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06-29 14:56:00
▲ 깨끗함과 더러움… 조르주 비가렐로|돌베개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 속에서 나오고 밝음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생겨난다(潔常自汚出 明每從晦生也).”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명구이다.
“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다(眞俗一如 染淨不二).” 원효 대사가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고 나서 던진 해탈선언이다.
“(예수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들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성경 누가복음 11장 38~40절에서 이르는 말이다.
한결같이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은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청결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죽비를 내려치듯 설파한 것이다. 범속인들은 누구나 깨끗하고 더러움에 차별을 두곤 하지만, 사물의 본성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는 경구는 이처럼 동서양과 고금이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깨끗함과 더러움의 기준은 고정관념과 분별심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선지 인류 문화사의 한 단면은 청결 관념의 변천사로 점철되어 있다. 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내의를 자주 갈아입으며 향수를 뿌려 단장하는 일이 오늘날엔 너무나 당연한 듯하지만 지난날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프랑스의 사회역사학자 조르주 비가렐로는 대표작 ‘깨끗함과 더러움’에서 이 같은 몸의 청결에 관한 의식변화를 생활사·미시사적 접근방법으로 분석하고 정리해냈다. 이 책은 ‘청결과 위생의 문화사’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목욕과 씻는 문화’의 굴곡어린 궤적을 따라가며 상식을 뛰어넘는 사실들을 들추어낸다. 그렇다고 ‘씻기’나 물과 관련된 청결문화의 흐름만 살피는 것은 아니다. 이잡기, 내의, 향수 등 몸의 청결과 밀접한 다른 소재도 함께 통찰해 사회적·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낸다.
미시사 저작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문학작품, 역사서, 연감, 백과전서, 서신, 회고록, 학술서, 회화, 건축, 예절서 등 다양한 사료를 추출해 낸 뒤 정성스레 엮고 짠 흔적이 역력하다. 파리 5대학 교수이기도 한 저자가 ‘아름다움의 역사’ ‘ 몸의 역사’(공동 편집) ‘강간의 역사’ 등 몸이나 위생과 관련된 책을 펴낸 것만 눈여겨 봐도 학문적 권위는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기간에 초점을 맞춰 ‘선택과 집중’ 방식을 택했다.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삼긴 했지만 주로 프랑스 사회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흔히 미시사를 추적하는 프랑스 역사가들이 그렇듯이 비가렐로는 구조주의의 지리적 결정론에 매몰된 인간의식을 복원하는 길을 ‘망탈리테(mentalite·심성)의 역사’에서 찾는다. 흥미진진한 일화로만 일관되지 않고 풍속의 변화에 내재하는 망탈리테의 조류를 간파해 낸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 책이 밝히고 있는 ‘몸의 청결’ 풍속사 가운데 이채로운 것도 적지 않다. 우선 16세기 들어 본격화된 ‘내의 입기’는 단순히 청결의 개념뿐만 아니라 사회규범이나 예절의 차원으로 승화한다는 점이다. 셔츠가 비록 호화롭지는 못하더라도 색깔은 반드시 흰색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색적이다. 16, 17세기 처세서들이 ‘내의의 청결이 곧 사람의 청결을 의미한다’는 시각을 한층 부추긴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7세기에는 목욕탕과 한증막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애의 장소로 애용된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목욕에는 유희적 일탈의 의미가 담겼으며, 이는 청결문제와는 또 다른 문화적 맥락을 지닌다고 분석한다.
지금의 상식으론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몸을 물로 씻지 않고도 오랫동안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장치가 존재할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궁정 대신들이 얼굴을 흰 천으로 문지르던 ‘건조한 세수’는 17세기에 통용되던 일종의 ‘법도’였다.
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목욕 습관이 사라질 때도 있었던 것은 유럽에 창궐하던 페스트가 주된 원인 중의 하나였던 게 틀림없다고 책은 진단한다. 이를 두고 몽테뉴가 “목욕이 과거 모든 나라들에서 행해지던 낡은 습관”이라고 일갈하는 모습이 기이하게 여겨진다. 예쁜 화장보다 단순히 “청결하다”는 단 한마디가 여성에 대한 지고(至高)의 찬사일 때도 있었다. 당시엔 청결이 고귀한 신분의 상징인 셈이다.
저자는 ‘청결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오늘날의 판단기준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역설한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운 대목은 독자에 대한 친절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따금 설명이 중언부언되는 점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갈파한 E H 카의 말을 원용해 보면 우리네 현대식 화장실, 목욕탕, 내의, 향수 같은 청결문화 구조가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와 대화를 나눠도 좋을 것 같다. 또 이 책을 읽고 나서 ‘목욕탕과 화장실이 깨끗해질수록 지구는 더 더러워진다’는 역설적인 경고를 한번쯤 머릿속에 담아두어도 괜찮을 듯하다. 정재곤 옮김. 1만5000원
“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다(眞俗一如 染淨不二).” 원효 대사가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고 나서 던진 해탈선언이다.
“(예수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들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성경 누가복음 11장 38~40절에서 이르는 말이다.
한결같이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은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청결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죽비를 내려치듯 설파한 것이다. 범속인들은 누구나 깨끗하고 더러움에 차별을 두곤 하지만, 사물의 본성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는 경구는 이처럼 동서양과 고금이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깨끗함과 더러움의 기준은 고정관념과 분별심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선지 인류 문화사의 한 단면은 청결 관념의 변천사로 점철되어 있다. 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내의를 자주 갈아입으며 향수를 뿌려 단장하는 일이 오늘날엔 너무나 당연한 듯하지만 지난날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프랑스의 사회역사학자 조르주 비가렐로는 대표작 ‘깨끗함과 더러움’에서 이 같은 몸의 청결에 관한 의식변화를 생활사·미시사적 접근방법으로 분석하고 정리해냈다. 이 책은 ‘청결과 위생의 문화사’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목욕과 씻는 문화’의 굴곡어린 궤적을 따라가며 상식을 뛰어넘는 사실들을 들추어낸다. 그렇다고 ‘씻기’나 물과 관련된 청결문화의 흐름만 살피는 것은 아니다. 이잡기, 내의, 향수 등 몸의 청결과 밀접한 다른 소재도 함께 통찰해 사회적·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낸다.
미시사 저작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문학작품, 역사서, 연감, 백과전서, 서신, 회고록, 학술서, 회화, 건축, 예절서 등 다양한 사료를 추출해 낸 뒤 정성스레 엮고 짠 흔적이 역력하다. 파리 5대학 교수이기도 한 저자가 ‘아름다움의 역사’ ‘ 몸의 역사’(공동 편집) ‘강간의 역사’ 등 몸이나 위생과 관련된 책을 펴낸 것만 눈여겨 봐도 학문적 권위는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쾌락의 동산’(1500년, 부분). 그림은 에로티시즘과 읽어버린 낙원, 남녀 혼욕의 풍경 등을 보여준다.
이 책이 밝히고 있는 ‘몸의 청결’ 풍속사 가운데 이채로운 것도 적지 않다. 우선 16세기 들어 본격화된 ‘내의 입기’는 단순히 청결의 개념뿐만 아니라 사회규범이나 예절의 차원으로 승화한다는 점이다. 셔츠가 비록 호화롭지는 못하더라도 색깔은 반드시 흰색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색적이다. 16, 17세기 처세서들이 ‘내의의 청결이 곧 사람의 청결을 의미한다’는 시각을 한층 부추긴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7세기에는 목욕탕과 한증막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애의 장소로 애용된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목욕에는 유희적 일탈의 의미가 담겼으며, 이는 청결문제와는 또 다른 문화적 맥락을 지닌다고 분석한다.
지금의 상식으론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몸을 물로 씻지 않고도 오랫동안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장치가 존재할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궁정 대신들이 얼굴을 흰 천으로 문지르던 ‘건조한 세수’는 17세기에 통용되던 일종의 ‘법도’였다.
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목욕 습관이 사라질 때도 있었던 것은 유럽에 창궐하던 페스트가 주된 원인 중의 하나였던 게 틀림없다고 책은 진단한다. 이를 두고 몽테뉴가 “목욕이 과거 모든 나라들에서 행해지던 낡은 습관”이라고 일갈하는 모습이 기이하게 여겨진다. 예쁜 화장보다 단순히 “청결하다”는 단 한마디가 여성에 대한 지고(至高)의 찬사일 때도 있었다. 당시엔 청결이 고귀한 신분의 상징인 셈이다.
저자는 ‘청결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오늘날의 판단기준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역설한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운 대목은 독자에 대한 친절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따금 설명이 중언부언되는 점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갈파한 E H 카의 말을 원용해 보면 우리네 현대식 화장실, 목욕탕, 내의, 향수 같은 청결문화 구조가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와 대화를 나눠도 좋을 것 같다. 또 이 책을 읽고 나서 ‘목욕탕과 화장실이 깨끗해질수록 지구는 더 더러워진다’는 역설적인 경고를 한번쯤 머릿속에 담아두어도 괜찮을 듯하다. 정재곤 옮김.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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