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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 칼럼> 낯 간지러운 ‘정보化’

1998-04-22
앨버트 고어 미국 부통령 부자의 선각(先覺)은 무릎을 치게 만드는 우연의 일치부터 우선 이채롭다. 그 성격은 다르지만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온존하는 데 한몫을 하는 「고속도로」와 공교로운 인연을 맺고 있다. 고어 부통령의 아버지인 앨버트 고어 1세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활약하면서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고속도로망을 구축하는 일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의 자동차도로가 광대무변한 국토를 사통팔달하는 고속도로망으로 거듭난 것은 앨 고어 1세의 선견지명 덕분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1956년 제정된 미국의 「고속도로법」은 대부분 그의 남다른 생각에서 비롯됐다.

그런 아버지를 닮아선지 고어 부통령은 미국이 지난 93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최첨단 「정보초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는 한편 방대한 「지구촌 정보초고속도로(GII)」 구축계획의 주역이 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깜짝 놀란 일본과 유럽이 이에 뒤질세라 「아시아정보초고속도로(AII)」 건설을 위한 「신사회 간접자본 구축계획」과 「유럽 정보고속도로(TEN)」 구상을 각각 발표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고어 부통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 14일엔 현재의 인터넷보다 1,000배나 빠른 차세대 인터넷 구축을 진두지휘하고 나섰다. 미국의 야심은 정보화전략을 통해 21세기에도 세계의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 다시 태어났다면 「자본론」이 아닌 「정보론」을 썼을 게 자명하다는 유추전망까지 나올 정도이고 보면 정보화의 긴요성은 새삼 들출 필요가 없다.

고어 부자의 탁견(卓見)은 정치지도자들의 앞선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나게 예증한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이에 자극받아 흉내라도 낸 것까지는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 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10년까지 초고속 국가정보통신망, 2015년까지 초고속 공중정보통신망 건설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김대중 대통령도 정보통신의 중요성을 누구 못지 않게 역설하곤 한다. 지난 주말 정보통신부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45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우리의 계획은 경제위기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우리의 기술력과 자본력으로 정보선진국을 따라잡기는 지난(至難)해졌다. 정보화의 국제질서에도 마태(Matthew)효과로 불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우리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의 정보마인드에 대한 실상을 알고 나면 한숨이 나오다가 놀라 멈춰설 지경이다. 수십억원을 쏟아부어 어렵사리 구축해 놓은 정부청사의 근거리통신망(LAN)조차 컴맹인 장관과 고위공직자들 때문에 낮잠을 자고 있다는 실상이 밝혀진 게 바로 김대통령이 업무보고를 받기 직전의 일이다.

LAN을 활용하고 있는 곳은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의 몇몇 부서에 불과하다. 어떤 부처는 설치후 단 한번도 전자결재에 이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 쓰지도 않는 애물단지에 드는 유지비만 수억원에 달한다. 말로만 정보화를 떠드는 국회의원들은 한술 더 뜬다. 홈페이지를 개설해 놓고 있는 의원은 전체의 5분의 1에도 못미치는 50여명에 그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2년전 15대 총선을 앞두고 만든 낡아빠진 홈페이지를 그대로 방치했다가 들통난 것 역시 바로 지난 주말이다. 「전자민주주의 연구회」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한 뒤 「정보화시대를 앞서 간다」고 이미지 관리나 하려는 얄팍한 술책에 다름 아니다. 얼마전에 저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방한했을 때는 대통령부터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 증명사진이나 찍기에 바빴다. 그런다고 정보화가 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고어의 얘기대로 정보화도 실행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오늘 정보통신의 날을 맞아 정보입국(情報立國)과 전자정부 수립이 허울좋은 정치구호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현주소를 보노라면 씁쓸하기만 하다.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