남는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일반의약품의 슈퍼마켓 판매 논란에서는 약사들의 과욕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이명박 대통령과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를 다시 추진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6만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대한약사회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약사회 누리집 내부게시판에는 ‘약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 만큼 대한약사회도 절대불가의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MB 정권 타도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등의 겁박도 담겼다고 한다.
국민이 아닌 약사회의 밥그릇만 지켜주려 한다는 여론에 정부는 일단 백기를 들었지만 아직 넘어야할 산은 험난하다. 오는 15일 중앙약사심의위원회를 열어 의약품 재분류 작업을 시작한다지만 국회가 약사법을 고쳐야만 실질적인 국민편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내년 4월 총선을 의식해 약사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심야나 공휴일에 국민이 겪는 불편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핵심 정책인데도 말이다. 그것도 선진국에선 오래 전부터 시행하는 제도다.
논란을 틈타 지난주 득달 같이 자신들의 이권 챙기기에 나선 대한의사협회도 눈총을 받고 있다. 기자회견에서 약사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이참에 ‘선택의원제’ 추진 철회를 외치며 복지부 장관의 퇴진을 내건 탓이다.
선택의원제는 만성질환을 지닌 환자가 한 의원을 지정해 치료받으면 환자 본인 부담을 줄이고 선택된 의원은 인센티브를 받는 제도다. 효과적인 질환 관리와 건강보험 재정 절감 효과를 얻기 위해 내놓은 방안이어서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많다. 하지만 의사협회는 선택의원제가 가정의학과나 내과로만 환자가 몰리고 환자의 의원 선택권은 제한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신규 의사들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진입 장벽이 된다는 게 반대 이유의 하나다. 국민 건강보다 자신들의 이권이 줄어드는 것만 걱정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최근 전관예우 철폐 파동을 겪은 변호사 사회도 포화상태에 이른 자신들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애발스러운 행태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기업에 변호사를 준법지원인으로 두게 하는 상법 개정안은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주도해 통과시켜 이미 발효 중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전국 경찰서마다 피의자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변호사를 ‘호민관’으로 채용하라고 경찰청에 제안한 바 있다. 지방자치단체에는 법률 자문역으로 상근 변호사를 둘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법원과 검찰, 헌법재판소, 국회, 감사원에도 변호사를 법률 보조직으로 채용할 것을 강력히 희망했다. 하나같이 국민 세금과 기업 부담을 전제로 하는 것들이다. 그렇잖아도 청년실업이 최대 현안의 하나인데 변호사들만 특혜를 누리겠다면 설득력이 있겠는가.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약물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등재돼 있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큰 원칙으로 돌아가면 해법은 간단하다. 다른 상품에서는 소비자가 대접을 받지만 의·약계에서는 환자가 ‘을’이고 ‘약자’라는 관념이 뿌리 깊다. 병원·약국 경영이 어렵다지만 의사와 약사는 환자의 건강을 위해 존재한다는 기본 가치를 망각하면 안 된다.
약사들은 고통 받는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생각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도덕적 가치 규범을 따르겠다는 ‘디오스코리데스 선서’를 되새겨야 한다. 의사들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가장 먼저 생각하겠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말아야 한다. 변호사들은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는 변호사회관 벽의 글귀를 항상 떠올려야 한다.
최고 엘리트 직역에서 일하는 이들이 존경의 대상이기는커녕 기껏해야 선망의 대상이나 경멸의 대상까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불행이다. 정부와 정치인들도 이들의 직역 이기주의가 아닌 소비자와 국민의 편익이 뭔지를 잊는다면 민심의 심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 디오스코리데스 선서
나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앞에서 약학의 전문인으로서 내 삶을 인류를 위해 바치겠다는 엄숙한 선서를 합니다. 나는 오늘 이 순간부터 고통 받는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어떠한 생명이라도 소홀히 여겨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나의 모든 지식과 능력을 발휘하여 인류복지 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나는 약학에 대한 전문적인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켜 항상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나는 약학과 관련한 모든 법규를 엄격히 준수할 것이며 대중의 이익을 위한 모든 법제도를 준수하겠습니다.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고의 도덕적 가치 규범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약학의 전문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하여 이 모든 조항들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것임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 히포크라테스 선서
(현대판--1948년 세계 의사협회에서 제정한 일종의 수정판인 ‘제네바 선언’)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에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지키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원문)
나는 의술의 신 아폴론과 아스클레피오스, 휘기에이아, 파나케이아, 그리고 모든 남신과 여신의 이름으로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이 선서와 계약을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이 의술을 가르쳐 준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고 나의 삶을 스승과 함께하여,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나의 것을 그와 나누며, 그의 자손들을 나의 형제로 여겨 그들이 의술을 배우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보수나 계약 없이 의술을 가르칠 것이며, 내 아들들과 스승의 아들들, 그리고 의료 관습에 따라 선서하고 계약한 학생들에게만 교범과 강의와 다른 모든 가르침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를 돕기 위해 섭생법을 처방할 것이며, 환자들을 위해나 비행으로부터 보호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요청을 받아도 치명적인 약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며, 그 효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어떤 여성에게도 낙태용 페서리를 주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의 삶과 의술을 순수하고 경건하게 지켜 가겠습니다.
나는 칼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결석 환자도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맡기겠습니다.
나는 어느 집을 방문하든지 환자를 돕기 위해 갈 것이며, 고의적인 비행과 상해를 삼가고, 특히 노예든 자유민이든 여자들이나 남자들과 성적 접촉을 삼가겠습니다.
내가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또는 진료 과정 외에 그들의 삶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비밀로 지키고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내가 이 선서를 지키고 어기지 않는다면, 내가 나의 삶과 나의 의술에 대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원한 명예를 얻게 하시고, 만약 내가 선서를 어기고 위증한다면 나에게 그 반대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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