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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아침을 열며...> 대통령의 성공 신드롬

2004-06-02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기간에 고집이 남다른 한 선배와 자신있는 내기를 걸었다. "두고 보십시오. 탄핵이 기각된 뒤에는 대통령이 아주 멋진 지도자는 아닐지라도 제법 괜찮게 환골탈태해서 돌아올 게 틀림없습니다. 나라 장래를 위해선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노대통령에 대한 믿음이라곤 손톱만큼도 보여주지 않는 그 선배는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했다고 대통령의 스타일이 바뀐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극단 어법까지 썼다. 개과천선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며 막말까지 동원하는 선배에게 술 힘을 빌려 세상을 너무 각박하게 살지 말자는 어쭙잖은 충고를 했던 객기는 지우고 싶은 추억이 됐다.

내 장담은 이제 부질없는 일이 될 확률이 더 높아진 게 아닌가 싶다. 헌법재판소가 일부 유죄를 인정한 대목은 빼놓은 채 별 문제가 없다는 부분만 사과할 때부터 낌새가 석연찮았지만 그래도 복귀 일성은 기대를 걸 만했다. 하지만 나의 기대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집권2기도 변한게 없어
노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경제위기, 미진한 개혁, 신중하지 못한 언행, 편가르기, 오기(傲氣) 정치, 미덥지 못한 외교안보정책 등으로 대별된다. 일단 과거형이 된 불법대선자금 모금 혐의와 측근비리를 유예하더라도 그렇다.

당면한 경제챙기기 다짐은 지금까지만 보면 실망 이상의 수준이다. 6.5 재.보궐 선거기간임을 감안하면 외려 야당이 집권당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복귀 이후 노대통령의 민생현장 방문이나 경제 챙기기 일정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엊그제 노사정위원회의 토론회가 고작이다. '가성고처 원성고'(歌聲高處 怨聲高-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이 높구나)라는 춘향전의 시구 한 대목을 끌어대는 한나라당 일각의 촌평은 선거전략으로 치부하더라도 지난 주말 청와대에서 열린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축하행사 행태는 민심의 소재를 애써 외면하는 게 아닌지 착각이라도 하고 싶은 국민들이 적지 않다.

말을 아끼겠다는 약속도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 연세대에서 가진 특강은 점입가경의 극치였다. 재담(才談)을 넘어 한없이 가볍게 들리는 언술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속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유의 잦은 특강.토론.세미나 정치는 행동보다 말이 앞선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다. 때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국민의 뇌리에 잘못 각인되는 것도 대통령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기인 말로 나라를 홍보하고 이미지를 높일 기회는 도리어 피했다는 지적은 더욱 아프다. 참모들의 실책도 있으나 사상 최대 규모에다 서울에선 흔치 않은 세계여성지도자대회에 국가원수가 참석해 개막연설을 하는 관례를 깬 것은 지혜로운 판단이 아니었다.

당선 직후 선언했다가 공수표를 뗐던 통합의 정치도 복귀 일성으로 재다짐했으나 말 잔치에 그칠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무심결에 드러낸 이분법적인 사고는 잠시 동안의 기우로 끝났으면 싶다. 노회찬 민노당 사무총장으로부터 공부가 부족한 탓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

말잔치에 그쳐선 안돼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특유의 오기 역시 줄어들기는커녕 여전하다. 떠나는 총리에 대한 원칙없는 각료 제청 요구나 지지자들과 우호적인 언론조차 반대하는 김혁규 총리 카드 고수는 "결국 내 판단이 두 번의 큰 선거를 승리로 이끌지 않았느냐"며 성공 신드롬을 넘치도록 구가하는 것으로 비친다.

그래선지 국민 지지도 역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달갑잖은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도 탄핵정국 당시보다 10%포인트 안팎이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한 두가지라도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그래서 고집스런 나의 선배가 장을 지지는 흉내라도 내는 광경을 보면 여한이 없겠다.

김학순 본사 미디어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