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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아침을 열며...> 시스템보다 중요한 철학

2004-06-30
프로라고 자긍하는 이들에게 아마추어라는 비판은 때론 수치나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도 우군이 그랬다면 강도는 한결 높다.엊그제 열린우리당의 한 젊은 국회의원이 참여정부의 '아마추어 외교'를 도마 위에 올린 것은 더없이 통렬한 채찍이자 자성의 목소리이다.

김선일씨 납치 피살사건은 노무현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화살을 맞은 셈이다. 좁게는 교민보호의 문제점과 정보라인의 한계를 절감한 사건이지만, 외교.안보정책을 원점에서 되짚어볼 수 있는 호기이기도 하다. 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이 외교.안보시스템을 두루 점검하는 계기가 된 것은 노대통령에겐 역설적인 행운인지도 모른다.

노대통령의 큰 취약점 중 하나가 외교.안보분야라는 사실은 취임 초기부터 제기돼온 터여서 새삼스러울 게 없다. 대통령 자신부터 이 분야에 관한 경륜이 부족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다 신뢰할 만한 인재풀도 다른 분야에 비해 넉넉하지 못하다. 측근들도 이런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을 만큼 난제다. 게다가 국내외 환경은 어느 때보다 열악한 형편이어서 노대통령에겐 도전과 시련의 가시밭길 같다.

외교원칙 바로세울 기회 외교부의 폐쇄적인 조직문화, 타성에 젖은 근무자세, 소홀했던 지역전문가 양성, 외무고시 중심의 순혈주의, 국가정보원의 미진한 정보체계 등 점검하고 수리해야 할 시스템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에 못지않게 긴요한 것은 외교.안보에 대한 철학과 원칙을 바로세우는 일이다. 큰 그림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는 뜻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시스템을 고치는 일보다 우선순위에 놓여야 한다.

외교.안보는 철저히 실용주의와 국가 이익의 잣대로 접근해야 함에도 이따금 이데올로기가 끼여드는 바람에 국가적 에너지 낭비를 가져온다.

'균형적 실리외교'라는 매력적인 수식어와는 달리 목욕물과 아이를 함께 버리는 꼴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사회 분위기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외교행태는 궁극적으로 자승자박이 되기 십상이다. 평화.통일외교라는 대원칙이 섰다면 훗날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덩샤오핑이 보여준 도광양회(韜光養晦-어려운 시기에 칼날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의 정신을 본받을 만하다.

미국 우선이냐 중국 우선이냐가 거론되는 자체가 아마추어리즘이다. 부시 행정부의 만행은 여당 의원들이 집단으로 규탄하면서도 중국의 내정간섭에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 것은 균형적 실리외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한테 과거처럼 굽실거리자는 얘기냐고 반론하면 곤란하다. '그네타기 외교'의 폐해는 노대통령이 높이 평가하는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가 일찍이 뼈저리게 역설했다.

평화.통일외교에선 한반도 주변 4강국을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그 중에서도 미국이 가장 비중이 큰 변수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숭미(崇美) 아닌 용미(用美)를 바탕에 깔지 않으면 안된다. 낭만적 세계관은 일반국민에겐 달콤할지 몰라도 정부와 국가 장래에는 독이 될 수 있다. 정부와 여당만은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 외교의 달인으로 평가받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의 외교 5원칙에도 세계 주류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충고가 빠지지 않는다.

崇美아닌 用美로 나가야 국가안보회의(NSC)에 과도하게 집중된 듯한 권한을 분산하는 일도 노대통령이 점검해 보아야 할 과제 중의 하나다. 외교.안보 관련부처의 일선 손발이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는 데는 NSC로의 힘쏠림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을 한번쯤은 고민해볼 때다.

관료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냉소주의로 돌려버리기엔 하소연이 많이 나온다. 바람직한 것과 가능한 것은 구별해야 좋다.

김학순 본사 미디어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