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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새 정부의 작명

1998-01-14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김정희였다. 그가 스스로 지은 예명이나 호는 무려 503개나 된다. 귀양살이의 서러움이 담긴 노구가 있는가 하면 취흥이 도도할 때 문득 떠올린 취옹, 공자를 생각하면서 붙인 동국유생도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단연 우리 귀에 익은 추사였다.비록 김정희가 아니라도 이름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강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름의 상징성을 너무 신비화하다 보면 「이름의 미신」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다. 고대 로마인들이 이름 좋은 사람부터 전쟁터에 보낸 것도 미신 탓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무런 전공이 없던 스키피오를 일약 지휘관으로 발탁한 것은 단지 이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다.
 요즘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진영이 새 정부의 이름짓기에 고심하고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렇다고 작명소를 찾아가야할 계제도 아니어서 여론조사까지 했다는 소식이다. 시민들이 제시했다는 이름은 신문민정부, 개혁문민정부, 진정한 문민정부, 제2대 문민정부, 경제정부, 신 경제정부, 국민정부 등 갖가지다. 「문민정부」에 진절머리가 나지도 않았는지 문민을 접두어로 한 이름이 많은 게 신기할 정도다.
 새 정부가 작명에 이처럼 애착심을 갖는 배경은 역대 정부와의 차별화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도 6공화국이라 칭한 노태우정부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일본어라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문민」이라는 말을 원한 것은 군사정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름좋은 하눌타리」가 되고 말았다.
 대통령이나 총리 이름을 자연스럽게 붙여 쓰지 않고 굳이 별도의 작명을 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김대중정부」라고 부르면 간단할 일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행여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불경스러워서라면 그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진정으로 유능한 정부라면 역사가 더 멋진 이름을 붙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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