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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 칼럼. 1인자와 2인자

1998-04-08
역사에 길이 남는 건국엔 으레 걸출한 지도자와 그에 버금가는 1등공신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생국 가운데 모범생으로 일컬어지는 싱가포르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간관계는 리콴유 초대총리와 고갱쉬 전제1부총리다.

두 지도자의 관계는 찾기 힘들 만큼 특이하다. 그들은 함께 손을 맞잡고 나라를 일으켜세운 주역이면서도 인간적인 친근함은 나눠갖지 못했다. 1인자와 2인자 사이였던 두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부인 콰걱추를 제외하고는 리콴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었던 사람은 고갱쉬가 사실상 유일했다.

고갱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 리콴유의 정책결정에 도전하거나 수정을 강요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리콴유는 화를 내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만큼 고갱쉬의 생각은 리콴유를 설득하고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리콴유 총리의 대역을 할 때도 많았다. 그는 총리가 되고 싶었을 법하지만 결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생각이 달랐지만 상호보완적인 장점을 살려 오늘날의 싱가포르를 일궈낸 것이다.

서독의 초대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와 2대 총리를 지낸 루트비히 에어하르트 초대 경제장관의 관계도 몇가지만 빼면 「리콴유와 고갱쉬의 사이」와 흡사하다. 아데나워와 에어하르트는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다.

특정정당에 속하지 않았지만 자민당 계열에 가까웠던 에어하르트를 끌어들이지 못했던들 기민당 소속의 아데나워가 정치적 입지는 물론 국부(國父)로 숭앙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아데나워는 「라인강의 기적」이 에어하르트의 작품으로 표상되는 것을 싫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에어하르트가 자신의 후임자가 되는 것도 마지막까지 훼방을 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경제문제만은 에어하르트에게 맡겨 철저한 역할분담을 했다. 실제로 에어하르트는 독일 경제부흥의 물꼬를 튼 획기적인 조치들을 독자적으로 취해 나갔다. 에어하르트가 만든 기민당의 경제강령을 아데나워는 손하나 대지 않고 받아들였다.

경제성장, 완전고용, 통화안정, 대외균형을 뼈대로 하는 이 강령은 오늘날 독일경제의 기틀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두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개인관계는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일에서는 환상적인 상호보완 관계를 형성,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 총리서리의 관계도 이들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이념과 정치노선이 달랐던 두 사람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한 배를 타고 숙명적인 1인자와 2인자 사이가 된 것부터가 그렇다. 용어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상황논리로만 따지면 지금은 「제2의 건국」이나 다름없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새정부를 더불어 출범시킨 지 달포가 거의 다 된 시점에서 보면 두 지도자는 끊임없이 「협력적 긴장관계」를 이어가는 모습이다.

때로는 모양새를 갖춰주기도 하지만 엊그제까지 김대통령은 과거의 관례를 깨고 국무회의를 대부분 자신이 직접 주재하는 것을 비롯해 총리의 입지를 은연중에 압박하고 있다. 이에 맞서 김총리서리 역시 겉으론 예우를 하면서도 무언의 시위를 벌이곤 한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세력확장을 둘러싼 신경전도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된다. 국민이 관전하고 싶은 것은 이들의 개인적인 권력게임이 아니라 국정에서 얼마나 서로의 장점을 살려 나락에 떨어진 우리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느냐는 것이다. 「정치수완의 비밀은 역사속에 있다」는 윈스턴 처칠의 충고는 김대통령과 김총리서리에게도 통한다.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