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0-25 |
매화 옆의 바위는 예스러워야 제격이다. 소나무 아래 바위는 거친 듯해야 제맛이 난다. 대나무 곁에 놓인 바위는 앙상한 것이라야 어울린다. 화분 안에 얹는 돌은 작고 정교해야 좋다. 중국 고사에 적실하게 묘사된 명장면이다. 이렇듯 삼라만상이 제자리에 있을 때라야 저절로 격조가 배어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우아하고 품격이 넘쳐나도 있을 자리가 아니면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하물며 대자연의 으뜸인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적재적소라는 말이 생겨난 연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올 대선정국을 관전하면서도 새삼 제자리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낡아빠진 정치풍토에 한줄기의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를 모아온 이른바 영입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한계성은 단지 본인들의 안쓰러움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정치와 국민 전체의 불행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3김정치」라는 말로 대표되는 구시대의 청산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지만 이들에게 막상 메아리는 아련하기만 하다.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기대감을 채워주기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 차라리 그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한두 사람만의 생각이 아닐 게다. 이회창 조순 후보는 물론 신한국당 경선에 참여했던 이수성 고문도 마찬가지다. 더 넓게는 경선에서 도중하차한 이홍구 고문도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떤 이는 평생토록 고이 쌓은 명성을 정치판의 아귀다툼에서 하루아침에 날려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겉으로야 매몰찬 다짐을 하고 있지만 오래전부터 속으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다목적카드를 준비해온 현직 대통령과 그의 덕담에 귀가 솔깃해 가슴이 부풀어있던 당사자들 모두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와 유사한 정치실험은 이번 대선에서만 겪는 게 아니다. 지난 대선때 출마하거나 대권에 뜻을 두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나 박태준 의원, 김동길 전 의원 등이 그랬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60년대의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도 마찬가지다. 한 분야에서 최고봉까지 오른 권위자요, 정치때가 묻지 않았던 인물인 이들이 순수한 자의건 타의에 떠밀렸건 대권실험에 동원돼 단 한번이라도 성공사례를 보여주지 못한 사실은 사뭇 교훈적이다. 정권을 재창출하려던 최고지도자, 자신의 권력욕구를 대리만족시키려는 개인이나 집단, 스스로 미망에 빠져든 인사들, 모두에게 주는 가르침은 간단하다.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거물급 정치신참들이 성공할 확률은 극히 낮다는 점이다. 정치력과 지도력을 축적하지 않은 채 「이미지 정치」에만 의존하는 실험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는 웅변에 다름아니다. 역사는 백이숙제같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나라의 공신인 소하나 조참같이 시세를 탈 줄 아는 인물들이 이끌어간다는 사마천의 지적이 일면 타당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라 밖에도 선례가 적지 않다. 미국에서는 억만장자 로스 페로가 정치개혁의 여망을 안고 92년 대권에 도전했다가 한계만 느끼고 사라졌다.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전대통령은 비록 대권을 손에 거머쥐었지만 자유노조운동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던 영광에 상처만 남긴 채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굳이 대선이 아니더라도 선거때마다 정치권이 참신한 인물을 끌어들인다는 명분 아래 특정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전문가를 영입하지만 정치무대에서 성공적으로 홀로 선 인물은 극히 찾아보기 어렵다. 국가의 균형있는 발전과 경쟁력강화를 위해서도 그 길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대선을 관전하면서 배워야 할 또하나의 숙제는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 앞에만 서면 절로 옷깃이 여며지는 송백의 늠름함이 있는 인걸이 더욱 간절해지는 올 가을이다.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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