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국이라고 자처하는 서양인들이 자기들과 뻔질나게 교역을 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여전히 전래적인 운수방법인 인력거를 타고 관광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줄로 여겼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국민은 서구의 신발명품을 거침없이 받아들여 서울시내 초가집 사이를 누비며 바람을 쫓는 속도로 달리는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구경할 수 있다니 어찌 놀랍고 부끄럽지 않으랴(서울에서 전차가 달린 것은 도쿄보다도 3년 앞선다).” “한국 사람들의 본성은 배타적이 아니다. 타협적이며 친절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부지런한 민족이다. 능력 있는 지도자들만 있다면 이른 시일 내에 현대 문명국가의 수준에 오를 희망이 있는 국민이다. 국왕 스스로도 외국인의 조언과 도움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1901년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독일기자 지그프리트 겐테가 쓴 여행기의 일부다. 지리학자이기도 한 겐테의 여행기는 동양과 조선에 대한 선입견과 경멸로 가득 찼던 여느 외국인들의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비교적 객관적이고 세밀하게 관찰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것도 며칠 잠깐 둘러본 게 아니라 반년 가까이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서울, 강원도 당고개 금광, 금강산을 거쳐 제주도 한라산 정상까지 등반(한라산의 높이가 1950m라는 것도 처음 측정)한 뒤 한 달여 동안 ‘쾰른 신문’에 연재했던 것이다.
겐테 기자의 시각과는 달리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 명분은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화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태학사)는 이러한 일본 식민사관의 맹점을 역사 자료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반박한다. 조선이 메이지 일본의 침략기도에 시달리면서도 자수자강(自修自强)을 위해 진력한 사실도 예증한다. ‘당파싸움은 유교적 이상을 실현한 붕당정치였다. 고종은 무능한 군주가 아니라 개혁군주였다. 강화도 조약을 낳은 운요호 사건이 일본의 교묘한 공작으로 일어났다. 국권 침탈이 일본의 강압과 불법에 의해 이루어진 만큼 국제법상 무효다’ 등등. 새로운 사실을 접한 일본 학생들의 놀라운 반응과 질의응답 내용도 아울러 전해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의 부정부패 문제를 과학적으로 공박하는 대목이다. 일본이 16세기 조선에 매관매직이 성행했다고 주장하지만, 매관매직의 증표인 납속공명첩은 운석의 지구 충돌로 말미암아 자연재해가 발생하자 구휼곡 부족으로 개인 소유의 여유곡식을 동원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한다. 지은이는 조선에서 납속공명첩을 만든 것이 자연재해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유럽 여러 나라의 자료들을 직접 찾아냈다.
‘내재적 발전론’에 바탕을 둔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교수신문이 엮은 <고종황제 역사청문회>(푸른역사)를 함께 읽으면 다른 의견을 균형 있게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태진 교수의 견해에 대한 김재호 전남대 교수의 반론과 재반론 등은 물론 왕현종 연세대 교수, 김기봉 경기대 교수 등 여러 학자들의 논쟁참여로 흥미로운 토론이 전개된다. 학계의 난제였던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첨예한 대립구도를 넘어서는 마당이 펼쳐진다. 지나친 민족주의적 경향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의 통계의존적 연구방법만으로는 당대의 본질을 통찰하기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기 때문이다.
근현대사를 둘러싼 일제강점기의 근대화논쟁, 해방공간의 분단논쟁, 정부수립 후의 민주화 논쟁도 그 뿌리가 구한말의 개화논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상기하면 지금 읽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저자의 말처럼 청산하지 못한 경술국치 100년의 굴레를 떠올리면 우리가 먼저 새겨야 할 내용이다. “조선 병합은 합법적이었고 식민통치를 통해서 한국을 근대화시켜 주었다”고 망언을 일삼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 같은 극우 정치인들이 여전히 설쳐대는 한 더욱 그러하다. |