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06-08 16:06:25
▲서구 지성사 3부작…H 스튜어트 휴즈|개마고원
사법시험이나 행정고등고시 등에서 특정 기수에 인재가 몰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발견된다. 이런 현상은 어떤 조직에서나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회사든 학교든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경우가 흔하다. 대표적으로 공자,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기원전 500년 전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약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서유럽에서 1890년대 이후 40여년간은 20세기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와 지성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로 꼽힌다. 흔히 좁은 의미의 ‘세기말’로 통칭되는 19세기 말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친 20세기 초를 관통하는 때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막스 베버, 베네데토 크로체, 에밀 뒤르켐, 앙리 베르그송, 카를 융, 오스왈트 슈펭글러 등 독보적인 이론을 세운 지식인들이 출현한 그 시기다. 유럽 지성사 연구의 권위자 스튜어트 휴즈가 이 시대를 각별하게 주목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전후 유럽사 분야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낳은 연구자로 평가된다. 스스로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지적 교양은 주로 유럽적이라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그의 역저 ‘서구 지성사’ 3부작은 이 대변혁기와 2차 세계대전을 거친 또다른 격동기의 서유럽 사상사를 인물과 형성과정 중심으로 접근한 현대 고전이다. 이런 점이 통상적인 사상사와 차별화된다. 이미 40여년전에 첫 출간되기 시작했던 이 책들은 오늘날까지 이를 능가하는 저술이 없을 정도라는 호평을 받는다.
이처럼 오래 전에 첫 선을 보였던 책의 번역본 ‘서구지성사’ 읽기가 이 시대에 요긴한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운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7년 6·10항쟁 이후 지금처럼 ‘지식인의 몰락’이라고까지 표현될 만큼 지식인 담론이 우울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3부작은 전체적으로 중요한 시기의 지성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정립하려는 목표를 설정했다. 개개인의 전기적(傳記的) 요소를 중시하는 한편 그 시대 지성인들의 동선(動線)에 역점을 두고 재구성한 점이 특기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일련의 지적 전기는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선 단순한 사상사가 아니라 ‘개념화된 사회사’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통상적인 사상사가 다 익어서 수확한 과일을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이 책들은 과일나무에 과일 하나하나가 열리는 과정을 자세히 소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를테면 지적 거장들 가운데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는지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문장은 시종 품격이 있으면서도 글맛이 느껴진다. 짧은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모든 종합자들 중에서 아도르노는 가장 눈부신 성과를 올렸지만, 그는 그런 멋진 고공비행을 하면서도 헤겔주의라는 귀찮은 모래주머니를 영원히 끌고 다녔다.”
1권 ‘의식과 사회’(황문수 옮김·2만5000원)는 3부작의 중심축을 이룬다. 휴즈는 1890~1930년까지 40년간의 지성적 상황을 실증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대결 구도로 삼는다. 여기에다 무의식의 등장과 주관주의에 비중을 두고 시대를 정리한다.
이에 따라 중심 인물로 프로이트, 베버, 크로체를 세우고 있다. 그 주변에 뒤르켐, 베르그송, 융, 슈펭글러, 안토니오 그람시, 앙드레 지드, 토머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헤르만 헤세 등 수많은 지성들을 배치한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소문난 프로이트의 지적 세계를 이 책만큼 명쾌하게 해부한 것은 찾기 힘들다는 평판을 얻을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다.
저자는 1930~60년의 지적 세대를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첫번째는 프랑스 사람으로 한정했다. 두번째는 유럽과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이나 영국에 정착한 반(反)파시스트 망명자들로 구성됐다.
2권 ‘막다른 길’(김병익 옮김·2만원)은 앞의 프랑스 지성인들을 다뤘고, 3권 ‘지식인들의 망명’(김창희 옮김·2만원)은 두번째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엮은 것이다. 휴즈는 프랑스 사상사에서 1930~60년대의 한 세대를 ‘절망의 시대’로 상정한다. 그렇지만 ‘막다른 상황’을 타개하는 마지막 희망을 알베르 카뮈, 테야르 드 샤르댕,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서 찾아낸다. 3권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라는 시련에 직면한 지식인들의 고뇌를 현실감 있게 엮어냈다.
3부작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같다. 각기 독립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심층적인 지성사를 공부하고 싶은 독자들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사를 곁들여 읽으면 한층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에 함께 나온 니콜 라피에르의 ‘다른 곳을 사유하자’(이세진 옮김·1만4000원·푸른숲)도 더불어 읽을 만하다. 이 책은 ‘서구 지성사’ 시리즈 3권 ‘지식인들의 망명’과 비교된다. 20세기 초 망명한 지식인들로부터 학제간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지금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비판적 지식인들의 삶과 사유를 다루었다는 점이 흡사하다. 이 책은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소통을 이야기한다. 들머리에 인용한 “세계가 그토록 광대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흩어지기 위함이니”라는 괴테의 말이 이 책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상징하는 듯하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경우가 흔하다. 대표적으로 공자,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기원전 500년 전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약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서유럽에서 1890년대 이후 40여년간은 20세기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와 지성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로 꼽힌다. 흔히 좁은 의미의 ‘세기말’로 통칭되는 19세기 말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친 20세기 초를 관통하는 때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막스 베버, 베네데토 크로체, 에밀 뒤르켐, 앙리 베르그송, 카를 융, 오스왈트 슈펭글러 등 독보적인 이론을 세운 지식인들이 출현한 그 시기다. 유럽 지성사 연구의 권위자 스튜어트 휴즈가 이 시대를 각별하게 주목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전후 유럽사 분야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낳은 연구자로 평가된다. 스스로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지적 교양은 주로 유럽적이라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이처럼 오래 전에 첫 선을 보였던 책의 번역본 ‘서구지성사’ 읽기가 이 시대에 요긴한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운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7년 6·10항쟁 이후 지금처럼 ‘지식인의 몰락’이라고까지 표현될 만큼 지식인 담론이 우울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3부작은 전체적으로 중요한 시기의 지성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정립하려는 목표를 설정했다. 개개인의 전기적(傳記的) 요소를 중시하는 한편 그 시대 지성인들의 동선(動線)에 역점을 두고 재구성한 점이 특기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일련의 지적 전기는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선 단순한 사상사가 아니라 ‘개념화된 사회사’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통상적인 사상사가 다 익어서 수확한 과일을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이 책들은 과일나무에 과일 하나하나가 열리는 과정을 자세히 소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를테면 지적 거장들 가운데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는지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문장은 시종 품격이 있으면서도 글맛이 느껴진다. 짧은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모든 종합자들 중에서 아도르노는 가장 눈부신 성과를 올렸지만, 그는 그런 멋진 고공비행을 하면서도 헤겔주의라는 귀찮은 모래주머니를 영원히 끌고 다녔다.”
1권 ‘의식과 사회’(황문수 옮김·2만5000원)는 3부작의 중심축을 이룬다. 휴즈는 1890~1930년까지 40년간의 지성적 상황을 실증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대결 구도로 삼는다. 여기에다 무의식의 등장과 주관주의에 비중을 두고 시대를 정리한다.
이에 따라 중심 인물로 프로이트, 베버, 크로체를 세우고 있다. 그 주변에 뒤르켐, 베르그송, 융, 슈펭글러, 안토니오 그람시, 앙드레 지드, 토머스 만, 마르셀 프루스트, 헤르만 헤세 등 수많은 지성들을 배치한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소문난 프로이트의 지적 세계를 이 책만큼 명쾌하게 해부한 것은 찾기 힘들다는 평판을 얻을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다.
저자는 1930~60년의 지적 세대를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첫번째는 프랑스 사람으로 한정했다. 두번째는 유럽과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이나 영국에 정착한 반(反)파시스트 망명자들로 구성됐다.
2권 ‘막다른 길’(김병익 옮김·2만원)은 앞의 프랑스 지성인들을 다뤘고, 3권 ‘지식인들의 망명’(김창희 옮김·2만원)은 두번째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엮은 것이다. 휴즈는 프랑스 사상사에서 1930~60년대의 한 세대를 ‘절망의 시대’로 상정한다. 그렇지만 ‘막다른 상황’을 타개하는 마지막 희망을 알베르 카뮈, 테야르 드 샤르댕,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서 찾아낸다. 3권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라는 시련에 직면한 지식인들의 고뇌를 현실감 있게 엮어냈다.
3부작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같다. 각기 독립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심층적인 지성사를 공부하고 싶은 독자들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사를 곁들여 읽으면 한층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에 함께 나온 니콜 라피에르의 ‘다른 곳을 사유하자’(이세진 옮김·1만4000원·푸른숲)도 더불어 읽을 만하다. 이 책은 ‘서구 지성사’ 시리즈 3권 ‘지식인들의 망명’과 비교된다. 20세기 초 망명한 지식인들로부터 학제간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지금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비판적 지식인들의 삶과 사유를 다루었다는 점이 흡사하다. 이 책은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소통을 이야기한다. 들머리에 인용한 “세계가 그토록 광대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흩어지기 위함이니”라는 괴테의 말이 이 책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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