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 미국 의회는 ‘실크로드 전략 법안’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는 소련 붕괴 이후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과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인 의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러시아·중국·이란 등을 견제하고 약화시키려는 목적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진보적인 민주당 출신이지만 주저없이 서명했음은 물론이다. 이 법안의 핵심은 중앙아시아에 미군을 배치하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하나바드 군사기지는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전초기지가 됐다.
이 법안과 관련된 미 의회보고서를 보면 훨씬 확연해진다. “100여년 전 중앙아시아는 차르 러시아, 식민주의 영국, 나폴레옹의 프랑스, 페르시아, 오토만 제국의 거대한 게임 판이었다. 100년 후 소련의 붕괴로 새로운 거대한 게임이 시작됐다. … 오늘날 이 거대한 게임의 이해관계에서 새로운 경쟁자는 미국이다.”
지난달 19일 영국의 더 타임스는 중국이 아프가니스탄의 구리광산 개발권 입찰 경쟁에 뛰어들면서 이곳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이 지난날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연상시킨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시선이 곱지 않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싸우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퍼붓는 동안 중국은 엄청난 양의 자원 확보라는 실익만 챙기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러시아는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 경찰을 보냈다. 러시아의 비민간인이 아프간 땅을 밟은 건 1979년 12월 침공했던 소련군이 무자헤딘의 무력 항쟁에 무릎을 꿇고 1989년 2월 완전 철수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서유럽 국가들, 일본·터키·이란 등이 하나같이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유라시아’ 개념을 처음 도입한 지정학자 핼퍼드 맥킨더(1861~1947)는 유라시아의 패권 보유국이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은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체스판 위에서 러시아와 벌인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을 반영한 것이다.
영국 언론인 출신의 중앙아시아 전문가인 피터 홉커크의 역작 <그레이트 게임>(사계절)은 이 지역을 둘러싼 거대한 드라마를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100년간에 걸쳐 벌인 외교·첩보전과 무력 충돌을 말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남진정책을 펴던 러시아와 인도 식민지를 지키려던 영국이 패권을 놓고 승부를 겨루었던 땅이다.
홉커크는 이 거대한 게임을 일반적인 역사쓰기에서 벗어나 긴장감과 박진감 넘치는 다큐멘터리처럼 엮었다. 영국 정보 장교인 아서 코널리가 처음 사용했던 말인 ‘그레이트 게임’의 중심에는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19세기 내내 이어진 ‘그레이트 게임’은 20세기 초에 끝났지만, 러시아에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고 붕괴하는 과정에서 게임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남쪽의 선수로는 영국 대신 미국이 자리했다. 일본 국제문제 저널리스트 다나카 사카이의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전략과문화)을 함께 읽으면 21세기판 ‘그레이트 게임’의 전황이 더욱 명쾌하게 정리된다. 1994년 탈레반 등장 전후부터 이어져온 미국과 탈레반, 알 카에다,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의 또 다른 ‘그레이트 게임’을 객관적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다.
‘그레이트 게임’은 늘 현재진행형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가보다. 이 게임은 단순하게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아프간’이란 말에는 ‘힘들다’는 뜻이 담겨 있다니 ‘땅’을 의미하는 ‘스탄’과 합쳐져 이름만큼이나 기구하고 ‘힘든 땅’임에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