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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장애인과 정치


1997-11-12
 
 3년전 뉴욕의 관광명소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장애인 차별 빌딩」으로 낙인찍혀 미국사회의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다. 미국 장애인권익보호협회가 법무부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빌딩은 장애인 편의시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1931년에 완공돼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 법도 하다. 하지만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연방정부의 판정이 나와 막대한 예산을 들여 100층이 넘는 빌딩의 개수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우리나라에서라면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하버드대가 지난 9월 케네디 스쿨에 입학한 한국인 척추마비 학생을 위해 60년이 넘은 유서깊은 건물의 출입문을 뜯어고쳤다는 소식을 상기해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세계 중심국이 되겠다고 어쭙잖은 호언만 하는 우리는 어떤가. 청각장애인들이 TV토론회에 나오는 대선후보들의 정견을 듣고 싶어도 수화나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방송사들이 꺼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별도의 카메라가 붙어야 하고 일반시청자들에게 화면의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상인들의 시청에 장애가 되니 장애인들은 뒷전에나 있으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점자로 된 법정홍보물을 만들겠다는 후보가 아직 없을뿐더러 선거관리위원회마저 외면하고 있어 청각장애인들과 처지는 마찬가지다. 많은 지체장애인들은 이번에도 휠체어가 올라가지 못하는 2층 투표장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형편이다.
대선후보나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은 때만 되면 장애인시설에 잘도 간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끔찍이 여기고 있음을 널리 알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장애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게 사회의 의무라고 소리높여 역설하곤 한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안다. 그것은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자신들을 홍보도구로 이용할 따름이라는 것을. 이러고도 김영삼 대통령이 우리 국민을 대표해 프랭클린 루스벨트재단이 주는 국제장애인상을 받은 게 신기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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